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사우디-미국 특별한 동맹 73년

1945년 ‘얄타’ 이후 원유–군사 ‘거래 원칙’…

사우디, 지난해 공식 대미 로비 접촉만 2500건
등록 2018-10-27 15:57 수정 2020-05-03 04:29
2017년 5월20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수도 리야드의 왕궁 앞에서 열린 전통 환영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7년 5월20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수도 리야드의 왕궁 앞에서 열린 전통 환영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의 나라 땅에서, 멀쩡히 자기 나라 영사관에 들어갔던 비판적 언론인이 실종됐다. 며칠이 지나서야 그의 사망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이어 고문을 당했고, 무참히 살해됐으며, 주검은 토막 났다는 살풍경이 전해진다. 전세계 언론이 속속 관련 소식을 타전한다.

사건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끝까지 부인하던 해당국 정부는 그의 사망 사실을 결국 공식 확인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은 첩보영화를 무색하게 한다. 카슈끄지의 비극적 죽음만큼이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비정한 현실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사우디 언론인 죽음, 첩보영화 무색</font></font>

자말 아흐마드 카슈끄지는 1958년 10월13일 사우디의 이슬람 성지 메디나에서 태어났다. 터키계였던 그의 조부 무함마드 카슈끄지는 사우디 여성과 결혼해 메디나에 정착했다. 그는 사우디를 건국한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 사우드의 주치의를 지냈다. 카슈끄지는 유력한 집안 출신이다.

사우디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카슈끄지는 미국으로 유학해 1982년 인디애나주립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곧바로 귀국한 그는 영자 신문 를 시작으로 여러 매체를 거치며 기자 경력을 쌓아갔다. 이어 1990년부터 1999년까지 중동 지역 권위지 의 특파원으로 아프가니스탄·알제리·레바논 등 중동 일대 분쟁 지역을 누볐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카슈끄지는 1999년 사우디에 본사를 둔 중동권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영자 신문 의 부편집장이 되었다. 이어 2003년엔 개혁 성향 일간 신문 의 편집국장에 선임됐지만, 편집 방향을 두고 논란이 일면서 2개월 만에 하차했다. 그는 2007년 다시 편집국장으로 복귀했다가, 같은 이유로 3년 만에 다시 해고되기도 했다.

카슈끄지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우호적이던 사우디 왕실의 눈초리가 서서히 달라졌다. 2010년 6월 알왈리드 빈 탈랄 왕자는 카슈끄지에게 에 필적할 만한 새로운 24시간 뉴스채널 창사 책임을 맡겼다. 긴 준비 기간을 거쳐 2015년 2월1일 바레인의 마나마에서 이 첫 방송을 시작했다. 개국 11시간도 안 돼 사우디 왕실은 방송 송출 중단을 명했다.

이후 사우디 정부는 노골적으로 카슈끄지의 활동을 감시했다. 트위터 등을 통한 의견 표시도 막았다. 결국 그는 2017년 6월 사우디를 떠나 미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사실상 ‘망명’이었다. 그해 9월부터 미국 일간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중동 현안과 사우디 국내 정치 등에 대한 칼럼과 인터뷰에 적극 나서는 한편, 기회 있을 때마다 사우디 왕실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서슴없이 밝혀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유가족 출국 금지에 미국 침묵</font></font>
사우디아라비아의 비판적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지난 3월 비공개 언론 인터뷰를 하면서 밝게 웃고 있다. 10월2일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 서류를 떼러 갔던 그는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의 비판적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지난 3월 비공개 언론 인터뷰를 하면서 밝게 웃고 있다. 10월2일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 서류를 떼러 갔던 그는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연합뉴스

지난 10월2일 카슈끄지는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섰다. 약혼녀와 결혼하는 데 필요한 이혼 사실 증명 서류를 떼기 위해서였다. 그가 들어가는 장면은 폐회로텔레비전(CCTV)에 담겼지만, 그가 나오는 장면은 없었다. ‘실종’이었다. 그의 사망설이 제기됐고, 터키 당국이 사우디 쪽과 함께 영사관을 조사했다. 터키 당국은 ‘고문-피살-주검 훼손’설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애초 사우디 쪽은 강력 반박했지만, 전세계 언론이 앞다퉈 소식을 전하면서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동맹국인 미국마저 사우디 쪽에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하자, 사우디 왕실은 사건 발생 18일 만에야 카슈끄지의 사망 사실을 인정했다. 그가 영사관 안에서 우발적으로 몸싸움을 벌이는 중에 목숨을 잃었으며, 관련자를 모두 체포해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발표한 게다. 미국 쪽에선 기다렸다는 듯 환영 메시지가 나왔다. 아무도 믿지 못할 사우디 왕실의 해명에 미국 쪽 환영은 이쯤에서 덮자는 제스처나 마찬가지였다.

사우디와 미국의 뿌리 깊은 ‘각별한 관계’를 빼놓고서는 이를 제대로 일해할 수 없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에 즈음한 2015년 1월27일, 가 두 나라의 첫 ‘정상회담’에 대해 보도한 내용을 들여다보자.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크림반도 남단 휴양도시 얄타에서 전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미·영·소 정상이 모였다. 회담을 마무리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귀국에 앞서 중동과 아프리카의 주요 지도자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대상자는 이집트의 파루크 국왕과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국왕, 그리고 신생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아지즈 사우드 국왕 등으로 정해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9·11 테러 이후 대미 로비 정점</font></font>

루스벨트 대통령과 사우드 국왕의 만남은 1945년 2월14일 이집트 수에즈운하에 정박한 미 해군 ‘유에스에스(USS) 퀸시’호 선상에서 이뤄졌다. 사우드 국왕은 이날 만찬용으로 쓸 양 8마리를 챙겨간 것으로 전해진다. 회담은 유쾌하게 진행됐다. 두 정상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호감을 표했다. 이 자리에서 사우디와 미국의 미래 관계가 만들어졌다.

1932년 건국한 사우디는 이란·요르단 등 역사가 긴 주변국에 둘러싸인 신생국가였다. 안보 불안을 해소해야 왕정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 미국은 사우디에 군사원조와 훈련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최대 산유국으로 떠오른 사우디는 ‘합리적 가격’에 원유를 공급해주기로 합의했다. 전형적인 안보와 경제의 교환이었다. 이후 사우디 국왕이 5차례 바뀌고, 미국 대통령이 13차례 바뀌었지만, 루스벨트 대통령과 사우드 국왕이 73년 전에 정한 ‘거래 원칙’은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9·11 동시테러로 사상 최악의 상황이었다. 테러에 연루된 19명 가운데 15명이 사우디 국적자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사우디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이 격해졌다. 사우디 정부의 대미 로비가 정점으로 치달은 것도 이 무렵부터다. 미국 시사지 은 2010년 12월 “21세기 들어 지난 10년 동안 사우디 쪽이 자국에 대한 반감을 무마하기 위해 약 1억달러 규모의 로비자금을 쏟아부으며 여론전을 펼쳤다”고 전한 바 있다.

이슬람 수니파의 수장을 자임하는 사우디 최대의 경쟁자는 이슬람 시아파의 본산인 이란이다. 비교적 신생국인 사우디는 중동 친미 왕국의 대표 주자다.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페르시아 왕국의 후예인 이란은 반미 이슬람 공화국이다. 사우디에 이란이 눈엣가시인 것도 이 때문이다.

2015년 7월14일 오랜 협상 끝에 경제제재 해제와 이란의 핵개발 프로그램 포기를 맞교환하는 것을 뼈대로 한 핵협정(포괄적 공동계획)이 타결됐다. 이란과 미국을 포함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독일과 유럽연합까지 참여한 협상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트럼프 취임 첫 방문국이 사우디</font></font>

사우디 쪽은 강력히 반발했다. 2015년 1월 방문 때 오바마 대통령을 극진히 환대했던 사우디 왕실은 이듬해 4월 오바마 대통령이 다시 방문했을 때 눈에 띄게 냉담한 반응을 보여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해 11월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당선된 직후, 사우디 정부가 공세적 대미 로비전에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미국 국제정책센터(CIP)가 외국 로비스트 등록법(FARA)에 따라 공개된 내용을 종합해 지난 10월4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사우디 정부는 오바마 행정부 마지막 해인 2016년 1천만달러를 로비에 썼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 출범 첫해인 지난해에는 2730만달러까지 로비 예산을 늘렸다. 이 자금에는 각종 대학과 연구단체 등에 직접 기부한 자금은 포함되지 않는다. 사우디의 대미 로비 자금 총액은 확인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단체는 “사우디 정부 쪽의 등록된 로비스트가 상·하 양원과 백악관, 언론사와 저명한 싱크탱크 등과 접촉한 사례는 지난해에만 2500건이 넘는다”며 “이 과정에서 이들이 상·하원 의원들에게 지원한 정치자금도 40만달러에 이른다”고 전했다.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2017년 3월께, 사우디 왕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었다. 당시 사우디가 2년 넘도록 예멘의 후티 반군과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군사원조와 무기 수출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 미 상원은 사우디에 대한 군사원조와 고성능 폭탄 등 미국산 무기의 다량 수출을 중단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초당적 결의안 채택을 검토하고 있었다.

사우디 쪽은 20곳 넘는 로비업체와 계약을 맺고 있었다. 이 가운데 ‘브라운스테인 하이야트’에 소속된 베테랑 로비스트가 있었다. 존 베이너 전 미 하원의장 보좌관 출신으로 2000년 대선 때 조지 부시 후보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을 지낸 마크 램프킨이다. 국제정책센터는 자료에서 “램프킨은 각 상원의원 사무실에 적어도 20차례 이상 전화를 걸었다. 또 통화를 한 상원의원실 일부에 2천달러씩 정치자금을 후원하기도 했다. 이 업체는 지난해 사우디 정부로부터 50만달러가량의 수입을 올렸다”고 전했다. 상원의 결의안은 결국 부결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뒤 처음 방문한 외국도 사우디였다. 살만 왕세자와 각별한 사이로 알려진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의 제안에 따른 선택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17년 5월 트럼프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앞두고, 사우디 내무부는 애리조나주에 본사를 둔 ‘소노란 정책 그룹’이란 소규모 로비회사와 계약을 했다. 총 계약 금액은 540만달러로 기업 규모에 견줘 이례적으로 컸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트럼프 측근 회사와 로비 계약</font></font>

주로 소규모 정보기술(IT) 기업 홍보에 치중하던 이 업체가 사우디 정부의 눈에 든 것은 2016년 대선 직후 사장으로 영입된 스튜어트 졸리란 인물 때문이다. 졸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위해 2800만달러 규모의 정치자금을 모았고, 선거운동본부 현장 책임자로 활동한 바 있다. 이 업체 소유주인 로버트 스타이크는 2017년 1월20일 등과 한 인터뷰에서 “(또 다른 고객인) 뉴질랜드 정부 쪽이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를 하고 싶어 한다고 졸리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30분도 안 돼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더라”고 말했다.

사우디 왕실은 10월23일 카슈끄지의 유가족을 직접 찾아 조의를 표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카슈끄지의 아들 살라가 손을 맞잡은 모습이 전세계에 타전됐다. 사우디 왕실은 조문 직후 카슈끄지의 유가족 전원에게 출국 금지 조처를 내렸다. 국제 인권단체들이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말이 없다. 항상 이런 식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font color="#C21A1A">http://bit.ly/1HZ0DmD</font>
카톡 선물하기▶ <font color="#C21A1A">http://bit.ly/1UELpok</font>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