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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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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향한 개헌

핀란드의 단계적이고 지속적인 헌법 개혁 경험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등록 2021-06-19 09:20 수정 2021-06-21 01:53
2018년 7월16일 핀란드 헬싱키 국회의사당 앞으로 한 여성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다. REUTERS

2018년 7월16일 핀란드 헬싱키 국회의사당 앞으로 한 여성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다. REUTERS

10년 전 필자가 북유럽 유학을 결행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 책이 두 권 있다. 하나는 덴마크의 저명한 정치학자 요스타 에스핑앤더슨이 쓴 <복지 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 출신의 정치학자 아렌트 레이파트가 쓴 <민주주의의 유형>이다.

정치적 동력 제공한 계급초월적 연합정치

앞의 책에서 에스핑앤더슨은 유럽과 북미의 발달한 복지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한 체계적 비교연구를 통해 현대 복지국가 체제가 ‘탈상품화’와 ‘계층화 효과’의 수준과 양상에 따라 영미권의 자유주의(선별주의) 복지국가, 독일·오스트리아 등 중부 유럽의 보수주의(조합주의) 복지국가, 그리고 북유럽의 사민주의(보편주의) 복지국가로 유형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07년 한국어로 뒤늦게 번역된 책(원저는 1990년 출판)을 구해 읽으며 현대 복지국가 이론과 특히 북유럽 복지국가의 제도적 특징과 성취에 눈이 뜨였던 경험을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 무엇보다 북유럽 복지국가들이 모두 비례대표 선거제도와 다당제 정당체계에 기반한 계급초월적 연합정치를 발전시켰으며, 그것이 보편적 복지국가를 위한 정치적 동력을 제공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통찰은 레이파트의 저작들을 통해 심화, 변주됐다. 레이파트는 발달한 산업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한 비교정치학적 연구를 통해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이 정치-사회 제도의 조합에 따라 ‘승자독식’의 다수적 민주주의와 ‘권력 공유’의 합의적 민주주의로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전자는 단일정당 내각, 행정부 우위의 의회-행정부 관계, 양당제, 다수제(소선거구) 선거제도, 다원주의 이익대표체계 등이 특징이고 영미권 국가에서 주로 나타난다. 후자는 연립정부, 수평적 의회-행정부 관계, 다당제, 비례대표 선거제도, 조합주의 이익대표체계 등이 특징이고 독일, 스웨덴 등 중북부 유럽 국가에서 주로 나타난다.

현대 복지국가 연구와 비교정치학의 고전이 된 책들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제도와 복지국가 사이에 긴밀한 내적, 구조적 연관이 존재한다는 통찰을 얻었다. 실제로 북유럽 국가에서 비례대표 원리는 단순히 하나의 선거제도가 아니라 일반적 사회운영 원리로 작동하며, 이는 정치제도를 넘어 노동시장을 비롯한 주요 사회정책 전반을 관통하면서 보편적 복지국가의 제도적 기초를 제공한다.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내적 연관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을 넘어 모든 정치세력이 공통되게 표방하는 가치이자 목표이기도 하다.

지속적, 단계적 개헌 거쳐 전면 헌법 개혁으로

오랫동안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은 핀란드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의 여파 속에 1917년 독립을 쟁취했지만, 이듬해인 1918년 좌우 내전을 겪었다. 우파 승리로 내전이 끝난 뒤 1919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는데, 비극적으로 분열된 사회를 통합할 정치적 리더십의 요청을 고려해 준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 기반 민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게 된다. 준대통령제 아래 핀란드 대통령은 의회해산권을 갖는 것은 물론 공식, 비공식 채널로 내각 구성과 해산에도 자주 관여하는 등 큰 권한을 누렸다.

핀란드 대통령의 권력은 20세기 정치사의 전개 과정에서 더욱 증대됐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두 차례 전쟁을 겪은 핀란드로서는 냉전 시기 까다로운 대소 외교정책을 관리하고 분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다. 1956년부터 장기집권하며 국제관계 안정과 사회통합을 실현한 께꼬넨 시기(1956~1981년 재임, 중앙당)에 대통령 권력은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뛰어난 업적에도 께꼬넨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엘리트 사이에 퍼졌고, 후임 꼬이비스또 대통령(1982~1994년 재임, 사회민주당)은 본격적인 헌법 개혁에 착수한다. 핀란드는 1988년과 1991년 헌법 개정을 단행해 대통령 간선제를 폐지하고 직접선거를 도입하는 한편 임기도 6년 2회로 제한했다.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 줄이는 제도 개혁을 이룬 것이다. 1995년에는 ‘유럽인권협약’에 부합하게 헌법의 기본권 장을 전면 개정했다.

2000년 핀란드는 누적된 개헌 사항을 집대성하면서 전면 헌법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대통령 권력을 더욱 줄이고 의회와 총리 권한을 확대함으로써 사실상 의회주의(의원내각제) 체제로 전환했다. 총리는 의회에서 선출되고, 의회에 책임지는 의회주의 원칙이 명확히 정립됐고, 대통령의 의회해산권과 입법거부권이 유명무실해졌다. 외교정책에서도 유럽연합(EU) 관련 문제는 총리가, 비EU 문제는 대통령이 대표하도록 권한이 조정됐다. 2012년에는 헌법을 추가로 개정해 대통령과 총리의 외교정책 권한을 명확히 배분했고, 나아가 유권자 5만 명이 서명하면 의회가 심의하는 의제형 시민발의제를 도입했다. 탈권위주의 요구와 아울러 탈냉전, EU 통합, 보편적 인권 증진, 시민참여 확대 요구 등 후기 근대사회로의 전환적 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혁신적 체제 정비 성격이 두루 나타난다.

시대 변화 선도한 핀란드, 다시 주목받는 까닭

최근 한국에서도 대선이 다가오면서 여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다시 개헌 논의의 불씨가 지펴지는 형국이다. 대선 주자들의 정치적 도구화 측면이 있지만, 민주화 이후 35년 경험에 기반한 절실한 정치개혁 요구이기도 하다. 내전, 전쟁, 냉전의 제약, 대립적 진영정치 등의 난관을 뚫고 20세기 후반 보편적 복지국가와 합의 민주주의를 이룬 핀란드가 1980년대 이후 단계적, 지속적 헌법 개혁으로 전환적 시대 변화를 선도해온 사례가 다시 주목받는 까닭이다. 개헌의 핵심 주제인 권력구조 개편 방향에서도 핀란드가 오랫동안 운영해온 준대통령제의 경험이나 최근 표준적 의회주의로의 전환 개혁을 모두 면밀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 직접민주주의 제도 도입, 보편적 인권 기반 입헌주의 패러다임 구현 등 내용적 측면은 물론 헌법 개혁의 효과적 추진 경로와 방법에서도 핀란드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번 칼럼으로 2020년 4월부터 연재해온 ‘서현수의 북유럽 정치학’을 맺고자 한다. 핀란드를 중심으로 북유럽의 민주주의, 복지국가, 교육·사회정책 등 여러 주제를 넘나들며 독자와 소통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지면을 허락해준 <한겨레21>과 애독자에게 감사드린다.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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