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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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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여름 휴가 땐 민주주의 축제가 열려

사회적 안식과 대화 민주주의를 함께 추구하는 북유럽 복지국가들
등록 2020-08-01 07:27 수정 2020-08-07 01:43
2019년 7월18일 핀란드 민주주의 축제인 ‘수오미 아레나’에서 정당 청년 조직 대표들이 토론하는 모습.

2019년 7월18일 핀란드 민주주의 축제인 ‘수오미 아레나’에서 정당 청년 조직 대표들이 토론하는 모습.

7월은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 전역이 긴 여름휴가를 보내는 시기이다. 2주간의 짧은 방학을 보내는 겨울과 달리, 여름에 핀란드 학생들은 6월부터 8월 초까지 70일 정도 긴 방학을 즐긴다. 학부모를 비롯한 직장인들은 통상 여름에 4주, 겨울에 2주 정도씩 연간 6~7주 휴가를 사용한다. 처음부터 북유럽 시민들이 이렇게 긴 휴가를 즐겼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사민주의적 복지국가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일정 기간 유급휴가를 즐길 권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본질적으로 중요한 사회적 권리의 하나로 인정되면서 4주, 5주, 6주 휴가제 등이 순차적으로 제도화된 결과다.

스웨덴 알메달렌 정치박람회 전통에서 비롯

특히 연중 해가 가장 긴 하지 전후로 사실상 온 나라가 여름휴가에 들어가면서 공공기관이나 기업들도 개점휴업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중앙정부와 의회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의회는 6월까지 매주 상임위원회와 본회의 등을 열어 부지런히 법안 심사와 정부 결산 심사 등을 마무리 지은 뒤 9월 초 가을 회기를 시작할 때까지 긴 휴식에 들어간다. 의회가 휴가를 시작하면 의회의 감독을 받는 정부도 비슷한 흐름의 여름휴가 시즌을 보내게 된다. 실제로 총리를 비롯한 내각 장관들과 고위 정부 관료들도 긴 여름휴가를 즐기는데 올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핀란드의 산나 마린 총리는 3주 휴가를 사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여름휴가 기간에도 특별한 정치 현안이 발생하면 의회가 소집될 수 있다. 예컨대 올해 코로나 대응을 위한 유럽연합(EU) 차원의 대규모 경기부양 패키지 정책, 2021~2027년 장기 EU 예산에 관한 심의·결정을 위한 정상회의를 앞두고 7월16일 핀란드 의회는 대위원회를 열었다. 이날 위원회는 총리로부터 EU 정상회의에 임하는 정부 계획에 대한 설명을 듣고 다양한 이해관계자 집단과 전문가 의견을 수렴한 뒤 의회 차원의 대응 지침을 정부에 제시했다.

그러나 휴가 기간에 의회가 소집되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로 여름 동안 북유럽 국가들은 큰 국내 정치 쟁점이나 현안 없이 평화로운 시간을 누린다. 일종의 ‘사회적 휴전 합의’라고나 할까? 대신 이들은 긴 여름을 이용해 민주주의 축제를 열어 폭넓은 사회적 대화와 시민 참여가 어우러지는 포럼 정치를 도모한다. 북유럽 민주주의 축제는 스웨덴 알메달렌 정치박람회의 전통에서 비롯됐다. 1968년 당시 스웨덴 사민당의 올로프 팔메 장관(후일 총리 역임)이 여름휴가 기간에 가족 별장과 가까운 고틀란드에서 자유로이 시민들과 만나 정치 연설을 시작한 것이 기원이다. 1980년대부터 다른 정당들이 가세하면서 정치 축제로 발돋움하고, 21세기 들어 미디어와 시민사회단체 등이 대규모로 참여하면서 스웨덴 최대 민주주의 포럼으로 발전했다. 최근에는 알메달렌 정치박람회가 비싼 숙박비와 교통비 등으로 빈곤층과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의 접근성을 제약하고 정치·경제·사회 엘리트들이 교류하는 장으로 변질됐다는 비판이 나와, 스톡홀름·말뫼 등에서 대안적 정치 축제가 시도될 정도로 스웨덴의 민주주의 축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550만 명 인구에 7만3천 명 참가

성공한 스웨덴 사례는 이내 다른 북유럽 국가들로 전파됐다. 2000년대 들어 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국가가 유사한 민주주의 축제를 열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틱 국가들과 벨기에로까지 확산됐다.

핀란드에서는 2006년부터 뽀리시와 상업방송 MTV가 의회와 협력해 민주주의 축제인 ‘수오미 아레나’를 매년 연다. 행사는 핀란드 남서부 해안도시 뽀리의 도심에서 7월 중순 5일간 열리는데, 국제적으로 유명한 뽀리 재즈 축제와 같은 시기에 열린다. 2019년 수오미 아레나 축제는 200개 행사, 300개 단체, 1천 명의 연설자(또는 발표자), 총 7만3천 명의 참가자 등 기록을 남겼다. 핀란드 인구수(약 550만 명)에 견줘 큰 규모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MTV는 5일간 20시간을 할애해 축제 프로그램을 보도하거나 생중계했다.

수오미 아레나는 정치 축제답게 정당과 시민들 간 대화를 촉진하는 것에 일차적 초점을 맞춘다. 정당별로 축제 기간 중 하루씩 배정해 해당 ‘정당의 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정당이 주관하는 다양한 행사와 함께 주 무대에서 정당 대표 등의 연설과 토론 프로그램이 진행된다(TV 중계). 주 무대 행사 가운데에는 총리를 비롯한 의회 정당 대표들 간 토론 프로그램이 있으며, 이는 축제의 하이라이트다. 정당 청년 조직의 대표들도 별도의 토론 프로그램을 열고 대화하며 역시 TV로 생중계된다. 의회의 몇몇 상임위원회는 이 기간을 활용해 여름 특별 회의를 마련해 시민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나아가 수오미 아레나에서는 고용주단체와 노조 등 노동시장 대표 간의 토론을 비롯해 정책 분야별 주요 이해관계자 집단 대표와 전문가가 참여하는 토론 프로그램이 다채롭게 벌어진다. 의제는 기후변화, 미래 혁신, 교육, 사회보장, 에너지, 건강, 주거, 이민, EU, 시민교육, 교통 등 다양한 이슈를 포괄한다. 수백 개 단체가 도심 곳곳에 각양각색의 부스를 설치해, 시민들을 만나 대화하는 풍경이 연출된다. 유감스럽게도 2020년에는 코로나19 여파로 핀란드를 비롯한 대부분의 북유럽 국가들이 민주주의 축제를 취소하고 2021년 7월로 연기한 상태이다. 대신 핀란드의 경우 수오미 아레나 2021년 주제를 미리 내걸고 단체와 개인의 참가 신청과 제안을 받고 있다. 내년 축제의 중심 주제는 ‘공동체, 디지털, 자연’으로 선정했다. 축제의 백미인 정당 대표들 간 토론 프로그램은 올해도 열려 TV로 생중계했다.

독특한 현대 민주주의 흐름 선도

북유럽의 민주주의 축제는 무엇보다 정당 중심 대의 민주주의의 개방성을 확대하고 정치에 대한 시민 접근성을 향상하기 위한 시도로 마련됐다. 또한 북유럽 사회 특유의 합의 정치와 협의적 정책 결정 시스템의 저변을 확대하고, 비공식 포럼 기반 정책 네트워크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한다. 정치인과 시민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북유럽 사민주의 정치 문화와 새로운 참여 민주주의적 요소가 결합했다. 온-오프라인, 공식-비공식 포럼을 넘나드는 전국 규모의 숙의적 공론장을 창출함으로써 민주주의 숙의 시스템 전반의 역동성을 높인다. 더불어 전통적 대표나 참여 채널과 구별되는 제4의 시민 참여 채널로서 참여, 숙의, 시민교육, 축제가 결합한 독특한 현대 민주주의의 흐름을 선도한다.

북유럽의 여름휴가 문화와 민주주의 축제의 새 전통은 연중 무한 반복되는 진영 대립과 반목, 심각한 사회 갈등, 포퓰리즘적 여론정치의 몸살을 앓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딛고 새롭게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게 한다.

글·사진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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