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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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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은 큰 우산을 쓰는 것과 같아요”

농인의 딸인 이길보라 감독이 말하는 복합차별과 차별금지법 제3조 1항 6호
등록 2020-10-01 10:02 수정 2020-10-02 00:42
이길보라 영화감독이 9월21일 경기도 고양시 백석동에서 <한겨레21>과 만나 농인의 자녀를 일컫는 ‘코다’를 수어로 표현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이길보라 영화감독이 9월21일 경기도 고양시 백석동에서 <한겨레21>과 만나 농인의 자녀를 일컫는 ‘코다’를 수어로 표현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제1조부터 제57조까지. 법안의 문장은 건조하다. 성숙한, 어떤 사람들은 건조한 문장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긴다. 서로의 존재를 느슨하게 감각한다. 때로 염려한다.

성소수자 부모 위니는 제3조 1항 1호를 두고 생각한다. 23개 차별 금지 사유(정체성)가 빼곡하다. 마침내 법이 내 아이의 존재를 불러줄지 몰라. 그런데 우리가 몰라서 놓친 또 다른 ‘복잡한 정체성’이 있다면?
농인의 비장애인 자녀이자 여성인, ‘복잡한 정체성’을 지닌 이길보라는 제3조 1항 6호(복합차별 조항) 앞에서 생각한다. ‘이유’ 없이 당연했던 차별 앞에 이유를 물을 수 있는 힘이 될지 몰라. 암 경험자 이정훈은 제41조 1항(제3자 진정권)을 보고 생각한다. ‘이유’를 짐작하고도 침묵했던 내 친구들한테 싸울 힘이 될지도 몰라. 그 싸움이 ‘인식’을 바꿀 수 있을지도. 이란 난민 친구를 위해 목소리 냈던 열입곱 살 지민은 제35조(교육 책임자 등의 의무) 덕에 한층 더 예민하게 차별을 ‘인식’하는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
모른다, 아직은. 차별금지법안이 9월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됐다. 법안의 문장을 고민하는 일은 드물었다. 익숙하고 막연한 혐오가 있었고, 그것과 싸워야 했다. 생뚱맞은 데 그어진 전선에서 갈등하다가 정작 법안은 잊히는 일을 13년 동안 일곱 번 겪었다. 같은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모른다, 아직은. 이번만은 다를 이유를 생각한다. 그럼에도 “인류는 그렇게 절망적인 존재가 아니”니까.(류승연 작가) 내 자녀, 내 부모, 내 친구, 그래서 나의 일인 차별은, 당신과 당신 사람의 일이기도 할 것이니까. 그리하여 건조한 법안의 문장 앞에서 나와 다르지만 사랑하고 싶은 타인을 떠올릴 테니까. 그러다 이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 “어떤 생물도 고독을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나진 않는다. 태어나보니 밤이었고, 혼자였고, 떠밀려서 차라리 고독을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다.”(김비 소설가)_편집자주

*기사는 2020년 6월29일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정의당 장혜영 의원 대표 발의)을 바탕으로 썼다.

복합차별과 차별금지법 제3조 1항 6호

2가지 이상 차별 금지 사유가 함께 작용해 발생하는 차별에 ‘큰 우산’ 씌워 구제한다.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5), <기억의 전쟁>(2020)을 만든 영화감독 이길보라(30)는 1990년 여름, 경기도 부천에서 농인(청각장애인)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청인(비장애인)인 그는 ‘손’으로 옹알이를 시작했다. 엄마 아빠에게 수어를 배우고, 집 밖에서 음성언어를 배웠다. 이길보라는 “나의 모어는 수어”라고 한다.

보건복지부 장애인 통계(2019년 12월 기준)를 보면 전국 등록장애인은 261만8918명으로, 이 가운데 청각장애인은 37만7094명이다. 이길보라 같은 농인의 자녀는 그보다 많을지 모른다. 이길보라는 “들을 수 없는 농인에게 음성언어는 외계어 수준이다. 여전히 부족한 특수교육의 한계로 문자언어도 외국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청인 자녀는 철이 들기 전부터 ‘침묵의 세계’와 ‘소리의 세계’ 사이에서 ‘통역사’가 될 수밖에 없다. 사회는 이들의 존재를 세심하게 살피지 않는다. 그냥 ‘불쌍한 사람’으로 이름표를 붙인다. “(타인이 부모를) 청각장애인이라고 인지한 순간, 불쌍하고 안타깝게 쳐다보는 시선이나 감정이 늘 (대응하기) 어려워요. ‘불쌍하지 않아요. 그들만의 세계가 있어요’라고 해도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요금제 바꿀 때도 “보호자 바꿔달라”

결국 이들은 스스로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s)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길보라는 한국의 코다들을 만난 뒤 2014년 ‘코다 코리아’를 만들었다. 코다들은 모임을 통해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6월29일, 이길보라는 트위터에 ‘#우리에게는_차별금지법이_필요하다’는 해시태그를 달고 지지를 보냈다. 9월16일 화상회의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고 그와 마주했다. 그에게 차별금지법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유가 생기는 거죠. 차별적 시선에 ‘그러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 온갖 정보에서 소외됐던 부모님의 정보접근권을 마련하라고 화낼 수 있는 이유, 상처받지 않을 이유….” 이길보라는 차별금지법이 ‘이유’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차별은 ‘이유 없이’ 당연했다. 삶의 모든 영역에 차별이 퍼져 있기에 농인 부모와 코다는 무엇이 차별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삶의 미세한 곳에 다 차별이 있어서 차별이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농인은 일상의 모든 정보에서 소외돼요. 차별이 기본값이라 ‘어쩔 수 없지’라고만 생각했어요.” 장 보러 갈 때, 서류 떼러 동사무소(주민센터)에 갈 때 어린 이길보라는 부모의 통역사이자 보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의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에도 통역을 위해 초등학생인 그가 부모와 동행해야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휴대전화 요금제를 바꾸려 할 때마다 “보호자를 바꿔달라”는 상담원의 전화에 치미는 화를 삼켰다. 젊은 시절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 이용을 거부당했던 엄마의 기억을 두고 모녀는 ‘위험하니까 그랬겠지’라고 어렴풋이 이유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코다 정체성을 숨기지 않도록

농인이 투명인간이거나 불쌍한 존재로만 비치는 사회에서 코다는 자연스레 자신과 부모의 정체성을 부끄러워하고 부정하기 쉽다. 여성 자녀는 가족 안에서 통역과 감정노동을 맡는 일이 많아 이중고를 겪기도 한다. 농인 부모의 교육·경제 수준에 따라 자녀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정도도 다르다. 코다라는 정체성을 긍정하는 이길보라 역시 어린 시절,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길을 걷다 엄마를 만났을 때 모른 척했던 기억을 털어놓는다. “사춘기 때 수어를 하는 걸 부끄러워하는 코다가 많죠.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예요. 수어통역사도 코다라는 것을 숨길 때가 있어요. 부모가 농인이라는 걸 밝히면 득 될 게 없는 사회잖아요.”

국회에 발의된 차별금지법은 2가지 이상 정체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차별 행위를 차별 금지 대상으로 명문화했다(제3조 1항 6호). 이는 영국 평등법, 독일 일반평등대우법에서 차별 개념으로 포함한 ‘복합차별’을 말한다. 예를 들어 장애여성이나 탈북여성, 이주여성은 일터에서 근로조건·성희롱 등 2가지 이상의 차별을 동시에 당할 수 있다. 피해를 구제받기 위해 ‘남녀고용평등법’ ‘장애인차별금지법’ 등 개별법의 조항을 따져야 하는데 그러면 문제 해결이 더딜 수도 있다. 이에 차별금지법은 개별법에서 규정하는 다양한 차별 사유를 한 곳(국가인권위원회)에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다루는 ‘큰 우산’이 되려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하는 이들은 이 우산이 차별이 발생하는 복잡한 원인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본다. 법이 제정된다면 비장애인인 코다도 차별금지법 우산 아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차별 구제를 좀더 쉽게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길보라는 차별금지법이 ‘차별 해소를 매번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로 가는 ‘기본값’이 되길 바란다. 2019년 4월 수많은 이가 대피했던 강원도 고성 산불 발생 당일, 방송 뉴스특보는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았다. 2020년 1월20일에 시작된 질병관리청 코로나19 브리핑도 초기에 수어통역이 없었다. 방송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에 관련 규정이 있음에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모두 장애인 단체의 문제제기로 뒤늦게 수어통역사가 등장했다. “2020년인데도 이러한 일들이 생기는 것을 보면 진이 빠져요. 당연히 약자로 불리는 이들을 위한 시스템이 기본값이 돼야 하지 않나요. 왜 맨날 싸워야 하나요. 부모님이 ‘코로나에 걸리면 어떡하지, 누가 자가격리를 설명해주지’ 이런 걱정을 할 때마다 아찔해요.”

받아들이는 다양한 시도가 있을 뿐

그는 2년6개월 정도의 네덜란드 영화학교 유학 생활 경험을 토대로 최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라는 책을 냈다. 그는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다. 네덜란드에도 인종차별을 비롯한 무수한 구별짓기가 존재한다. 다만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을 뿐이다”라고 썼다. 차별금지법 역시 이런 ‘다양한 시도’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제1332호 표지 이야기 차별금지법을 이땅에
http://h21.hani.co.kr/arti/SERIES/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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