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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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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맞댄 초강대국 러시아 상대하는 핀란드 외교

‘창조·실용’으로 EU 공동 외교 노선과 국가 이익 접합해가
등록 2021-03-06 12:18 수정 2021-03-10 05:24
뻬까 하비스또 핀란드 외무장관(왼쪽 둘째)이 2021년 2월15일(현지시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맨 오른쪽)과 회담하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뻬까 하비스또 핀란드 외무장관(왼쪽 둘째)이 2021년 2월15일(현지시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맨 오른쪽)과 회담하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2011년 유학길에 오른 뒤 핀란드의 국제관계와 외교정책에 관해 반복적으로 접한 표현이 있다. 바로 ‘동과 서 사이에서’라는 글귀다. 흡사 20세기 한반도 역사를 상기시키는 듯한 구절인데, 핀란드 국제관계사의 맥락에서 ‘동’은 유럽 문명에 속한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러시아(구소련 포함)를 뜻하며, ‘서’는 넓은 의미의 서구, 곧 미국과 유럽, 좁혀 말하면 13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핀란드가 속했던 스웨덴을 의미한다. ‘서’의 범주와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지만 ‘동’의 실체인 러시아의 존재는 핀란드가 러시아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19세기 초반 이래 200년간 핀란드 대외관계에서 변함없는 상수로 머물러 있다.

힘세고 까다로운 동쪽 이웃, 러시아

특히 소련과 두 차례 전쟁을 벌인 제2차 세계대전 이래 핀란드 외교정책의 핵심은 힘세고 까다로운 ‘동쪽 이웃’과의 관계를 최대한 평화적으로 잘 관리하는 것이 되었다. 전후 초기 핀란드 외교를 이끈 두 명의 걸출한 대통령의 이름을 딴 ‘빠시끼비-께꼬넨 원칙’은 무엇보다 핀란드와 길게 국경을 맞댄 러시아(당시 소련)의 정당한 안보적 이해관계를 존중하면서 냉전 상황 속 실용주의적 중립 평화외교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1992년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공화국이 탄생하면서 핀란드는 외교정책의 기본 방향을 서쪽으로 전환했고, 1994년 국민투표를 거쳐 유럽연합(EU)에 가입했다. 그러나 21세기 초반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이후 지정학적 슈퍼파워로서 ‘러시아의 귀환’이 본격화하며 핀란드의 국제관계와 외교정책은 다시 신중한 균형과 지역적 안정을 모색하는 쪽으로 변모해왔다. 보수 국민연합당 출신으로 2012년부터 두 번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현 사울리 니니스뙤 핀란드 대통령의 신중한 행보가 이를 대변한다.

물론 EU 회원국이 된 핀란드는 이제 EU 차원의 공동 외교안보 정책의 틀과 방향을 따라야 하며, 독자적 중립외교 노선을 공식적으로 추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국제관계의 현실은 핀란드 정부와 정치 행위자들의 창조적, 실용적 대응을 지속해서 요구한다. 2021년 1·2월 국제 여론을 뜨겁게 달군 러시아 야당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귀국과 연이은 구금 사태 또한 그런 사례다. 이 사건으로 수도 모스크바는 물론 영하 50도의 시베리아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에서 광범위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귀국을 결정한 나발니와 야당 지지자들의 지속적인 시위는 푸틴의 통치가 전과 같지 않음을 시사한다. 미국, 독일, EU 등 세계의 많은 지도자와 단체도 우려와 비판을 가했다. 핀란드에서도 나발니 석방 요구 목소리가 분출됐다. 가장 먼저 산나 마린 총리(사회민주당)가 나발니 구금 소식이 전해진 직후인 2021년 1월18일 오후, 트위터에 “러시아 야당 정치인 나발니는 지체 없이 석방돼야 한다. 러시아는 나발니 독극물 암살 기도 사건을 조사해야 하며, 민주주의에 속하는 야당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밝혔다.

“나발니 석방”… 총리·대통령·외무장관의 대응

이 트위터가 핀란드 내에서 논란을 불렀다. 프랑스처럼 준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를 운영해온 핀란드는 2000년 전면 헌법개혁을 통해 대통령 권한을 대폭 줄이고 총리와 의회 권한을 강화했다. 전통적으로 대통령의 배타적 권한이었던 외교정책 결정권도 다시 정해져서 총리와 내각은 EU 관련 외교정책 사안에 관해, 대통령은 EU 외 외교정책 사안에 주도권과 대표성을 갖고 (상호 협력하에) 활동한다.

새 헌법 틀에서 보면 대러시아 외교정책은 대통령 권한에 속하는데, 총리가 앞서 메시지를 낸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란이었다. 실제 니니스뙤 대통령은 나발니 사태에 직접적인 논평을 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푸틴과 전화 통화로 토론하면서 나발니 재구금은 정당한 근거가 없으며 최대한 빨리 나발니를 석방해야 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한편 총리실은 해당 이슈가 EU의 대러시아 제재 추가 방안과 결부돼 있어 총리 권한을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2021년 2월15일에는 핀란드 외무장관 뻬까 하비스또(녹색당)가 러시아를 방문해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와 회담했다. 라브로프는 일주일 전 EU 외무장관 주제프 보렐과의 회담에서 EU를 ‘못 믿을 파트너’라고 비난하면서 나발니 석방 등의 요구를 일축한 터였다. 이 방문은 보렐 개인은 물론 EU의 굴욕으로 평가됐다.

반면 핀란드 외무장관의 러시아 방문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노회한 외교관 라브로프는 EU와 개별 회원국에 대한 분리 외교 전략을 구사하며, 핀란드와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강조했다. 핀란드의 하비스또 장관 역시 실력과 준비된 외교 역량을 드러냈다. 라브로프가 나발니 석방 요구 시위는 불법적이고 EU-러시아 관계의 악화 책임은 EU에 있다고 말하자, 하비스또는 “크림반도 병합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제재를 불렀고, 나발니에 대한 독극물 암살 기도도 마찬가지다”라고 응수했다. 그는 또한 EU는 27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공동체이며 자신의 여행 전에 EU는 물론 독일·프랑스·스웨덴 외무장관과 협의했고 돌아간 뒤 결과를 공유할 것이라고 밝혔다.

회담 후 니니스뙤 대통령은 하비스또가 러시아에서 EU를 제대로 대표했다며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어려운 시기의 외교 회담을 우려하던 언론들도 하비스또의 외교적 성취를 높이 평가했다.

‘핀란드화’ 개념 넘어 변화하는 현실 봐야

소수당 출신이지만 하비스또는 이미 1990년대부터 유럽 최초의 녹색당 출신 환경장관, 유럽의회에서 녹색당 계열 정당들의 대표를 역임했다. 다양한 국제분쟁 위기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아 활동한 실력 있는 외교가다. 동성애자이면서 환경운동가로 살아온 그는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현 니니스뙤 대통령과 경쟁해 연거푸 2위를 기록했다. 2024년 차기 대선의 유력 후보이기도 하다. 대러시아 관계와 외교정책에서 성공적인 추진 역량은 핀란드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핵심 기준이라는 점에서 하비스또가 어려운 첫 관문을 통과했다고 볼 수도 있다.

변화된 국제 정세와 헌법적 틀 속에 대통령, 총리, 외교장관이 역할을 나눠(경쟁과 협력) 이웃한 초강대국을 상대로 때로는 신중하게, 때로는 직선적으로 할 말을 하면서 EU 차원의 공동 외교안보 노선과 핀란드의 실용적 국가이익을 접합해가는 핀란드. 그 모습은 아직도 1960~70년대의 ‘핀란드화’(Finlandization) 개념을 중심으로 핀란드 외교정책을 재단하는 국내 학계의 관습적 접근을 성찰하게 한다.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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