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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소설가가 들은 환대의 말

등록 2020-10-02 10:28 수정 2020-10-03 23:36
일러스트레이션 박조건형

일러스트레이션 박조건형

갖고 있던 책들을 좀 버렸다. 집에 책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마찬가지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짐덩이가 되는 책들이 보인다. 짐인가 힘인가 고민되는 책도 있지만, 깊은 생각이나 고민이 아니라 결국 시간에 떠밀려 버린다.

신랑을 불러, 버리려고 내놓은 책 중에 필요한 게 있는지 묻는다. 쌓인 책더미 속에 몇 권의 책을 꺼내고는, 나머지는 버리라고 손짓만 팔랑팔랑. “박스 테이프 좀 갖다주세요” 말했더니, 그는 테이프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상자에 담아 통째로 내다버리면 되는 일을, 굳이 테이프로 감고 할 일이 아니지 않으냐고.

생각처럼 쌓여버린 책더미 탓인지, 책먼지에 정신이 흐려졌는지, 정말 굳이 할 일은 아니었다. 나와 다른 누군가와 같이 살다보면, 좀더 고민하고 그만큼 현명해진다. 내 방식의 고민과 다른 관점 앞에서, 조금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건 둘의 문제가 아니라 공존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만큼 궁지에 몰린 개인의 문제. 다행히 나는 내 삶을 쪼개어 그와 나눈 대가로 꽤 많은 것을 얻는다.

불안

‘트랜스젠더’라는 이름을 가지고 결혼이란 걸 하고 살지만, 솔직히 말하면 결혼에 그리 큰 기대는 없었다. 기적처럼 좋은 사람을 만났고 그와 충만한 사랑을 했지만, 결혼은 다른 문제였다. 스물이나 서른이었다면 달랐을까? 하지만 성소수자라는 이름을 가진 나에게, 그때 역시 크게 다르진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나와는 다르게 날 때부터 여성으로 인정받은 사람이라도 집, 돈, 새로 만나는 가족과의 관계, 육아까지 그 모든 고민에 짓눌려 결혼을 결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결혼을 위해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이 있으니, 그건 바로 불안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감당해야 할 불안은 물론이고, 혼란을 끌어안고 태어난 존재이니 피할 수 없는 개인적 불안이 있다.

몸은 불안인가? 왜 어떤 몸은 불안일 필요가 없고, 어떤 몸은 불안이 되고 마는가? 그런 질문조차 떠올릴 필요 없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주류로 사는 사회이니, 매 순간 질문이 몸에 새겨진 채 살아야 하는 나 같은 이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불안이다. 또한 결혼 앞에서, ‘누군가와 함께 삶을 나눌 수 있겠는가’라는 사회적 추궁 앞에 나는 다시 또 불안한 나를 염려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 모든 총체적인 불안을 끌어안고 살아남을 수 있는가?

차별은 불안의 문제다. 여러 사람이 다양한 층위의 사회·제도적 의미로서 차별을 논하지만, 나는 차별의 가장 깊은 근원에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불안이 있다고 믿는다. 얼마나 많은 불안을 끌어안고 사는 삶인지에 따라, 얼마나 차별받고 사는 삶인지 알게 된다. 당신에게만 불안이 있지 않고 우리에게도 역시 불안은 있다고 강 건너 ‘구경하는’ 사람들은 말하겠지만, 어떤 이에게 불안은 고작 불편함에 불과하고, 또 다른 이에게 불안은 생존의 문제가 된다.

당신과 나의 불안이 뭐가 그리 다르냐고 발화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권력의 한가운데 있는 셈이다. 그는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평생 차별의 의미를 제대로 깨치지 못한 채 살게 되고, 도대체 그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순진한 두 눈을 크게 뜨고는 그만일 것이다. 편협하고 폭력적인 사유 속에 제가 죽인 존재들로 피칠갑을 한 채이면서도, 너무도 평화를 사랑하는 비폭력주의자인 자신을 아주 예쁘게, 사진 속에, SNS 속에 전시하게 될 것이다.

깨끗이 낫는 긁힌 자국 같은 것이라면 좋으련만, 불안은 반드시 흉터를 남긴다. 반복될수록 깊어진다. 아마도 신랑과 혼인신고를 할 즈음, 그러니까 마흔을 목전에 둔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불안의 흉터가 쌓이고 쌓였을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박조건형

일러스트레이션 박조건형


불편

호적 정정이 그랬다. 생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마침내 구체적으로 손안에 쥐게 되었던 인내의 열매가 분명했음에도, 나는 호적정정허가 서류를 받아들던 그 순간을 참으로 씁쓸하고 우울한 순간으로 기억한다. 성전환수술을 끝내고 그 어느 때보다 온전한 나로 사는 삶을 누리는 시기였는데도, 나는 호적 정정을 거부했다. 여성으로 사는 내가 비로소 최대치의 온전함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날마다 깨치고 있음에도, 그런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성별이란 본디 고정된 것일 수 없는, 8주 이전의 모든 태내에 혼재된, 유동적인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 당연한데, 사회적으로 규정된 두 가지 성별에 모든 인간을 욱여넣고야 마는, 그래놓고 고칠 수 있는 제도적 유연성조차 마련하지 않은 이 사회의 불합리함이 나는 너무도 답답하고 화가 났다. 한 개인이 서류상의 숫자 하나를 바꾸기 위해 치러야 하는 시간적·사회적 비용이 과중하고 과도하다. 그래서 나는 법적 특별법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호적 정정을 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남자 주민등록증을 가진 나로 인해 내가 더 불편한지 여기 이 사회가 더 불편한지 어디 겨뤄보자고 혼자만의 유치한 힘겨루기도 했다.

그러나 10여 년 동안 ‘언제부터 여자가 되고 싶었느냐’는 똑같은 질문 앞에 설 때마다, ‘아무리 그래 봐야 당신 핏속에 남자 염색체가 흐른다’는 폭력적인 글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내 안에 불안과 분노는 겹겹이 쌓여갔다. 쌓이고 쌓인 불안을 견디지 못해 호적 정정을 신청하고 수술확인서를 보완하라는 법원의 명령서를 받아 읽었을 때, 성전환수술을 한 것이 아니라 ‘남성의 성기를 제거한 중성의 상태’라고 적시하라는 법적 명령 앞에 섰을 때, 어쩌면 그때 나는 불안의 맨 밑바닥에 깔린 희망 한 장까지 모두 다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삶의 근원까지 부정당한 경험은, 당사자가 아니면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한 성인이 자기 삶의 방식을 자신의 손으로 선택하는 일로, 내가 바꿀 수 없는 근원으로 인해 조롱당하거나 비난받아본 적 없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알약 몇 개를 먹으라 하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없는 존재’로 살라고 강요한다. 차별? 불안? 내가 언제? 나는 아닌데? 이 사회가 우린 그런 적 없다고 잡아뗄수록 어딘가에서 당사자들은 날마다 불안과 분노를 씹어 삼키며 산다, 살아남는다.

초대

하진이네서 전화가 왔다. 둘째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백일이란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조촐하게 집에서 백일상을 차리려고 하니 밥이나 같이 먹자는 연락. 약속이 있었지만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부대끼게 하는 나 같은 사람이 어디가 반가운지, 매번 전화하고 귀한 자리에 초대하는 마음이 왜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후 아이에게 혹시 어떤 영향을 주지나 않을까 쓸덴없는 노파심은 나조차 흔들 때가 많은데, 번번이 그 모든 걱정을 무릅쓰고 타인인 누군가를 환대해야겠다고 결정지은 그 마음이 무언지 모르지만, 덕분에 숨통이 트인다.

돌아보면 나 역시 환대의 순간을 마주한 때가 적지 않았다. 20여 년 전, 방송에 나온 나를 알아보고 한 남자분이 횡단보도에 있던 나를 돌려세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파이팅!’ 하고 지나갔던 일, 한 여자분이 책도 없이 냅킨 한 장에 사인해달라며 사진 한 장을 찍고 갔던 일. 다행스럽게도, 환대의 말은 잘 들리고 선명하며 또렷하다. 혐오나 폭력의 말처럼, 환대와 응원의 말도 마음 깊숙이 새겨진다.

내가 사는 이 사회의 저 밑바닥에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의 역사가 촘촘히 뻗어 있다고 하더라도, 눈앞에서 나를 반기는 그 한 번의 미소에, 환대의 말에, 거짓말처럼 눈앞이 말개진다. 네잎클로버를 찾은 사람처럼 속절없이 행복해지고 만다. 그 마음의 이전과 이후를 물을 필요 없이, 우리는 행복한 둘이 된다.

마스크를 쓴 채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느새 네 살이 된 하진이가 폴짝폴짝 뛰며 우릴 반겼다. 일단 욕실에서 손을 먼저 씻고, 아이의 작은 등을 어루만진다. 백일이 되어 또랑또랑해진 눈망울의 하민이를 안아본다. 아직 목을 가누지 못해 목덜미에 힘을 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나와 눈을 맞추려는 눈동자.

온통 ‘첫 만남’투성이인 그 눈빛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나는 제일 크고 환한 웃음을 준비한다. 내가 무엇이든 일단 반가운 존재가 되어야 하니, 너의 안녕을 빌고 축복 가득한 미래를 간절히 바라는 ‘먼저 태어난 자’였으니, 나는 투명한 아이의 눈동자 앞에 제일 근사하고 멋진 미래를 떠올린다.

가만히 아이의 작은 심장 위에 손을 올리고서, 모든 신의 이름을 뛰어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고통받지 않을 수 없겠지만, 너를 성장시키는 고통이기를. 절망이 없진 않겠지만, 더 힘차게 일어서게 하는 절망이기를.

코로나19 때문에 친척분도 참여하지 못한 아주 소박한 백일상 앞에, 우리 부부도 같이 앉는다. 제일 행복하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아이들과 같이 사진 찍는다. 모호하고 흐릿해 아무리 형편없는 인간이라도, 행복해지고 마는 그런 순간이다.

일러스트레이션 박조건형

일러스트레이션 박조건형


정리할 수 없는 것

무엇을 버리든, 당신들의 책장은 나의 책장과 다를 것이다. 주어진 책장의 크기가 달랐을 것이고, 태어나보니 이 사회와 부모가 꽂아준 책의 종류도 달랐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히 문 밖으로 나가면 삶이 있다고 말하지만, 성소수자들에게는 오히려 그 반대다. 혼자 남겨졌을 때, 홀로 잠들 때, 구경하는 시선이 없을 때, 마구 질문해대는 입이 없을 때, 누군가는 오히려 더 평화롭다. 어떤 생물도 고독을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나진 않는다. 태어나보니 밤이었고, 혼자였고, 떠밀려서 차라리 고독을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다.

힘없고 가난한 예술가로 살지만, 나는 이 사회에 꼭 한 번 묻고 싶다. 도대체 언제까지 누군가를 지우는 역사를 쌓아갈 셈인가? 노동자를 지워 역사를 쌓고, 여성을 지워 역사를 쌓고, 사회적 약자들의 존재를 지워 역사를 쌓아왔으면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부끄러움을 쌓아 후세에 겉만 번쩍거리는 텅 빈 상자를 건네줄 셈인가? 우리는 당신들의 정리 대상이 아니다. 부끄러움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서 혐오할 권리, 정상과 비정상을 엉뚱한 기준으로 나누며 해괴한 논리를 설파하는 당신들이고 이 사회이지, 우리는 당신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정리할 수 없고, 그럴 자격도 없다는 걸 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딱 하나, 서로 다른 모양과 크기의 책장에, 당신들처럼 우리의 책을 꽂아 쌓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방해받지 않고, 최소한 똑같은 권리는 누리면서, 폭력에 노출되지 않으면서, 이 사회가 그동안 막아왔던 우리의 책을 쌓아가는 일을 지금, 바로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김비 소설가

*제1332호 표지 이야기 차별금지법을 이땅에
http://h21.hani.co.kr/arti/SERIES/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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