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C는 부패했다”… ‘인류의 양심’에 비수 들이댄 트럼프 정부

2024년 11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아카네 도모코 소장이 재판정으로 향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자리한 국제형사재판소(ICC)는 흔히 ‘인류의 양심’으로 불린다. ‘세계대전’ ‘집단살해’ 같은 20세기가 만들어낸 살풍경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인류의 다짐이 ICC 창설로 이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그 양심에 ‘비수’를 들이댔다. 집권 2기 출범을 전후로 ‘ICC 해체’를 공공연히 거론하더니, 급기야 아카네 도모코 ICC 소장까지 제재 대상에 올렸다. 우리가 알던 국제질서의 또 다른 한 축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이 규정의 당사국들은, 인류 모두가 공통의 유대로 하나가 돼 있고, 인류의 문화는 공유하는 유산 속에 연결돼 있음을 인식하고, 이 연약한 모자이크가 언제든 산산이 조각날 수 있음을 우려하며, 이번 세기 동안 어린이·여성·남성 수백만 명이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잔혹 행위로 희생돼 ‘인류의 양심’에 깊은 충격을 줬다는 점을 명심하고, 이 같은 엄중한 범죄가 세계의 평화·안보·안녕을 위협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국제사회 공통의 관심사인 가장 심각한 범죄가 처벌받지 않고 넘어가선 안 되며, 이들 범죄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은 개별 국가 차원의 조치와 더불어 국제적 협력 강화를 통해 보장돼야 함을 확인하고, 가해자에 대한 면책을 종식해 이들 범죄의 예방에 기여하기로 결의하며….”(‘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 전문)
1998년 6월15일~7월17일 이탈리아 로마의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본부에서 ‘ICC 설립에 관한 유엔 전권대표회의’가 열렸다. 160개국에서 파견한 대표단이 조약(로마규정) 초안을 두고 날 선 공방을 이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회의 마지막 날 표결에서 로마규정은 찬성 120표, 반대 7표, 기권 21표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다. 로마규정 제5조 1항은 ICC가 관할권을 갖는 범죄를 △집단살해죄 △반인도적범죄 △전쟁범죄 △침략범죄, 네 가지로 못박았다. 또 제126조는 “이 규정은 60번째 비준서, 수락서, 승인서 또는 가입서가 유엔 사무총장에게 기탁된 날로부터 60일이 경과한 다음달의 첫째 날에 발효한다”고 정했다.
2002년 4월11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10개국이 동시에 로마규정 비준서를 제출했다. 로마규정은 2002년 7월1일 66개국을 당사국(현재 125개국)으로 발효됐다. 잠시 역사를 되새겨보자.
‘유대인 집단살해’(홀로코스트)의 충격이 선연하던 1948년 12월9일 유엔 총회는 결의 제260호를 통해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다. 협약 제6조는 “집단살해 또는 제3조에 열거된 기타 행위(집단살해 공모·교사·미수·공범)에 대한 혐의가 있는 자는 그 행위가 영토 내에서 행해진 국가의 재판소 또는 체약국이 관할권을 인정한 국제적 차원의 형사재판소가 심리한다”고 규정했다. 유엔 차원에서 ICC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첫 사례다. ICC의 뿌리는 홀로코스트란 뜻이다.

2026년 7월2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백악관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하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실제 같은 결의에서 유엔 총회는 산하 자문기구인 국제법위원회(ILC)에 “집단살해 혐의로 기소된 자들을 재판할 국제적 차원의 사법기구 설립 필요성과 가능성을 연구하라”고 요구했다. 3년 임기의 국제법 전문가 15명(현행 5년 임기, 34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집단살해 또는 이와 유사한 중대 범죄 혐의로 기소된 자들을 재판할 국제재판소 설립은 바람직하고 또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에 따라 유엔 총회는 관련 재판소 설립안을 마련하기 위한 별도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1951년과 1953년 각각 초안과 수정안을 작성해 총회에 제출했다. 세계가 냉전으로 빨려들던 때다. ‘침략전쟁’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두고 강대국들이 정면충돌했다. 재판소 설립 논의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잊혔던 ICC 관련 논의는 1991년 옛 유고슬라비아 땅에서 내전이 벌어지면서 다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게 됐다. 전쟁범죄, 반인도적범죄, 무엇보다 ‘인종청소’란 참담한 이름으로 탈냉전 시대에도 집단살해가 버젓이 자행된 탓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93년 2월 결의 제808호를 통해 ‘옛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를 설립했다. 이어 국제법위원회가 ICC 설립을 위한 초안을 작성해 1994년 유엔 총회에 제출했고, 총회는 특별기구를 구성해 본격적인 설립 준비를 맡겼다. 그 결실이 1998년 로마에서 열린 전권대표회의였다. 로마규정 발효에 따라 ICC는 2003년 3월11일 헤이그 재판소에서 개소식을 열고, 재판관 18명의 선서와 함께 공식 활동에 들어갔다. 그런데….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권한에 따라 미합중국 대통령인 나 도널드 트럼프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ICC는 미국과 동맹국 이스라엘을 겨냥해 부당하고 근거 없는 공격을 벌이고 있다. ICC는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미국과 이스라엘 등 동맹국 인사들에 대한 사법 관할권을 행사해 수사에 착수했다. 또 아무런 증거도 없이 권한을 남용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국방장관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로마규정 당사국이 아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ICC의 사법 관할권을 인정한 적이 없으며, 활기찬 민주국가로서 두 나라의 군대는 국제법이 규정한 교전 수칙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다.”

2026년 8월25일 이스라엘 쪽에서 바라본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가 장기간에 걸친 폭격으로 폐허가 돼 있다. REUTERS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 취임식 보름 남짓 만인 2025년 2월6일 내놓은 ‘행정명령 제14203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러면서 2024년 5월 네타냐후 총리와 갈란트 전 장관에 대한 체포영장 청구를 주도한 카림 칸 ICC 수석검사(검사장)를 “미국의 국가안보와 외교정책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제재 대상자로 지정했다. ICC를 겨냥한 첫 직접 공격이었다.
미국의 제재 대상자는 △미국 입국 금지 △미국 관할권 내 자산 동결 △미국인 및 미국 기업과의 거래 제한 등 불이익을 받게 된다. 특히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에 대한 우려로 각국 금융기관과 기업 등이 거래를 꺼린다. 결국 제재 대상자는 신용카드 사용과 인터넷 금융거래가 불가능해지고, 구글·아마존·넷플릭스 등 미국 기업의 일상적 서비스도 차단당하는 등 일상생활에 큰 불편을 겪게 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공세는 집요했다. 같은 해 6월5일엔 솔로미 보사(우간다), 루스 카란사(페루), 렌 알라피니강수(베냉), 베티 홀러(슬로베니아) ICC 재판관 4명이 추가로 제재받았다. 보사 재판관과 카란사 재판관은 네타냐후 총리 등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를, 알라피니강수 재판관과 홀러 재판관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전쟁범죄 혐의에 대한 수사 개시 명령을 각각 문제 삼았다. 한 달여 뒤인 7월9일엔 ICC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이유로 프란체스카 알바네세(이탈리아) 유엔 ‘점령지 팔레스타인 인권 상황 특별보고관’도 제재 대상에 올랐다.
트럼프 행정부는 같은 해 8월20일 킴벌리 프로스트(캐나다)·니콜라 기유(프랑스) 재판관과 나자트 칸(피지)·마메 니앙(세네갈) 검사 4명을 제재 대상으로 추가 지정했다. 4명 모두 네타냐후 총리 등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와 집행에 관여했다는 게 이유였다. 또 9월4일엔 역시 ICC 활동에 적극 가담했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인권단체 알하크·알마젠·팔레스타인인권센터(PCHR) 3곳에 제재를 부과했다. 이어 12월18일 고차 로르드키파니체(조지아)·에르데네발수렌 담딘(몽골) ICC 재판관 2명도 제재 대상에 추가했다.
ICC 관련 신규 제재를 발표할 때마다 미국 쪽이 내놓은 주장은 한결같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로마규정 당사국이 아니다. 따라서 ICC는 사법 관할권이 없다. ICC가 비당사국 국민까지 처벌하는 건 명백한 주권 침해다.” 정말 모르는 건가, 알고도 우기는 건가? ICC의 사법 관할권 행사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국적 관할권이다. 특정 국가가 로마규정 당사국이면 ICC는 해당 국가 국민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 둘째, 영토 관할권이다. 특정 국가가 로마규정 당사국이면 ICC는 해당 국가의 영토에서 벌어진 반인도적범죄 행위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 설령 범죄자가 로마규정 비당사국 출신인 경우에도 당사국 영토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면 ICC가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러시아는 로마규정 당사국이 아니다. 그럼에도 ICC는 우크라이나 침공 뒤 어린이를 포함한 점령지 주민을 강제 추방한 혐의(전쟁범죄)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2000년 로마규정에 서명한 우크라이나가 공식 당사국(2025년 1월)이 되기 전인 2013년 11월21일 ICC의 사법 관할권을 잠정 승인했기 때문이다. ICC의 관할권을 인정한 국가의 영토에서 벌어진 전쟁범죄에 대해 ‘영토 관할권’을 행사한 전형적인 사례다.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사례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은 로마규정 당사국이 아니지만, 팔레스타인은 2015년 4월 로마규정 당사국 지위를 얻었다. 9·11 동시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이 붕괴한 뒤인 2003년 2월 로마규정 당사국이 된 아프가니스탄 사례도 눈여겨볼 만하다. 2021년 8월 권좌에 복귀한 탈레반은 로마규정을 “허깨비”라고 주장하지만, 공식 탈퇴 절차를 거치지 않은 탓에 ICC의 관할권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다. ICC가 탈레반 지도부와 아프간 주둔 미군의 전쟁범죄를 단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다.

2026년 8월2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군 1호기를 타기 위해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공군기지 활주로를 걷고 있다. AP 연합뉴스
“우리 정부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동맹과 함께 ICC를 단계를 밟아가며 체계적으로 해체할 것이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2026년 7월13일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빈말이 아니었다. 루비오 장관은 8월18일 기자회견을 열어 “ICC는 부패하고 대단히 정치화된 초국가적 재판소로 악의적으로 권한을 남용했다”며 추가 제재 대상자 2명을 발표했다. 아카네 도모코(일본) ICC 소장과 압둘라예 세예(세네갈) 선임 공판검사다. 이로써 아카네 소장을 포함한 ICC 재판관 9명과 검사 3명, 알바네세 특별보고관과 인권단체 3곳이 미국의 제재를 받게 됐다. ‘인류의 양심’을 지키는 일이 범죄가 됐다. 홀로코스트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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