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와 미얀마의 국경 근처 산악지대에 위치한 맬라 난민촌에서 만난 아이.
타이와 미얀마의 국경 근처 산악지대에 위치한 맬라 난민촌은 미얀마 난민 4만여 명이 40년 동안 둥지를 틀고 지내온 곳이다. 사방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였고 타이 당국의 허가 없이는 캠프 밖으로 나갈 수 없지만, 미얀마 군부의 공습으로부터는 안전한 곳이다. 또 다른 난민촌 8곳도 상황은 유사하다.
2025년 11월18일 맬라 난민촌에서 만난 70대 할머니 마사와 노신디는 요즘 자식들 걱정으로 밤잠을 설친다. 미국 역대 정부가 시행해오던 국외 원조를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없앤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두 할머니는 당장 한 달 뒤면 몇십 년 동안 매달 제공받던 쌀과 응급의료 지원이 중단되고, 비정부기구(NGO) 프로젝트에 참여하던 자녀들이 실직해서 가족 생계에 직격탄을 맞게 된다고 했다.
나는 독일 국제앰네스티 회원으로 맬라 난민촌 내 한 교사와 2024년부터 소통해왔다. 트럼프 정부의 국외 원조 중단이 세계의 취약한 커뮤니티에 미칠 악영향을 이해하고자 그와 연락해왔는데, 그가 어느 날 갑작스레 미국 정부가 식량지원을 중단한다는 소식을 페이스북 메신저로 보내왔다. 최근 외신에서 미국 정부의 원조 중단으로 2025년 5월 사망한 2살 난민촌 아동의 소식도 읽었다. 군부의 잔인한 폭력을 피해 산악지대에 손발이 묶인 수만 명을 모른 척 굶어 죽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다급한 마음에 이 소식을 널리 알리려 현지 방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맬라 난민촌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소도시 매솟에도 2021년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 이후 시민불복종운동을 해오던 많은 민주인사와 그 직계가족이 생명의 위협으로 고향을 떠나 타이에서 미등록 난민으로 힘겹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공식 통계는 없지만, 매솟에 사는 난민은 7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대략 매솟 인구의 65%를 차지한다.

맬라 난민촌에서 만난 아이들.
2025년 11월17일 매솟 공항에서 까다로운 이민국 심사를 마치고 숙소에 짐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57㎞ 거리에 있는 맬라 난민촌을 찾았다. 1984년 국경 지역의 언덕에 처음 세워진 뒤 계속 몸집을 불린 이 난민촌은 현재 1.84㎢ 크기로 커졌다. 서울 중구의 필동보다 다소 큰 규모다.
난민촌 내 규칙이 복잡해서 오후 4시쯤에는 떠나야 했기에 다소 빠른 템포로 일정을 소화했다. 지인이 소개한 일부 가정집도 방문했고 현지 클리닉도 둘러봤다. 식량카드로 쌀을 살 수 있는 구멍가게에서는 심지어 한국의 불닭볶음면을 발견하기도 했다. 교회 건물, 모스크, 스님들의 행렬을 보면 작은 세계의 축소판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맬라 난민촌에서 지인의 소개로 다양한 배경을 지닌 11명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미국 국무부 산하 인도주의적 지원을 전담하는 ‘인구·난민·이주민 담당국’(PRM)이 국외 지원을 중단한 여파는 이들 난민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의료, 교육, 복지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타격이 크지만 무엇보다 식량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대화를 나눈 난민들 모두 곧 들이닥칠 식량지원 중단에 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2026년 1월부터 최대 취약 그룹인 17%에게만 식량을 제공하고 나머지 83%에게는 지원을 전액 중단하기 때문이다.

맬라 난민촌의 수많은 상점과 건물에는 ‘미국으로부터 기금을 지원받아 만들었음’(funding provided by USA)이라는 문구가 많이 보인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국외 원조 중단 정책으로 이런 간판도 과거로 사라지고 있다.
이 난민촌에는 13개 비정부기구가 협력해서 지원해왔는데, 식량과 숙소를 제공하는 핵심 단체는 단연코 티비시(TBC·The Border Consortium)다. 북미와 유럽 9개국의 9개 비정부기구의 연합체인 TBC는 1984년 이래 40여 년 동안 이 일을 맡고 있다. TBC는 개별 캠프와 난민의 상황에 따라 세 카테고리로 난민을 구분해, 해당 그룹에 맞는 금액의 식량카드로 쌀을 지원했다. 식량카드는 일반그룹(227바트·약 1만329원), 취약그룹(270바트·1만2285원), 최대 취약그룹(355바트·1만6153원)으로 나뉘어 지급된다. 미얀마는 약 135개 민족이 공존하는 국가이지만, 이 맬라 난민촌에는 미얀마와 타이 양국에 걸쳐 거주하는 소수민족 카렌족이 4분의 3 이상을 차지한다. 난민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카렌난민위원회의 H는 “캠프 내에서도 버섯·고수 등 일부 채소의 재배는 가능하지만, 주식인 쌀은 재배할 수 없다”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의료서비스도 악영향을 받고 있다. 그간 국제구조위원회(IRC)가 의료지원을 맡았지만 의료지원 직원 축소, 지원비 대폭 삭감으로 인해 난민들은 각자도생해야 할 상황으로 내몰렸다. 무엇보다 응급서비스가 심각하다. 난민촌의 유일한 병원은 허름하고 낙후한 관계로 전문 수술은 대도시에 있는 병원으로 가서 받아야 하는데 이제는 그 비용도 난민들의 얇은 주머니에서 해결해야 한다. 지난겨울에는 한 60대 남성이 사다리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남성은 비싼 치료비를 낼 수 없어 병원을 전전하다가 사망했다. 미국 의회에서 자국의 국외 원조 삭감으로 “아무도 죽지 않았고, 내가 지켜보는 동안 어느 아이들도 죽어가고 있지 않다”고 말한 마코 루비오 국무부 장관의 발언은 거짓말인 셈이다. 간호사 D는 “의료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아 치료가 지연될 경우 수동적이고 외로운 죽음이 더 흔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자리 문제도 큰 타격을 받고 있다. 13개 비정부기구가 9개 난민캠프를 지원했는데 미국의 원조 중단으로 상당수 직원이 해고당했다. 40년간 예산의 80%에 해당하는 지원금을 후원하던 미국 정부의 변심으로 TBC도 2개 지부를 닫아야 했다. 이 여파로 비정부기구가 운영하는 프로젝트와 협력하던 난민 직원들 역시 대량 실직하는 일이 발생했다.
다행히 모든 상황이 나빠진 것은 아니다. 그간 9개 난민촌에서 체류하는 난민들의 노동을 불허하던 타이 정부는 2025년 8월 전향적으로 입장을 바꿨다. 난민 총 10만7천 명 중 내무부에 등록된 7만7천 명에 한해 취업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TBC 총괄이사인 레옹 드 리드마텐은 필자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이제는 타이 정부가 미얀마 난민이 장기적으로 체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한 것 같다”며 “본국으로 많이 돌아간 캄보디아 이주노동자의 노동력을 미얀마 난민으로 대체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단 난민들의 자립을 권장하고 수입을 배로 증가시키는 이런 조치는 환영한다”며 “일련의 변화는 우리가 40년 만에 처음 겪는 것이기에 1년 동안 취업준비 지원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많은 난민이 타이의 입장 변화를 반기면서도 현실성에는 회의적이었다. 배우기 어려운 타이어에 대한 장벽, 문화 차이, 충분하지 않은 노동시장, 저임금 고용착취 등을 우려했다. 아울러 리드마텐은 “수많은 난관이 있는 매솟시의 서류 미비 미얀마 난민들도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드마텐은 “그간 서구 국가에만 재정 후원을 요청했는데 최근 반이민·반난민 정서가 힘을 얻는 우경화 현실을 고려해, 앞으로는 이웃인 한국이나 아시아 국가들의 참여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2025년 상반기 TBC의 보고서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영국 등이 주요 후원 국가다. 일본은 2025년 처음 후원했지만, 한국은 지금껏 참여하지 않고 있다.

맬라 난민촌에 체류하는 은퇴한 교사 D. 30대인 딸은 미얀마 민주화운동으로 37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 중이다. 설상가상으로 일반그룹에 속하는 그는 2026년 1월부터 미국 정부의 식량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된다.
리드마텐이 언급한 매솟의 난민들은 타이 정부의 시스템 밖에서 개별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의미한다. 울타리가 있는 캠프촌에 사는 게 아니니 얼핏 보면 자유스러운 듯하지만, 난민촌에 사는 이들처럼 비정부기구의 지원조차 없이 홀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2021년 2월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시민불복종운동과 시민저항군의 항쟁을 일컫는 ‘봄의 혁명’을 위해 싸우는 한 활동가의 소개로 11월20일 매솟의 한글학당에서 만난 용감한 미얀마 여성 4명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연대의 손길을 갈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군부 쿠데타 이후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했고, 군부의 체포와 살해 위협 등 극심한 탄압을 피해 온 새로운 정치 난민이었다. 다큐멘터리 창작자이자 기자인 30대 여성 E는 시민저항군으로 싸우는 남편 대신 아이들의 생계를 혼자 책임져야 한다. 쌀독에 쌀이 보이지 않을 때의 절망감을 전하며 망명 중인 미얀마 영화인과 언론인을 위한 일자리 지원을 요청했다.
가족 전체가 블랙리스트에 오른 30대 여성 S는 심각한 신장질환으로 인한 혈액 투석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가족에게 짐이 되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그는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자기 삶이 보호소라도 찾을 수 있는 동물보다 못하다며 눈물을 쏟아냈다. 마찬가지로, 한 젊은 엄마 N은 갑자기 타국에서 홀로 어린아이 2명, 여동생, 조현증이 있는 엄마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3개월 단기로만 잠자리를 제공하는 비정부기구의 보호소를 전전하며 끊임없이 가사도우미 일자리를 물색하고, 밤에 지쳐 숙소에 돌아오면 심신이 불안정한 모친을 돌봐야 한다. 난민들의 취약성을 악용해 금품을 갈취하는 타이 경찰들의 부패도 이들을 힘들게 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우리도 한국전쟁 이후 유엔난민기구의 지원을 크게 받았다. 한국 사회가 내전을 피해, 또는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처절하게 저항하다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에게마저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과연 국격이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인기 많은 케이(K) 문화의 수출에만 기대는 게 아니라 아시아에 사는 우리 이웃에게 아름다운 K 품앗이 정신을 나누는 것도 우리의 자부심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
클레어 함 재독 영화 PD 겸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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