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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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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붓다는 총을 들었다

등록 2003-05-08 00:00 수정 2020-05-02 04:23

이미 위험수위 넘은 불교국가의 불교탄압… 지하와 국경의 전선에서 번뇌하는 승려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6시,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제201연대 소속 병력 가운데 일부가 남부지역 뻘라우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앞서 간 3개 분대를 따라 마지막 분대가 마을 외곽을 막 빠질 무렵, 적막을 가르며 불꽃이 튀었다. 첩보를 잡고 마을에 잠복해 있던 정부군이 학생군 후미를 때리며 기습해왔다. “RPG, RPG(로켓추진류탄발사기) 어딨어. 전방 때려!” 다급하게 외친 분대장 타웅 한은 한참이 지난 뒤 탄창을 갈아끼우면서야 온몸이 피투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턱쪽에 극심한 고통을 느낀 타웅 한은 2선으로 빠졌다. “개새끼, 도망치려면 총이라도 놓고 가!” 흥분한 소대장 소리가 타웅 한에게는 꿈결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쿰쿰한 냄새에 절은 한 병원에서 타웅 한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한달이 지난 뒤였다. 왼쪽 뺨을 관통한 총알이 9개의 이를 박살내고 혀를 일부 잘라낸 뒤 오른쪽 뺨을 뚫고 지나갔지만 타웅 한은 기적처럼 살아났다.

동티모르 독립지도자에게 분노한 이유

“모두가 싸우는데 나라고….” 한때 붓다의 가르침을 좇아 승려의 길로 접어들었다가 버마학생민주전선의 용맹스런 전사로 돌변해버린 타웅 한에게는 복잡한 정치논리도 정교한 불교철학도 없었다. 승려라면 흔히 한마디쯤 내뱉을 법도 한 “절 밥 먹은 승려로서 중생들을 위해서” 같은 고상한 수사도 없었다.

버마(미안마) 현대사는 타웅 한처럼 수많은 붓다의 후예들을 속세로 내몰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타웅 한’들은 대중의 뜻을 따라 망설임 없이 절 문을 박차고 나왔다.

“동티모르 독립투쟁이 가톨릭 지도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것과 달리, 버마에서 승려들이 정치운동을 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신생 독립국 동티모르 외무장관이자 199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라모스 홀타가 지난해 지 인터뷰에서 했던 이 말은 버마어로 번역돼 나돌면서 수많은 ‘타웅 한’들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무지였든 무시였든, 그쯤 되는 사람이 함부로 내뱉을 말이 아니지.” 1988년 승려들을 조직해 학생들과 함께 버마민주화 시위를 이끌었던 아신 캐이마사라 스님(버마청년승려연합ABYMU 의장)은 언짢은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도 버마 대중의 뜻을 받들어 군사독재타도 선봉에 섰던 승려들은 그동안 11명의 순교자를 내고 1천여명이 투옥당하는 기록을 남기며 지난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군사정부가 눈엣가시로 여기는 게 네가지 있다.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 소수민족해방세력, 학생조직, 그리고 승려조직이다. 이 가운데 승려조직이 군인 독재자들에게는 가장 거북한 상대다.” 민족민주동맹을 이끌어왔던 우틴우 말처럼, 아시아 최대 불교국가 가운데 하나인 버마에서 30만여명에 이르는 출가승들이 지닌 사회적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군사정부는 ‘당근과 채찍’을 교묘히 섞어가며 갖은 정성을 다했다. 셰다곤파고다 복구와 같은 대형불사를 국가적 행사로 치르며 거금을 투자했는가 하면, 노승들에게는 고급 승용차와 비디오 같은 불교의 코드와 맞지 않는 화려한 선물공세를 취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승려를 체포하고 사원을 파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사원마다 가짜 중들을 투입해 스님들을 낱낱이 감시하는 판이니 정치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모임조차 열 수 없는 실정이다.” 비선으로 버마 내부 승려들을 조직해온 아신 캐이마사라 스님은 군사정부의 대 불교 공격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위험 수위를 넘었다고 한다. “1988년 이전에도 운동장을 짓는다고 스무개에 이르는 사원을 파괴했던 적이 있어. 그 자들이 1995년에는 엠(Am)군에 병영을 차린다며 사원 다섯개를 또 파괴했지. 이러니 스님들 잡아가서 고문하고 죽이고 하는 짓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일부는 저승으로, 일부는 중상…

그동안 어용 최고승려위원회 승려들에게 헌화하는 군부 실권자들 모습을 비춘 다음, 술 마신 중과 간음한 중에 대한 소식을 내보내는 텔레비전 뉴스는 군부가 지닌 강박감과 정책을 더도 덜도 없이 드러내주는 좋은 본보기로 꼽혀왔다. 닥터 나잉옹(버마학생민주전선 전 의장) 말을 들어보면 현 군사정부의 불교 탄압 수위를 짐작할 만하다. “전선에 참여하겠다는 스님들이 강한 정치 의식을 들고 오는 경우도 많았지만, 스님들 가운데는 사원과 승려들을 직접 공격하는 군사정부에 대한 종교적 분노로 찾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물리적인 탄압을 받는 가운데 승려들은 지하에서 정치투쟁 조직을 일궈냈다. 랑군과 남부지역을 축으로 삼은 청년승려연합(YMU)과 만달레이와 중부지역을 낀 승가연합(Sangha Samagi)을 비롯해 7개 승려단체가 민주화투쟁을 선도해왔고, 또 망명 승려 300여명이 조직한 버마청년승려연합(ABYMU)은 버마 내부 승려 100여명을 비선으로 묶어 연대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 승려조직들은 1988년 학생·노동자들과 함께 민주화투쟁을 주도했고, 아웅산 수지의 민족민주동맹(NLD)이 압승을 거둔 1990년 총선 결과를 뒤엎은 군사정부에 종교거부 운동으로 맞섰다. 1997년 경제위기에 빠진 군사정부가 불상에서 루비를 뽑아간 사건을 놓고 8천여 승려들이 운집했던 이른바 ‘만달레이 마하 미야트무니 봉기’도, 그리고 군사정부가 대화에 나서도록 압박했던 이른바 ‘9.9.99운동’도 모두 이 승려단체들이 중심에 섰던 투쟁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강한 상징성을 지녀왔던 버마청년승려연합은 버마 내 민족해방세력과 망명 민주혁명 세력들의 결집체인 버마연방민족회의(NCUB) 일원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버마청년승려연합은 ‘비폭력’을 유일한 무기로 삼아 선배 승려들의 대 영국 반식민지투쟁 전통을 현재 반독재투쟁으로 계승하고 있지만, 공동의 목표인 민주화 성취를 위해 무장통일전선인 버마민주동맹(DAB)에도 ‘비군사’를 전제로 적극 참여해왔다.

그러나 버마 불교는 경전과 사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승려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내렸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따라 하나 둘씩 승복을 벗고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죽이지 말라.” 어떤 경우에도 거부할 수 없는 불교의 이 본질적인 명제는 투쟁에 나섰던 승려들에게 한계로 인식되었고, 결국 수많은 승려들은 스스로 전선을 택했다. 버마청년승려연합에서만도 60여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승복을 벗고 반독재 무장투쟁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저승으로 갔고 일부는 중상을 입은 중생으로 되돌아나왔다.

“우리는 중생들의 뜻을 따른다”

“스스로 판단할 문제지. 승가에는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강요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내려오고 있어. 다만, 총을 들려면 승복을 벗어야 해.” 아쉰 캐이마사라 스님 얼굴은 돌아오지 못하는 옛 동료들에 대한 짙은 존경과 아쉬움이 함께 묻어 났다. “총든 이들이나 승복 입은 이들이나 모두 붓다 일 수도 있고 모두 아닐 수도 있는데….” 선문답 같은 추상적인 말을 잠시 꺼냈던 아쉰 캐이마사라스님은 이내 명료한 단어를 들고 현실로 돌아왔다. “중생들 뜻을 따르는 게 버마 승려들의 전통이었어. 중생들이 필요로 한다면 길바닥으로 뛰어나가 시위도 했고 산악에 올라 총을 들기도 했던 게 승려들이었어. 승복이 다 무슨 소용이야. 그런 건 입어도 되고 벗어도 되는 치장일 뿐.”

지난한 버마 민주화투쟁은 이렇게 싸움꾼 붓다들을 양산했고, 그 붓다들은 불법을 훌훌 털어버렸다. 그 불법은 중생들을 어루만졌고, 그 중생들은 또 다른 붓다를 염원했고, 또 다른 붓다들은 오늘도 번뇌를 거듭하고 있다. 붓다의 윤회는 중생들 속에서 찰라 마다 일어나는데, 정녕 붓다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지….

타이-버마 국경=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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