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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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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국회’와 ‘논쟁하는 국회’

한 해 최대 1만 건 넘는 입법 협의로 소통하는 핀란드 의회
등록 2020-06-23 11:26 수정 2020-06-24 01:37
2018년 2월1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핀란드 의회 전체회의 풍경. 로이터

2018년 2월1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핀란드 의회 전체회의 풍경. 로이터

핀란드에서 유학하며 ‘의회와 시민’이라는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2014년, 헬싱키에 있는 핀란드 의회(Eduskunta) 의사당은 나의 연구현장이었다. 국회의원을 비롯해 주요 상임위원회 비서와 사무처 직원을 인터뷰하기 위해 자주 그곳을 방문했다. 본회의장과 상임위원회실, 의회 정당 그룹의 회의실, 미디어 취재 공간, 그리고 의회 도서관과 시민정보센터 등 다양한 장소를 드나들며 핀란드 의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찰하는 귀한 기회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잠시 들른 의회 카페테리아에서 의회 부의장이나 외무장관 등을 소개받아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멀리 동아시아에서 온 신진 연구자에게 그들은 스스럼없이 시간과 공간을 내주고, 대의민주주의의 중심 기구이자 입법기관으로서 자신들의 임무를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 사람들의 호의가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뜨거운 영국 의회, 차분한 북유럽 의회

그중에서도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장소는 핀란드 의회 상임위원회 회의실이다. 고풍스러운 회의 탁자와 의자가 도열한 가운데, 법전과 수십㎝ 두께의 법안 검토 서류가 의원들 자리마다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회의 일정이 빈 시간대를 골라 고요한 침묵이 흐르는 회의실에서 해당 위원회 소속 의원이나 비서와 인터뷰를 했다. 의회 위원회가 법안을 어떻게 심의하고 그 과정에서 외부 정책 이해관계자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최근 도입한 시민발의제(2012년 핀란드에서 도입된 직접민주주의 기제로 유권자 5만 명이 서명한 법안을 의회가 심의하도록 한 제도)가 어떤 다이내믹(역동적 현상)을 불러오는지 등을 자세히 묻고 기록했다.

‘논쟁하는 의회’(Debating Parliaments)로 불리는 앵글로색슨 국가들의 웨스트민스터형 의회와 달리, 독일과 북부 유럽의 의회는 흔히 ‘일하는 의회’(Working Parliaments)라고 한다. 영국 의회의 ‘총리에 대한 질문’ 시간에 총리와 야당 대표가 벌이는 일대일 토론 장면은 논쟁하는 의회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예컨대 브렉시트 협상을 둘러싸고 보수당 총리와 노동당 대표 사이에 벌어지던 글래디에이터(검투사) 스타일의 치열한 논쟁, 그리고 뒤에서 자당의 대표를 응원하고 상대방을 야유하는 의원들의 요란한 몸짓과 소리, 가발과 가운을 두른 채 “오더, 오더(Order·질서)!”를 외치는 하원 의장의 모습 등을 떠올려보라. 마치 셰익스피어 대극장에서 연출되는 한 편의 연극을 떠올리게 하는 이 모습은 북유럽 의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 논쟁하는 의회가 모든 절차와 내용이 공개되는 본회의장에서 화려한 웅변과 레토릭(수사)을 동원하며 이루어지는 연설과 논쟁을 중시한다면, 북유럽의 일하는 의회는 정책 영역별로 특화된 상임위원회 회의실에서 실용적·합리적인 문제 해결 방안 모색과 합의적 의사결정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실제 영미권 의회는 위원회 토론 내용도 속기록까지 포함해 모두 공개하는데 북유럽 의회, 특히 핀란드 의회는 상임위원회를 주로 비공개 상태에서 진행하며 간단한 의사 일정과 참석자 등이 포함된 메모 외에 속기록 등은 작성하지 않는다. 모든 내용을 공개하면 외부 시선을 의식해 의원들이 마치 극장의 배우처럼 행동하기 쉽고, 이는 의원들 사이 자유토론과 합의적 의사결정을 방해한다고 본다. 대신 북유럽 의회는 법안 심의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관계 집단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이를 법안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시민사회와 소통한다.

한 해 천 번 가까운 입법 청문회

내가 연구한 시기인 2014년에 핀란드 의회는 1만 건 넘는 입법을 협의했다(이익단체 대표나 전문가 한 명의 청문회 의견 진술 또는 의견서 접수를 1건으로 계산). 청문회는 입법을 협의하는 주요 경로인데, 한 해에만 1천 회 가까운 입법 청문회가 열린다. 핀란드 인구가 550만 명 정도임을 고려하면 광범위한 입법 협의 시스템이 상시 가동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사회보건위원회와 교육문화위원회 등 주요 사회정책 의제를 다루는 위원회일수록 노조와 고용주 단체 등 노동시장의 대표 행위자와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를 청문회에 초청해 함께 소통하고 협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간단한 법 개정 사안일 경우 청문회는 1~2회 개최로 족하지만, 사회보장제도 개혁처럼 크고 복잡한 문제라면 수십 회, 심지어 100회 넘게 열기도 한다. 정부가 법안을 마련하는 단계에선 이보다 더 폭넓게 정책 협의 시스템이 가동된다. 의회의 입법 심사 단계에서도 그 절차가 다시 진행된다.

이처럼 해당 국가의 역사적 맥락과 정치문화에 따라 의회 시스템과 운영 방식에서도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 흥미롭다. 그렇다고 일하는 의회와 논쟁하는 의회가 반드시 양자택일의 의회 모델인 것은 아니다. 국가의 현안에 차원 높은 공론의 장을 제공하는 것과 입법·정책 사안을 심층 검토하며 합의적 의사결정을 모색하는 것은 둘 다 현대의 민주적 의회가 추구해야 할 본질적 역할일 것이다. 영국 의회도 지속적인 개혁으로 위원회의 위상과 역할을 강화해왔고, 북유럽의 의회는 최근 위원회 활동의 공개성과 본회의 토론의 역동성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1대 대한민국 국회가 개원하면서 상임위원장 배분 문제를 놓고 다시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야 모두 ‘식물국회’와 ‘동물국회’라는 오명을 썼던 20대 국회를 반성하며 ‘일하는 국회’ 만들기를 다짐했지만,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일하는 국회의 진정한 상대 개념은 논쟁하는 국회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겐 제대로 일하고, 논쟁하는 국회가 필요하다.

일하고 논쟁하는 국회가 되려면

그 첫걸음은 법안의 기술적 측면에 관한 심사 기능을 담당하는 법제사법위원회가 사실상 상원처럼 기능하면서 개혁 입법의 발목을 잡아온 왜곡된 관행부터 개선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상임위원회의 법안 심사 과정을 전면 혁신해 폭넓은 입법 협의 시스템과 문화를 실행해야 한다. 나아가 국회의 대정부 질의와 청문회 등의 절차를 대폭 개선해 일방적인 고함과 폭로 중심의 관행을 끝내고 질 높은 정책 토론과 입법 숙의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혁신에 대한 시민의 요구가 대안적 국회 시스템과 문화를 향한 체계적인 의회 개혁 논의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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