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트럼프에 금관, 왕 기분 내게 하고 약탈을 모면하다

트럼프에 훈장·금관 선사 뒤 ‘관세 15%’ 등 나름 선방… 핵추진 잠수함 요청-승인은 뜻밖의 전개
등록 2025-10-31 02:14 수정 2025-10-31 11:34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10월29일 경북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열린 훈장 수여식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악수하며 천마총 금관 모형을 바라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10월29일 경북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열린 훈장 수여식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악수하며 천마총 금관 모형을 바라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5년 10월29일 한국 국빈 방문길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두 가지 소원을 이뤘다. 미국 대통령으론 처음 받은 훈장엔 루비·자수정·칠보 등 귀금속과 함께 금 190돈(712.5g)이 사용됐단다. 이날 기준 금값만 약 1억3천만원에 이른다. 국보 제188호인 천마총 금관 모형도 휘황찬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금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진 못했지만, 관세협상까지 타결지었다. 이만하면 ‘멋진 여행’이었을 터다.

WP ‘금관 수여’ 기사에 독설 댓글 주렁주렁

“한국 정부가 금을 유난히 좋아하고 왕이 되고 싶어 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공들이는 동안 한국 시민사회는 그의 관세정책과 대미 투자 강요를 비판하며 ‘노 킹스(No Kings), 우리는 트럼프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10월29일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관련 기사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같은 날 일간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으론 처음 한국 최고 권위의 무궁화대훈장을 받은 뒤 ‘너무 아름답다. 여기서 당장 걸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또 모형 금관을 선물받고는 ‘매우 특별하다’며 기뻐했다”고 전했다.

일간 워싱턴포스트도 “한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합의를 이루고, 번쩍이는 왕관까지 얻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천마총 금관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이 기사엔 10월30일 오전(한국시각) 기준으로 댓글이 400여 개나 붙었다. ‘케이트85’란 누리꾼이 단 댓글이 단연 화제였다. 그는 “왕관? 고대 왕관이라고? 진짜? 미국 대통령한테? 우리는 ‘노 킹’ 시위를 했는데 한국이 그 사람한테 왕관을 줬다고? 한국인이 이렇게 심하게 미국인을 증오하는지는 미처 몰랐다”고 썼다. 이 댓글에 ‘앨프리드 뉴먼’이란 누리꾼은 이런 답글을 덧붙였다. “한국인이 미국인을 증오하는 게 아니에요. 한국인들은 똑똑해서 갓 걸음마를 뗀 아기를 상대하는 법을 아는 것뿐이죠.”

방한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과 회동하고 싶다는 뜻을 숨기지 않았다. 북한을 ‘일종의 핵국가’라 부르기도 했다. 북-미가 막후에서 교섭하고 있을 것이란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북쪽은 10월22일과 29일 탄도미사일과 전략순항미사일을 잇달아 시험발사하며 북-미 대화에 나설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여기에 정상회담 필수 배석자인 최선희 외무상이 10월26일 나흘 일정으로 러시아와 벨라루스 순방길에 오르면서, 2019년 6월과 같은 ‘판문점 번개’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 분명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번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2025년 10월29일 오후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 경북 경주국립박물관 부근에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정책과 대미 투자 강요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5년 10월29일 오후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 경북 경주국립박물관 부근에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정책과 대미 투자 강요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관세 협상 합의 직후 딴소리한 미국 상무장관

막판까지 난항이 이어지면서 타결 가능성이 불투명했던 관세협상은 극적 합의를 이뤘다. 협상 초기 “3500억달러를 선금으로 내야 한다”고 요구했던 미국은 ‘연간 200억달러 한도, 총액 2천억달러 현금 투자’를 받아들였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10월29일 저녁 언론 브리핑에서 투자금 조달 방법을 두고 “우리 외환시장에서 바로 조달하는 게 아니라, 외화 자산의 운용 수익을 활용할 생각”이라며 “이자, 배당 등 운용 수익이 적지 않아 그중 일부를 기채(채권 발행)하면 정부 보증채 형식으로 할 듯하다”고 설명했다. 대규모 대미 투자가 외환보유고에 끼칠 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이다.

조선업 협력(마스가) 1500억달러는 한국 기업 주도로 추진하기로 했다. 합의에 따라 그간 25% 관세가 적용됐던 자동차와 부품 관세가 15%로 낮아진다. 반도체는 최대 경쟁국인 “대만과 대비해 불리하지 않은 수준”의 관세를 적용하기로 했다. 김 실장은 “민감성이 높은 쌀·소고기를 포함해 농업 분야에서 추가 시장 개방을 철저히 방어했다”고 덧붙였다. 최선은 아니어도, 최소한 ‘약탈’은 피한 셈이다.

문제는 후속 이행이다. 당장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10월30일 소셜미디어 엑스에 올린 글에서 “반도체 관세는 이번 합의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한국은 자국 시장을 100% 전면 개방하기로 합의했다”며 쌀·소고기를 포함한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전형적인 ‘골대 옮기기’로 보인다. 러트닉 장관은 7월30일 무역협상 1차 타결 직후에도 “한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시하는 대로 투자하기 위해 3500억달러를 미국에 제공할 것이며, 그 수익의 90%는 미국이 가져간다”고 주장해 논란을 부른 바 있다.

트럼프는 ‘핵잠’의 전략적 의미를 알까

안보 분야에선 뜻밖의 상황이 연출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정상회담 머리발언에서 “핵추진 잠수함의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결단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디젤 잠수함이 잠항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북한이나 중국 쪽 잠수함 추적 활동에 제한이 있으니, 연료 공급을 허용해주시면 저희 기술로 재래식 무기를 탑재한 잠수함을 여러 척 건조하겠다”고 덧붙였다. 한-중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중국’을 직접 거론한 것은 이례적이다.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10월29일 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필요성에 공감한다며 후속 협의를 하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실 쪽은 이 대통령의 ‘중국’ 언급에 대해 이날 늦게 “특정 국가를 겨냥한 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2015년 개정된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력 협정’(한-미 원자력 협정)은 전문에서 ‘평화’를 7차례 언급한다. 또 협정 제1조 ‘카’항과 제13조는 원자력(핵)을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결국 한국이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하고, 미국이 이에 필요한 핵연료를 지원하려면 최소한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 필요성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성사까지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한-미 군사동맹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이 지금 보유한 구식 디젤 추진 잠수함보다 훨씬 빠른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했다. 훌륭한 한국 대통령과 함께한 멋진 여행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월30일 오전 6시47분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썼다. 이어 7시3분엔 “한국은 필라델피아 조선소, 바로 여기 미국에서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할 것이다. 미국의 조선업은 곧 화려하게 부활할 것”이라고 썼다.

세계적으로 핵추진 잠수함을 보유한 국가는 5개 핵 영구 보유국(미·영·프·중·러)과 인도 등 6개국뿐이다. 핵추진 잠수함의 전략적 의미를 가늠할 만하다. 역대 한국 정부가 거푸 추진했지만, 미국이 허락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핵추진 잠수함을 ‘조선업’의 일부로만 여기는가? 트럼프 대통령은 대체 뭘 ‘승인’했다는 걸까?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