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30일(현지시각), 독일 함부르크 법원이 96살의 할머니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름가르트 푸르히너라는 이 여성은 이날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의 소도시 이체호 지방법원에서 나치 전범 혐의로 재판을 받을 예정이었다. 요양원에서 살던 푸르히너는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이체호에서 50㎞나 떨어진 함부르크까지 도피했으나 당국에 붙잡혀 구금됐다. 앞서 그는 재판부에 고령과 건강을 이유로 궐석재판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정에서 피고인 없이 검찰이 기소 내용을 낭독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다. 재판은 10월19일로 연기됐다.
푸르히너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그단스크 인근의 슈투트호프 집단수용소에서 파울 베르너 호페 수용소장의 비서 겸 타자수로 일했다. 슈투트호프 수용소는 1939년 독일이 처음 국경 밖에 세운 강제수용소다. 나치 친위대 슈츠슈타펠(SS)이 운용했다. 이곳에서 1939년부터 1945년 사이 유대인, 폴란드인, 소련군 포로 등 6만5천여 명이 학살됐다. 푸르히너는 1만1412건의 살인을 조력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당시에는 18~20살 어린 나이였다는 이유로 소년법원에 넘겨졌다. 독일 검찰은 푸르히너가 호페 소장의 학살 명령을 타이핑해 문서로 작성한 만큼 수용자들의 학살 사실을 알고도 방조했다고 본다.
독일의 집요한 나치 전범 추적과 재판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나치가 대량 학살과 반인도주의적 범죄를 저지른 1940년대 초반으로부터 80여 년 세월이 흐른 까닭에, 단죄받을 인물 대다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도 모두 90~100살의 초고령 노인이다. 그럼에도 독일 검찰과 사법부는 법적 심판에 예외를 두지 않는 단호한 태도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광기와 범죄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고 그 비극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마침 2021년 10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종료된 지 75주년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연합국은 종전 직후인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10월1일까지 1년 동안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전범에 대한 국제 군사재판을 열었다. 모두 24명이 기소돼 12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 중 1명은 재판 전에 피살됐으나 궐석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독일제국 원수를 지낸 헤르만 괴링은 교수형 집행 전날 자살했다. 사형 판결을 받지 않은 나머지 12명 가운데 4명은 종신형, 3명은 징역 10~20년 중형을 선고받았다. 5명은 무혐의로 석방(3명)되거나 재판 전에 자살(1명), 검찰 쪽의 착오로 미결수(1명)로 남았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75년 전에 끝났지만, 패전국이자 전범국인 독일의 전후 과거사 청산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96살 푸르히너에 대한 재판은 최근 몇 년 새 독일 사법부가 이어가고 있는 초고령 전범들에 대한 단죄의 한 사례일 뿐이다. 올해에만 4명이 기소됐다. 1명이 1심에서 유죄 판결(집행유예형)을 받았으며, 2명은 재판이 진행 중이다.
3518명 살해 공모, 5230명 살인 방조푸르히너 이외에 올해 기소된 3명의 재판 상황은 다음과 같다.
2021년 10월7일, 브란덴부르크주 노이로핀 법원은 요제프 S 라는 이름의 100살 남성에 대한 재판을 개시했다. 피고는 20대 초반이던 1942~1945년 베를린 인근 작센하우젠 집단수용소에서 나치 친위대 소속 경비병으로 있으면서 재소자 3518명에 대한 “총살형과 치클론B 독가스 살해를 알면서도 기꺼이” 도운 혐의로 기소됐다. 독일 법원은 피고가 고령이지만 하루 2시간30분가량의 재판을 받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요제프에 대한 재판은 2022년 1월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작센하우젠 수용소에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10년 동안 독일 정치범, 소련군 포로, 폴란드인, 유대인, 동성애자 등 약 20만 명이 수용됐으며 그 중 10만 명이 학살과 학대로 목숨을 잃었다.
2021년 7월, 함부르크 법원은 93살 노인이 된 전 나치 친위대원 브루노 다이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1944~1945년 슈투트호프 수용소 감시탑 경비병이던 브루노 다이는 5230명의 살인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나이가 10대 중반인 까닭에 재판도 소년법원에서 진행됐다. 다이는 최후진술에서 “증인들의 진술에 충격받았다. 이 광란의 지옥을 겪은 사람들에게 사과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재판이 있기 전까지는 그 잔혹 행위의 심각한 규모를 알지 못했다”고 항변했다.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형을 선고했다.
2021년 3월엔 이름과 성의 첫 자만 공개된 96살의 전 나치 친위대원 하리 S.가 독일 서부 부퍼탈 법원의 피고인석에 섰으나 고령을 이유로 재판이 중단됐다. 피고는 폴란드 슈투트호프 수용소 경비병이던 1944~1945년 재소자 600여 명을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로 이송하는 임무를 수행한 ‘살인 공모’ 혐의로 기소됐다. 법원은 “피고인의 신체 상태가 자신을 이성적으로 변호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재판을 중단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피고인이 수용소 경비원으로서 대량 학살의 범위와 규모를 인식했을 것”이라며 “그가 유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피고인들이 워낙 고령인 까닭에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세상을 떠난 사례도 많았다. 2016년 6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법원은 전 나치 친위대원 라인홀트 하닝(당시 94살)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하닝은 13살 소년이던 1934년 나치의 청소년 조직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한 데 이어 1940년 나치 친위대에 자원 입대했으며, 1942~1944년에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했다. 검찰은 하닝이 수용소에 끌려온 유대인 중 노동이 가능한 사람과 가스실로 보낼 사람을 구분하고, 주기적으로 집행된 총살과 수용자 굶기기에 협력한 혐의로 기소했다. 하닝은 “나치의 범죄를 알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을 자책한다”며 뒤늦게 반성의 뜻을 밝혔지만, 불구속 상태에서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2017년 1월 세상을 떠났다.
2015년에는 오스카어 그뢰닝(당시 94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경비원 시절 유대인 30만 명의 학살을 방조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 중이던 2018년 3월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뢰닝은 21살이던 1942년 독일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다 나치 친위대에 자원입대해 아우슈비츠에 배치됐다. 그는 수용자들의 소지품을 압수하고 금품 액수를 계산해 베를린의 친위대 본부로 보내는 역할을 맡아 ‘아우슈비츠의 회계원’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뢰닝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2017년 독일 연방고등법원은 그의 항소를 기각했다. 다시 헌법재판소에 상고했으나, 2018년 1월 재판부는 하급심 판결을 유지했다. 그뢰닝은 최종 확정판결을 받고도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내며 복역을 피하다 두 달 뒤 천수를 누리고 숨졌다.
최근 몇 년 새 독일 사법부가 법정에 세운 나치 전범 피고인들은 학살을 명령하거나 적극 집행한 게 아니라 단순 감시, 방조, 묵인, 지원 업무 등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행위로 기소돼 90살이 넘은 나이에 재판을 받았다. 전후 독일 사법부에선 나치 단순 조력자들의 행위에 대한 사법적 해석과 유죄 판단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꼭 10년 전 뮌헨 법원의 판결은 나치 범죄로 기소될 수 있는 범죄행위의 범위를 크게 넓혀놓았다.
2011년 5월, 뮌헨 법원은 2차 대전이 끝난 뒤 미국으로 이주해 살다가 나치 전범 혐의로 기소된 이반 데먀뉴크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데먀뉴크는 1943년 폴란드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2만8천여 명의 수용자 학살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됐다. 데먀뉴크는 1920년생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독소 전쟁에 징병됐다 독일군에 포로가 된 뒤 나치 협력자로 변신했다.
데먀뉴크는 1986년 이스라엘의 추적망에 걸렸고 1988년 이스라엘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기사회생했다. 1993년 이스라엘 대법원이 데먀뉴크가 ‘(잔혹한) 이반 대제’로 불린 수용소 경비원과 동일인이 아니라고 판단해 무죄 석방한 것. 그러나 이후 추가 증거가 드러나면서 2009년 독일로 강제송환됐다. 데먀뉴크는 2011년 독일 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자신이 독일군 포로 신분으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학살의 실상을 알지 못했다고 항변했다. 랄프 알트 판사는 “수용소의 모든 간수는 자신이 대량 살인이 유일한 목적인 조직의 일부라는 것을 알았다”며 유죄라고 판결했다. 데먀뉴크는 고등법원에 항소했으나 이듬해 91살 나이로 숨지면서 사건은 종결됐다.
뮌헨 법원의 데먀뉴크 재판은 향후 나치 부역 혐의의 유죄 여부에 대한 독일 사법부 판단에 중대한 변화를 예고한 사건이었다. 이후 10년 동안 독일에선 90살 이상 초고령자 피의자가 잇따라 기소돼 법정에 섰다. 100살 노인을 기소한 검사는 “우리는 지금 고령의 피고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고 상황이 쉽지 않다. 그러나 살인과 살인 방조에는 공소시효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2021년 2월 <뉴욕타임스>는 “독일인 일부는 20세기 최악의 범죄에 일조한 자들에 대한 정의를 아무리 늦더라도 실현하려는 자국의 시도에 반대해왔지만, 다른 일부는 새로운 극우파의 등장이 나치 전범들에 대한 기소를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고 전한 바 있다. 독일 브란덴부르크기념재단의 악셀 드레콜 이사는 “이런 사건들은 맥락적으로뿐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하다. 독일의 사법제도가 나치 범죄를 심각하게 여기며 계속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독일의 단호한 나치 전범 처벌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응징뿐 아니라 부끄러운 과거를 외면하지 않고 공소시효 없이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도 1948년 제헌의회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특별법을 제정해 친일파 처벌을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민심 혼란을 구실로 내세운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반공을 앞세운 친일파들의 집요한 훼방과 폭력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표류했다. 1949년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를 모두 해체해 특별법을 무력화한 데 이어,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2월에는 아예 반민특위법을 폐지해버렸다. 이후 친일파들은 한국전쟁과 첨예한 냉전·분단 체제를 거치면서 한국사회 전반의 기득권 지배 세력으로 녹아들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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