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이 법은 출발점을 맞추는 것”

독일 대학에서 ‘EU 차별금지법’ 강의하는 이현정 변호사 인터뷰
등록 2020-09-26 20:43 수정 2020-10-05 11:19
이현정 제공

이현정 제공

유럽연합(EU)에서 2000년 평등 지침을 도입한 뒤 오스트리아(2004), 독일(2006), 영국(2010) 등 유럽 각국에선 차별금지법을 시행했다. 시행 20년이 된 유럽 차별금지법의 현황에 대해 독일 뉘른베르크 에를랑겐대학교 법대에서 ‘유럽 인권재판소 판례 분석’과 ‘EU 차별금지법’을 강의하는 이현정 변호사(사진)를 전화와 전자우편으로 인터뷰했다. 이 변호사는 한국에서 난민 소송, 소송 구조를 진행하다가 2015년부터 이 대학에서 차별금지법을 공부하고 강사로 일하고 있다.

2020년 7월 베를린에선 지방정부 처음으로 자체적인 차별금지법을 도입했다. 독일엔 이미 일반평등대우법(이하 평등법)이 있지만 베를린 차별금지법은 차별의 사유를 좀더 세밀하게 정하고 법을 준수해야 하는 기관 또한 경찰, 검찰, 학교, 관공서, 베를린 당국 소유 주택회사나 기업 등으로 구체적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독일연방 차별금지법보다 한층 강화됐다. 차별금지법에서 차별 사유를 폭넓게 정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베를린 차별금지법에는 독일어 구사 능력, 만성 질병, 교육 수준, 직업, 세계관 같은 새로운 차별 사유가 규정됐다는 점에서 법의 사각지대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입증 책임을 피고발인에게 두는 이유

차별금지법 도입 당시 독일은 단체소송이 줄을 잇거나 기업 경제활동을 방해할 것이란 우려가 컸다. 도입 경험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독일도 재계와 기독교민주연합의 반대로 평등법이라고 이름을 바꿔 간신히 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4년이 지난 지금, 과다 소송 우려는 기우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오히려 이제 유럽연합은 어떻게 하면 집단소송을 활성화할지 방법을 찾고 있다. 집단소송이 활성화하지 않아 보이지 않는 피해자가 다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종과 성별을 근거로 임금을 적게 주거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표현이나 차별 행위를 저지르는 일이 있다면 공익 목적으로 집단소송을 진행해야 한다. 그런데 집단소송은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보상이 적고, 한 번에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만 소송을 제기하도록 해서 활성화하지 못했다. 구조적인 차별을 개선하려면 집단 구제가 필요하다.

차별금지법의 법리적 특징 중 하나는 피해자가 소송을 제기하면 피고발인이 차별하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억울한 피해자가 나온다는 반대가 있었다.

‘체코 판례’라는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을 소개하고 싶다.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사는 소민족을 로마(집시)라고 부른다. 특히 체코에선 로마 학생들이 질이 낮은 특수학교로 진학하는 비율이 일반 학생보다 27배나 높아, 체코 정부의 책임을 묻는 집단소송이 있었다. 체코 정부는 차별이 아니라 로마 아이들의 문제로 돌렸지만 결국 차별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해 유럽인권 조약 제14조 위반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체코 정부가 18명의 소송 원고에게 각각 4천유로와 소송비용 1만유로를 지급하도록 했다. 유럽 최약자인 로마 아이들에 대한 차별을 인정한데다 간접 차별을 일깨운 의미 있는 판결이다.

이런 판례들을 거치면서 입증 책임이 피고에게 있어야 할 이유가 드러났다. 우선 개인 대 공공의 소송에서 개인이 차별받았다는 것을 입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자료와 권한이 막강한 국가에 맞서 개인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있도록 보호하겠다는 취지다. 입증 책임은 소송 결과를 좌우하기도 하지만 차별을 예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부나 공공기관은 해당 행위가 차별이 아님은 물론, 사전에 차별을 막기 위해 입법이나 행정제도를 포함해 공공 의무를 다했다고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애 학생에게 시간을 더 주는 게 역차별일까

독일연방 차별금지청 조사를 보면 차별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은 높아졌지만 은밀한 차별, 복합적인 여러 차별은 도처에 있다.

2017년 포르투갈에서 의료 과실로 인해 성기능을 상실하고, 앉고 걷는 데도 어려움을 겪게 된 여성이 유럽인권재판소를 찾았다. 포르투갈 최고행정법원에서 배상금을 5만유로로 정하면서 “50살 여성에게 성기능은 중요하지 않으며, 돌봐야 할 아이들이 다 자랐으므로 굳이 가사도우미를 둘 이유가 없으니 배상금을 낮춰야 한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를 들면 55살, 59살 남자가 각각 의료사고로 성기능을 상실했던 사고에 대해선 포르투갈 최고법원은 “엄청난 타격” 혹은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근거로 각각 22만5천유로와 10만유로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들 판결을 비교해 포르투갈 법원의 행위는 차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이는 성별과 나이에 대한 차별이 복합된 사례다.

지금 유럽연합에선 여러 차별 사유를 가진 피해자가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겪는 차별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만들어야 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개별적인 차별금지법으로는 복합적인 차별 사유로 고통받는 피해자를 보호하기 어렵다. 노르웨이에서 아시아 여성 두 명이 오슬로시 호텔에 투숙하려고 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오슬로 법원에선 성별과 출신에 대한 복합차별이라고 인정했다. 차별을 인정하는 것이 첫 단계가 될 것이고, 복합적인 차별 사유로 고통받는 취약계층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의무도 강조돼야 한다.

한국에선 차별금지법이 과잉 입법이라거나 역차별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미국 대법관 루스 긴즈버그는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목을 밟고 있는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이다”라고 했다. 다른 소수 집단도 마찬가지다. 차별을 금지한다는 건 소수에게 특혜를 주는 게 아니라 출발점을 맞춰주자는 것이다. 독일 법대에서 일하다보면 한국에선 보기 어려운 일을 겪는다. 시력 문제나 난독증이 있는 학생이 의사 진단서와 학장의 승인을 받으면 다른 학생보다 더 오랜 시간 시험을 볼 수 있다. 장애 학생에게 시험 시간을 20% 더 주는 것이 비장애인 학생을 역차별하는 일일까? 장애가 있는 학생들도 비슷한 출발선에 서게 해주자는 것이 차별금지법의 취지다.

베를린(독일)=남은주 <한겨레> 통신원 nameunjoo1@gmail.com

*제1332호 표지 이야기 차별금지법을 이땅에
http://h21.hani.co.kr/arti/SERIES/2439/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