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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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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 있으면 병으로 해고된 동료와 함께 싸워요”

암 경험자 이정훈씨와 동료들이 기댈 수 있는 차별금지법 제41조 1항
등록 2020-09-26 11:18 수정 2020-10-01 01:20
암 경험자 이승훈씨가 암을 치료한 뒤에도 사회 복귀에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한국청년암협회 또봄’을 운영한다. 박승화 기자

암 경험자 이승훈씨가 암을 치료한 뒤에도 사회 복귀에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한국청년암협회 또봄’을 운영한다. 박승화 기자

제1조부터 제57조까지. 법안의 문장은 건조하다. 성숙한, 어떤 사람들은 건조한 문장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긴다. 서로의 존재를 느슨하게 감각한다. 때로 염려한다.
성소수자 부모 위니는 제3조 1항 1호를 두고 생각한다. 23개 차별 금지 사유(정체성)가 빼곡하다. 마침내 법이 내 아이의 존재를 불러줄지 몰라. 그런데 우리가 몰라서 놓친 또 다른 ‘복잡한 정체성’이 있다면?
농인의 비장애인 자녀이자 여성인, ‘복잡한 정체성’을 지닌 이길보라는 제3조 1항 6호(복합차별 조항) 앞에서 생각한다. ‘이유’ 없이 당연했던 차별 앞에 이유를 물을 수 있는 힘이 될지 몰라. 암 경험자 이정훈은 제41조 1항(제3자 진정권)을 보고 생각한다. ‘이유’를 짐작하고도 침묵했던 내 친구들한테 싸울 힘이 될지도 몰라. 그 싸움이 ‘인식’을 바꿀 수 있을지도. 이란 난민 친구를 위해 목소리 냈던 열입곱 살 지민은 제35조(교육 책임자 등의 의무) 덕에 한층 더 예민하게 차별을 ‘인식’하는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
모른다, 아직은. 차별금지법안이 9월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됐다. 법안의 문장을 고민하는 일은 드물었다. 익숙하고 막연한 혐오가 있었고, 그것과 싸워야 했다. 생뚱맞은 데 그어진 전선에서 갈등하다가 정작 법안은 잊히는 일을 13년 동안 일곱 번 겪었다. 같은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모른다, 아직은. 이번만은 다를 이유를 생각한다. 그럼에도 “인류는 그렇게 절망적인 존재가 아니”니까.(류승연 작가) 내 자녀, 내 부모, 내 친구, 그래서 나의 일인 차별은, 당신과 당신 사람의 일이기도 할 것이니까. 그리하여 건조한 법안의 문장 앞에서 나와 다르지만 사랑하고 싶은 타인을 떠올릴 테니까. 그러다 이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 “어떤 생물도 고독을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나진 않는다. 태어나보니 밤이었고, 혼자였고, 떠밀려서 차라리 고독을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다.”(김비 소설가)_편집자주

*기사는 2020년 6월29일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정의당 장혜영 의원 대표 발의)을 바탕으로 썼다.

차별금지법안 제41조 1항

금지된 차별 행위에 해당하는 경우에 차별 행위의 피해자 또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나 단체는 국가인권위원회에 그 내용을 진정할 수 있다.

이정훈(40)은 16년차 직장인이다. 입사가 또래보다 빨랐다. 회사에서 마케팅이나 스타트업 관련 업무를 주로 맡는다. 대기업에 다닌다. 정규직이다. 여행을 좋아하고 활동적이다. 5년 전 배가 아파 병원에 갔다. 과음 탓이라고 생각했다.

2015년 이정훈은 혈액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짧고 굵게” 5개월 만에 항암치료를 마쳤다. 1년여 요양했다. ‘한국청년암협회 또봄’을 만들었다. 젊은 암환자의 투병을 돕거나 암 경험자가 모여 여행하고 소통한다. “방학 때 개학을 기다리는 것처럼” 다시 사회로 돌아가는 일을 이정훈도, 암 동료들도 함께 꿈꿨다. 그는 회사로 돌아왔다. 본래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친구가 많다. “사실 대부분 그래요.”

많은 암 동료가 못 이룬 꿈

9월17일 이정훈은 재택근무를 마치고 집 앞 카페에 나왔다. 또봄 활동과 회사 일로 정신이 없다는데, 지친 기색은 없다. 마주 앉아 떠올리는 건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친구들이다. “자기 일로 돌아갔는데 퇴사하라는 분위기를 조장해서 자연스럽게 회사를 그만둔 경우도 있고요. 유방암을 겪은 한 친구는 무거운 것을 들면 부종이 생기는데 재취업한 일자리에서 짐을 날라야 하는 상황이 생겨서 그냥 그만두기도 했어요.”

서로를 위로하려 꾸렸던 또봄의 일이 더해진다. “암 경험자가 내 옆에 있고 같이 일해야 한다는 인식조차 거의 없는 상태잖아요. 바꾸려면 알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요.” 자신을 드러내고 차별과 맞서야 하지만, 쉽지 않다. 많은 암 경험자 친구가 숨기거나 견뎠다. “재입사할 때는 아예 암 경험을 숨기는 일도 많고, 일터에서 부당한 차별이다 싶어도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왜 그럴까? 순진하게 묻는다. 이미 근로기준법(제6조)은 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금한다. ‘질병’이 해고 사유가 될 수 있다고 해도, 노동계약을 이행하기에 현저한 문제가 있는지 엄격히 따져봐야 한다. 하물며 이미 치료한 병이라면 ‘부당해고’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왜? “치료는 됐어도 몸 관리를 계속해야 하는데 혼자서 싸운다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스트레스거든요. 그럴수록 몸은 더 힘들어져요. 그렇게 이겨봤자 회사 사람들 눈치도 보일 거고, 그건 다시 스트레스가 되고요.”

차별금지법안(장혜영 의원 안) 제41조 1항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차별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나 단체가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진정할 수 있다고 적는다.(제3자 진정) 누군가 대신, 혹은 같이 차별과 싸울 수 있도록 했다. 그동안 ‘시정 권고’만 했던 인권위에 ‘시정 명령’ 권한을 줬다.(제42조 인권위 시정명령권) 권고를 이행하지 않으면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인권위는 차별 피해자를 위해 소송을 지원할 수도 있다.(제48·49조) 차별을 겪고도 숨거나 감내했던 이들이 두려움을 딛고 ‘이것은 부당한 차별’이라고, 같이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금 있는 분야별 차별금지법에도 제3자 진정이나 시정명령 제도 등은 담겨 있다. 다만 들쑥날쑥하다. 예를 들어 남녀고용평등법은 제3자 진정은 가능하지만 시정명령 제도는 없다. 비정규직보호법은 노동위원회를 통한 시정명령은 가능한데, 제3자 진정은 불가능하다. 차별 사유에 따라, 부당한 차별을 호소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기댈 도구는 달라진다. 그마저 온전하지 않다.

정당한 차별인지 함께 따져 물을 시작점

차별금지법이 차별을 주장할 수 있게 돕는다고 해도 “여전히 싸우는 건 쉽지 않다”고 이정훈도 생각한다. “저도 그랬지만 암에 걸리면 자기 부정 과정을 거쳐요. 자존감이 낮아져요. 차별 앞에서 내가 정말 이전보다 업무능력이 부족해서인지 모른다고 자책부터 하기도 하고요.” 이것은 부당한 차별인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가르기는 쉽지 않다.

차별금지법은 특히 고용에서 차별 예외 사유로 ‘진정직업자격’을 두고 있다. 사업의 본질적인 기능이 위태로울 정도라면, 차별을 어느 정도 용인한다는 의미다. 모호하다. 차별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기에 하나의 법안에 모든 상황을 담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다만 ‘정당한 차별인지’ 따져 물을 시작점을 만드는 건 여전히 중요하다. “차별의 성격은 성희롱 같은 다른 개념이 그러했듯, 인권위 결정례와 판결이 쌓이면서 차츰 구체화할 수 있다. 더 많이 이야기하면서 차별에 대한 합의의 수준을 높여가는 것이 이 법의 역할이다.”(홍성수 숙명여대 교수) 차별을 규정하는 데 국회의 역할(법안), 인권위의 역할(결정), 법원의 역할(판결)을 각각 어떤 비율로 배합할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법안은 일단 차별을 이야기할 공간을 만드는 데 집중한다. 각 사안이 정당한 차별에 해당하는지 세세하게 판단하는 건 인권위와 법원의 몫으로 상당 부분 남겨뒀다.

이정훈은 차별을 말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사회 전반을 바꿀 수도 있다고 흐릿하게나마 생각한다. “요즘 주변에 육아휴직 하는 동료가 많아요. 몇 년 전만 해도 내 일을 누군가 떠안아야 한다는 생각에 눈치 보이는 일이었는데 지금은 덜하잖아요. 나름대로 대체 인력 시스템을 회사들이 정비했으니까요. 질병이나 치료 이후의 복귀 과정도 더 많이 이야기된다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그의 말마따나 “전 국민의 3분의 1이 일생에 한 번은 암에 걸리는 나라, 그 밖에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일하는 사람이 도처에 있는 나라”다. 단 한 번도 아프지 않은, 건강한 사람을 전제로 짜인 일터는 모두에게 어느 순간 벽이 될 수 있다. 차별을 말하는 건 단지 ‘그들’만의 일은 아니다.

당신도 암에 걸릴 확률은 3분의 1인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것 같네요. 인식을 바꾸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차별은 엄연하다. 차별이 두려워 자기 고통을 주장하기 힘들다. 주장하지 않으니 알려지지 않는다. 닭과 달걀이 돌고 도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이정훈은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짐한다. “젊은 암 경험자가 나오는 유튜브 방송을 10월 시작하려고 해요. 암 경험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시작해보려고요.” 미리 만들어둔 유튜브(또또봄TV) 채널 이름을 내보이는 그의 눈이 반짝 빛난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제1332호 표지 이야기 차별금지법을 이땅에
http://h21.hani.co.kr/arti/SERIES/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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