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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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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테러의 교훈, 적과 아군은 단순하지 않다

‘우크라 연계설’ 보복 다짐에 ‘이슬람국가-호라산’ 범행 자인… 중국 국경 맞닿은 중앙아시아로 활동 넓히는 무장세력
등록 2024-03-29 11:37 수정 2024-03-31 09:25
2024년 3월22일 저녁(현지시각) 테러 사건이 벌어진 러시아 모스크바주 외곽 크라스노고르스크의 ‘크로커스 시티홀’이 화염에 휩싸여 있다. EPA 연합뉴스

2024년 3월22일 저녁(현지시각) 테러 사건이 벌어진 러시아 모스크바주 외곽 크라스노고르스크의 ‘크로커스 시티홀’이 화염에 휩싸여 있다. EPA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5선 성공’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2024년 3월22일 저녁(현지시각), 러시아 모스크바주 외곽 크라스노고르스크의 ‘크로커스 시티홀’이 인파로 북적였다. 소비에트 시절인 1978년 결성된 전설적 록그룹 ‘피크닉’의 공연이 예정돼 있었다. 표는 매진됐고, 가득 찬 객석은 흥청거리고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인 저녁 8시께다. 위장복을 입은 무장괴한 4명이 갑자기 총기를 난사했다. 괴한들은 닥치는 대로 칼도 휘두르고 폭발물도 집어 던졌다. 이윽고 화염이 치솟았다. 공연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으로 바뀌었다. <모스크바 타임스> 등 현지 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이날 테러 공격으로 140명이 숨지고 360여 명이 다쳤다. 공연장은 이튿날 잿더미로 변했다.

새로운 무장세력 떠오른 IS-KP

사건 발생 직후, 용의자 추적에 나선 러시아 보안당국은 모스크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380㎞ 떨어진 우크라이나 국경지역 브랸스크에서 핵심 용의자 4명을 포함해 관련자 11명을 체포했다. 각종 무기류와 타지키스탄 여권 등도 압수했다. 푸틴 대통령은 용의자들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향했다는 점을 들어 ‘우크라이나 연계설’을 주장하며 보복을 다짐했다. 레오니트 슬루츠키 러시아 하원 국제관계위원장도 “잔혹한 키이우 정권이 테러범을 고용했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외곽에서 열린 대형 행사를 공격한 건 우리다.” 정작 범행을 자인하고 나선 건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아프가니스탄 지부 격인 ‘이슬람국가-호라산’(IS-KP)이었다. 이 단체가 운영하는 <아마크 뉴스>가 공개한 영상을 보면, 무장괴한들이 살상훈련을 하는 모습과 함께 체포된 용의자 가운데 1명이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러시아 외교부는 사건을 두고 “잔악한 테러 공격”이라고 슬그머니 말을 바꿨다.

‘호라산’은 이란 북동부와 아프가니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파키스탄·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일대를 부르는 옛 지명이자, IS-KP의 활동 무대다. 2015년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 단체는 아프간에서 알카에다와 연계된 탈레반에 맞서 싸우면서 세를 불렸다.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는 시리아 등 중동 분쟁지역에서 가장 격렬하게 맞선 경쟁세력이다. 외교안보 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2023년 3월23일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한 2021년 이후 최근까지 IS-KP가 아프간 전역에서 벌인 테러 공격은 모두 224차례에 이른다”고 전했다.

최근 몇 년 새엔 국경을 넘는 일이 잦아졌다. 파키스탄 일간 <익스프레스 트리뷴>은 2023년 1월9일치에서 이 단체가 2022년에만 페샤와르의 시아파 이슬람사원(모스크)을 겨냥한 자살폭탄 공격을 포함해 파키스탄에서 모두 23차례 테러를 저질렀다고 전했다. IS-KP 쪽은 2023년 4월과 5월 각각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에서 로켓공격을 벌였다고 주장했지만, 양국 정부는 이를 부인한 바 있다.

활동 반경도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2024년 1월3일 이란 중부 케르만시의 순교자 묘역에서 2020년 미국이 암살한 가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정예 쿠드스군 사령관의 4주기 추모식장에서 폭탄공격이 벌어져 80여 명이 숨지고 280여 명이 다쳤다. 이란은 미국이나 이스라엘을 의심했지만,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을 겨냥한 IS-KP의 테러였다. 수니파 극단주의 세력은 시아파를 ‘이교도’로 여긴다.

2024년 3월26일 나흘 전 테러 사건이 벌어진 러시아 모스크바주 외곽 크라스노고르스크의 ‘크로커스 시티홀’ 부근에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조문객들이 가져다 놓은 꽃다발이 산을 이루고 있다. EPA 연합뉴스

2024년 3월26일 나흘 전 테러 사건이 벌어진 러시아 모스크바주 외곽 크라스노고르스크의 ‘크로커스 시티홀’ 부근에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조문객들이 가져다 놓은 꽃다발이 산을 이루고 있다. EPA 연합뉴스


왜 러시아를 공격 목표로 삼았나

“IS-KP가 6개월 안에 아프간을 벗어나 아무런 사전 경고 없이 미국 또는 서방의 이익을 침해하는 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갖출 것이라고 평가한다. 자세한 내용은 비공개회의 때 보고하겠지만, 미국 본토를 공격하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본다.”

마이클 쿠릴라 미 중부군사령관은 2023년 3월16일 상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예상되는 테러 지역으로 “유럽을 포함한 유라시아”를 지목했다. 러시아 쪽은 부인하지만, 미국 정보당국이 2024년 3월 초 러시아 쪽에 테러공격 가능성을 경고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IS-KP는 왜 러시아를 공격 목표로 삼았을까? 튀르키예 육군 대령 출신인 군사평론가 무라트 아슬란은 3월23일 <알자지라>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IS-KP는 종교적 이념에 따라 공격 목표물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시리아에서 IS 소탕 작전을 벌였다. IS-KP 처지에선 미국처럼 러시아도 적성국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이란을 거쳐 모스크바까지 진출했다. 앞으로 다른 나라의 수도에서 또 다른 공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실제 옛 소련의 아프간 침공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IS-KP가 러시아를 겨냥할 ‘명분’은 숱하다. 푸틴 대통령 집권 초기 벌어진 체첸공화국 무슬림 탄압도, 러시아와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시리아의 밀접한 관계도 빌미로 삼을 수 있다. 최근 IS가 세력을 넓히는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선 러시아 용병업체 바그너그룹과 충돌하고 있다.

우크라 공세 명분 삼는 러, 미국도 안심 못해

푸틴 대통령은 ‘크로커스 시티홀’ 테러 사건을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세 강화의 명분으로 삼을 모양새다. 정작 IS-KP 쪽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십자군이 십자군과 벌이는 전쟁”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 단체는 2022년 8월3일 자체 발행하는 영문 잡지 <보이스 오브 호라산>에서 “지난 세기 미국은 이슬람 최대의 적이었다. 러시아도 다르지 않음이 확인됐다”고도 주장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아프간 수도 카불 주재 러시아대사관을 겨냥한 자살폭탄 공격이 벌어졌다. IS-KP 짓이었다.

소비에트를 몰락으로 이끌었던 아프간에서 미국 지원을 자양분 삼아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자라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발목 잡힌 지금, 새로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이 발호하고 있다. 미국은 웃기만 할 수 있을까? IS-KP가 뻗어나가는 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은 중국과 각각 477㎞·1063㎞·1782㎞의 광활한 국경을 맞대고 있다. 중국 무슬림 인구가 몰린 신장위구르(웨이우얼)자치구가 국경 너머다. 비상한 관심을 기울일 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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