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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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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 가는 길, 거칠 게 없어라

JSA 초소 철수, 문 대통령 촘촘한 외교 행보,

대북제재 완화 등 ‘최후의 평화적 해결’ 위한 힘찬 발걸음
등록 2018-10-27 14:03 수정 2020-05-03 04:29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라. 두려워하지 마시라.’ 10월19일 로마 교황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과 환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라. 두려워하지 마시라.’ 10월19일 로마 교황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과 환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 충돌(한국전쟁)을 정지시키기 위하여서,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한반도)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으로….”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12분 정각에 체결돼 12시간 뒤인 이날 밤 10시12분부터 발효된 한국전쟁 정전협정 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65년 세월이 흘렀다. 크고 작은 ‘충돌’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적대행위’와 ‘무장행동’도 멈추지 않았다.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은 어떤가? 남도, 북도 정전협정을 지키지 않았다.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2㎞씩 후퇴함으로써 적대 군대 간에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여, 이를 완충지대로 함으로써 적대행위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한다.”(정전협정 제1조 1항)

65년 만에 ‘비무장’ 된 비무장지대
2018 남북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지난 4월26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무장한 남북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남북은 10월25일 오후 이곳에서 초소와 병력·화기 철수를 마쳤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8 남북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지난 4월26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무장한 남북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남북은 10월25일 오후 이곳에서 초소와 병력·화기 철수를 마쳤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비무장지대’는 말 그대로 무장을 하지 않는 곳을 뜻한다. 지난 65년 세월 한반도의 남과 북을 가르는 비무장지대를 일컬어 외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중무장된 곳”이라고 했다. 비무장지대는 남과 북의 적대감이 응축된 공간이었다. 남도, 북도 정전협정을 지키지 않았다.

“쌍방은 모두 비무장지대 내에서, 또는 비무장지대로부터, 또는 비무장지대에 향하여 어떤한 적대행위도 감행하지 못한다.”(정전협정 제1조 6항)

“본 정전협정 중에 따로 규정한 것을 제외하고,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72시간 내에 그들의 일체 군사 역량 보급 및 장비를 비무장지대로부터 철거한다.”(정전협정 제2조 13항 ㄱ)

체결 65주년을 맞도록 지켜지지 않았던 정전협정이 이행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4월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내놓은 판문점선언 제3조 3항에서 이렇게 합의했다. 정전협정의 고갱이인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을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디딘 게다.

“남과 북은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수명이 다해가는 시점에야 정전협정이 충실히 이행되기 시작한 것은 상징적이다. 남북과 유엔사는 지난 10월22일 제2차 3자 협의체 회의를 열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초소와 병력·화기를 10월25일까지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북쪽 초소 5곳과 남쪽 초소 4곳의 철수 작업이 마무리됐다. 정전협정에 따라, 비무장지대의 실질적 비무장화가 시작된 셈이다.

앞서 남북은 9월19일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체결된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에서 공동경비구역을 찾는 민간인과 관광객이 남북 양쪽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합의했다. 비무장화 조처가 마무리되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누구든 공동경비구역을 출입할 수 있게 된다. 적대의 세월을 넘어설 ‘작은 평화’의 공간이 열리고 있다.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라. 두려워하지 마시라.”

10월18일 바티칸 교황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프란치스코 교종(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 중인 한국 정부의 노력을 강력 지지한다”고도 덧붙였다. 문 대통령이 전한 김정은 위원장의 방북 초정에 대해서도 “(북한의) 초청장이 오면 무조건 응답할 것이고, (북한에) 갈 수 있다”고 그 자리에서 수락했다.

“두려워 마시라” 교황의 지지
프랑스를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부부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문 대통령은 한-프 정상회담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유예·완화를 공식 제안했다. 연합뉴스

프랑스를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부부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문 대통령은 한-프 정상회담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유예·완화를 공식 제안했다.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북한 방문을 제안한 것은 한반도 정세를 ‘불가역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하나다. 12억 명의 신자를 거느린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의 방북만으로도 한반도 정세가 뒷걸음질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설령 북-미 협상이 삐걱대더라도 말이다. 문 대통령은 프란치스코 교황 면담에 앞서 교황청 기관지인 에 보낸 특별기고에서 “교황청과 북한의 교류가 더욱 활성화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교황 방북 수락 말고도 문 대통령은 10월12~21일 유럽 순방길에서 촘촘하게 맞물린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외교적 행보를 보였다. 한반도 정세를 더욱 적극적으로 이끌어나가겠다는 의지를 국제사회에 드러냈다고 평가할 만하다.

“북한이 핵을 내려놓으면 내려놓을수록, 북한이 핵에 의존하지 않고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신뢰를 줄 필요가 있다. 북한의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왔다는 판단이 선다면, 유엔 제재의 완화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더욱 촉진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10월15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파리 엘리제궁에서 한 정상회담에서 작심한 듯 이렇게 말했다. 대북제재 완화·유예가 ‘협상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은 이어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라는 믿음을 국제사회가 줘가면서 북한이 빠르게 비핵화를 할 수 있게 이끌어야 한다”며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계속해나갈 수 있도록, 더 빠른 속도로 진행해나가도록 유엔 안보리에서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유예·완화는 그간 ‘금기어’처럼 여겨졌다. 지난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미국은 안보리 대북제재를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북한은 이런 미국의 행보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정상회담 이후에도 북-미 협상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다. 그저 본격적인 협상을 앞둔 줄다리기 성격의 문제로 볼 게 아니다. 자칫 협상의 판을 아예 엎어버리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솔솔 피어오르는 대북제재 완화 목소리

올해 들어 정세가 바뀌면서, 안보리 차원에서도 여러 차례 대북제재 유예·완화 문제가 논의된 바 있다. 그때마다 강력하게 반발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북-미 협상 수준을 뛰어넘어 달음질하는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유엔사령부를 내세워 무산시킨 남북 철도 공동점검 사례가 대표적이다. 앞서 정부는 8월23일 기관차에 객·화차 6량을 연결한 남쪽 열차를 서울역에서 신의주까지 운행하면서 경의선 북쪽 철도 구간 상태를 남북이 공동으로 점검할 계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대북제재 완화’를, 그것도 정상외교 무대에서 공식 거론한 것은 이례적이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 이견이 있다는 점을 굳이 감추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나아가 미국 쪽에 안보리 대북제재 유예·완화 카드를 생각해볼 때가 됐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찰떡 공조’를 강조해온 그간의 대미 외교와는 결이 전혀 달라졌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이 대북제재 유예·완화 발언을 내놓은 시점과 무대도 상징적이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자리였다. 문 대통령은 10월19일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참석차 벨기에를 방문해서도 비슷한 행보를 이어갔다. 역시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영국과 국제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일의 정상을 잇따라 만나 대북제재 완화 필요성을 재차 강조한 게다.

“북한은 지난해 11월 이후 핵과 미사일 실험을 중단했고,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동창리 미사일 실험장과 발사대 폐기 약속에 이어 미국의 상응 조치시 플루토늄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 핵물질을 만들 수 있는 영변 핵시설 폐기 용의까지 밝혔다. 적어도 북한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비핵화를 진척시킬 경우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나 제재 완화가 필요하고, 그런 프로세스에 대한 논의가 유엔 안보리 차원에서 필요하다.”

문 대통령은 10월19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한 정상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전했다. 같은 날 열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한 정상회담에서도 문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한 지지를 호소하며 숨가쁜 정상외교를 이어갔다.

5개 안보리 상임이사국 가운데 중국과 러시아는 이미 여러 차례 안보리 회의에서 “변화된 정세에 맞춰 대북제재를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남북협력 사업에는 ‘제재 유예’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프랑스와 영국 정상을 만나 문 대통령이 직접 ‘대북제재 유예·완화’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남은 상임이사국은 미국뿐이다.

7박9일간의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뒤 처음으로 국무회의를 주재한 10월23일, 문 대통령은 ‘9월 평양 공동선언’과 ‘남북 군사 분야 이행합의서’를 비준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길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 위기 요인을 없애 우리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각 부처에 차질 없는 합의서 이행을 주문했다. ‘외풍’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일종의 결기가 느껴진다.

기업인들 잇따른 개성공단 방문·점검

“정부는 개성공단에 투자한 기업인들의 자산 점검을 위한 방북 문제를 북한과 협의 중에 있다.” 이튿날인 10월24일 백태현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이렇게 밝혔다. 백 대변인은 이어 “우리 기업인들이 개성공단에 소유한 공장이라든지 시설들에 대해 자산 점검을 해보고 싶다는 요청이 거듭 있었다”며 “정부도 그런 기업인들의 재산권 보호 차원, 자산 점검의 필요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금 현재 남북 간에 협의 중인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이어진 장거리미사일 발사 시험을 이유로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을 전격 폐쇄한 것은 2016년 2월10일이다. 개성공단 기업인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3차례를 포함해 그간 모두 6차례나 개성공단 방문·점검을 위한 방북 신청을 한 바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통일부는 매번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대북제재 공조’는 일종의 ‘마법의 주문’이었다.

기업인들의 개성공단 방문·점검은 10월30일부터 11월1일까지 하루에 50명씩 사흘로 나눠 이뤄질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9월14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식 참석을 위해 개성을 방문했던 기업인들은 “외관상 공단 관리가 잘돼 있는 것 같더라”고 전한 바 있다.

공동연락사무소 개소에 따라 상주 인력에게 필요한 생활용수와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정부는 개성공단 정수장을 재가동했다. 뒤늦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대북제재 위반’이란 주장이 빗발쳤다. 당시 통일부 쪽은 “연락사무소의 원활한 운영과 상주 인력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북한에 경제적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제재의 목적을 훼손하지도 않고, 개성공단 재가동을 위한 사전 작업도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제는 멈추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래야 ‘마법의 주문’이 풀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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