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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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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좋다, 메넴만 아니면”

등록 2003-05-14 00:00 수정 2020-05-02 04:23

페론당의 두 후보로 압축된 아르헨티나 대선…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간 메넴에 등 돌리는 국민

2001년 12월 경제위기로 인한 폭동으로 2년 임기를 남기고 있던 페르난도 델 라 루아 대통령이 물러났을 때, 아르헨티나에선 미래에 대한 온갖 예측이 난무했다. 내전이 발발할지도 모른다, 포퓰리스트 독재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는 군사쿠데타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국제연합이 유엔평화유지군을 파견할지도 모른다는 예측까지 있었다. 그나마 가장 양호한 예측은 국제통화기금의 손에 나라의 운명이 맡겨지는 것이었다. 이런 예상들은 모두 빗나갔지만 그때의 사회적 위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들로 남았다. 그리고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그 사회적 위기는 심각한 정치적 분열상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꺼져라”고 외쳤던 좌파가…

세명의 페론당(PJ) 후보, 세명의 급진시민연합(UCR) 후보, 네명의 좌파 후보, 세명의 극우파 후보. 이것이 지난 4월27일 아르헨티나 대선 1차 투표에 출마한 후보들의 정치색이다.

최근 50년 동안 아르헨티나 현대 정치의 주요 축 가운데 하나였던 페론당은 까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과 에두아르도 두알데 현 대통령간의 알력으로 내분이 일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99년까지 아르헨티나를 통치했으며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그리고 미 재무부가 8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외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한 ‘워싱턴 합의’의 가장 충실한 모범생이었던 까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이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자 에두아르도 두알데 대통령이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후보를 지지하면서 권력투쟁이 개시되었다. 결국 법원의 명령에 따라 당 이름도 당의 상징도 사용할 수 없다는 조건 아래 세명의 페론당 후보가 선거에 나서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

페론당과 함께 현대 아르헨티나 정치의 주역 가운데 하나였던 급진시민연합도 지리멸렬하긴 마찬가지다. 페르난도 델 라 루아의 ‘연합정부’가 폭동으로 붕괴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이미 2001년 12월의 경제위기 이전에 두명의 저명인사들이 당을 떠났다. 한명은 중도우파 정치인인 로페스 머피이고, 한명은 중도좌파 정치인인 엘리사 카리오로, 두명 다 이번 대선에 출마했다. 83년 군사독재를 종식시키면서 최초의 민선정부를 출범시킨 라울 알폰신이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급진시민연합도 공식적인 후보를 당내투표로 선출했다. 그러나 선출과정은 선거부정 시비로 얼룩졌다.

특정한 정치이념으로 분류하기 힘든 강력한 페론주의의 존재로 인해 아르헨티나엔 좌파세력의 출현이 힘들었다. 후안 도밍고 페론 장군에 의해 제창된 페론주의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받았는데 초기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노동조합운동가들이 여기에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경제위기 이후에 출현한 좌파들은 “모두 꺼져라!”를 외치며 공개적으로 기권표, 무효표, 백지표를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대중의 분노가 급상승했던 2001년 10월 상원의원 선거에서 40%의 시민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세력으로선 소수인데도 사분오열된 좌파는 이번 선거에 네명의 후보를 출마시켰다. 여기에 군사쿠데타 세력들의 지지를 받고 극우파 후보들도 세명의 후보를 출마시키면서 아르헨티나 분열상에 일조했다.

아르헨티나의 이런 분열상은 투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대선 1차투표 결과 메넴(24.34%)이 1위를 차지했고, 네스토르 키르치네르(21.99%)는 2위를 차지했다. 게다가 투표결과 1위와 5위의 차이가 고작 10%에 불과한 것이 드러났다. 그러니 “누구도 승리를 선언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메넴, 외채와 부패의 진원지

결선투표에 나설 후보는 페론당의 메넴과 키르치네르 후보다. 그러나 현재 메넴 대통령에 대해선 투표결과와 여론조사에 보여주듯이 70%의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거부입장을 표명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40%의 시민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메넴에게 표를 던지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메넴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언론에 실린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 중심가에 거주하는 한 시민이 한 말이다. 1차투표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자기 고양이에게 표를 던질 생각이었다는 그가 ‘분노의 투표’(2001년 10월 연방상원의원선거에서 아르헨티나 약 40%의 유권자들이 “모두 꺼져라!”를 외치며 무효표, 백지표를 던졌다)로 전술을 바꾼 이유는 오직 메넴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아르헨티나 시민들 사이에 퍼져 있는 정치에 대한 혐오와 메넴에 대한 거부의 감정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90년대 아르헨티나는 인플레이션을 외채와 맞바꾸었을 뿐이다.” 역사학자 나탈리오 보타나의 지적이다. 메넴은 ‘워싱턴 합의’에 따라 민영화, 자유화 정책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늘 골치 아팠던 아르헨티나 경제를 안정시킨 모범생으로 한때 세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살인적인 외채를 유산으로 남겨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아르헨티나 국민의 20%를 실업자로 만들고 국민의 약 60%를 빈민으로 만든 주범이 되었다. 민영화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극성을 부렸는데 메넴의 마지막 집권 해였던 99년 세계사회포럼의 한 보고서는 아르헨티나를 세계 제5위의 부패한 나라로 지목했다. 게다가 지난 2001년 6월 메넴은 재임시절 크로아티아와 에콰도르에 무기를 불법으로 판매한 혐의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메넴은 이런 평가를 모두 부인한다. “내 유일한 실수는 공적지출을 늘린 것이다. 그러나 성장을 위해서는 불가피했다.” 외신기자들과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나아가 전임정부였던 라울 알폰신 정부가 1억달러가 넘는 외채를 숨겨놓았다고 둘러대기까지 했다.

“아르헨티나 사회에 위기가 닥치지 않았다면 메넴이 다시 출마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일간지 정치평론가의 지적이다. 누구도 명백한 대안이 되지 못한 점 때문에 메넴이 70대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선에 출마했다는 것이다.

메넴과 맞서 결선투표에서 싸우게 될 후보 키르치네르는 메넴의 신자유주의정책과는 다른 모델을 추구한다. 그는 자신을 신케인즈주의자라고 정의하면서 국내 시장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메넴이 추구하는 미국과 협력하는 것보다는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 아르헨티나가 참여하는 공동자유무역시장) 소속 국가들과 협력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조금씩 경제를 회복시켜온 현 경제부장관인 라바그나를 계속 유임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경제안정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알데 대통령은 메넴 패배 장담

5월18일 2차결선투표를 앞두고 현재 그는 최고 40%에 이르는 차이로 메넴을 누르고 있다. 이미 1차투표에서 4위를 차지한 엘리사 카리오 후보가 메넴에 명백한 반대를 표명하면서 간접적으로 키르치네르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바 있고, 3위를 차지한 로페스 머피 후보는 신자유주의자이면서도 ‘정직성’과 ‘윤리’를 강조하면서 메넴과 차이를 명확히 한 바 있다. 키르치네르 후보는 그의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메넴은 페론당의 제3후보였던 로드리게스 사아 후보가 1차투표 직후에 언급한 적이 있던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전략으로 맞섰다. 선거판을 부정선거 시비로 얼룩지게 해서 더 많은 기권을 유도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전략인 셈이다. 아르헨티나 언론은 최근 메넴의 사퇴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기 시작했다. 메넴 자신은 “정부의 작전에 불과하다. 정부가 시커먼 속내를 보여주고 있다”고 일축하지만 “메넴은 포기하거나 케이오(KO)당하거나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고 장담하는 현 대통령 에두아르도 두알데의 호언장담에 맞서기에 그는 현재 매우 불리한 입장이다.

멕시코시티=박정훈 전문위원 jhpark200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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