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1일 미얀마(버마)의 옛 수도 랑군에서 딴다(46)가 남편의 강제 실종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할 때만 해도 다들 ‘설마’ 했다. 딴다는 남편 아웅나잉(49·예명 ‘파 지’)이 9월30일 몬주 짜이마요 타운십에서 군경 합동 무리에 끌려간 뒤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지역 경찰서는 물론 소수민족 정당인을 대동해 군부대 등으로 수소문했지만 허사였다. 남편이 208부대(208LIB)에 갇혀 있을 거라고만 감 잡았을 뿐이다.
26년 전 88항쟁 당시 아웅산 수치의 보디가드이기도 했던 아웅나잉은 국경지대 반군과 정부군의 교전을 취재하고 등 버마 언론에 기고해온 프리랜서 기자다. 9월 말에도 카렌반군 중 하나인 민주카렌불교도군(DKBA)과 정부군 간의 교전을 취재하고 이동 중에 연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DKBA와 교전을 벌인 정부군은 208부대, 아웅나잉을 연행한 이들은 204부대원이지만 불려간 곳은 208부대였다. 그날 이후 언론과 시민사회는 아웅나잉 찾기에 나섰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 건 10월24일 오전, 버마기자협회가 군 최고사령관인 민 아웅 라잉 장군의 익명 비서로부터 전자우편 성명을 받았다고 밝히면서다. 군 성명에 따르면 “10월4일 구금 중에 있던 아웅나잉이 탈출을 시도하며 군의 무기를 갈취하려다 총에 맞고 사망했다”고 한다. 성명은 “부대에서 800마일 떨어진 슈웨와총 마을에 아웅나잉을 잘 묻어줬다”고 덧붙였다. 한 달 동안 애타게 찾던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다가 ‘매장 끝’이라니, 증거를 인멸한 군의 성명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등뼈가 다 으깨질 만큼 고문당하다 사망”“현지 주민들에 따르면 군은 아웅나잉을 사원에서 최소 이틀간 고문했다. 등뼈가 다 으깨질 만큼 고문당하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군인들이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
지역 사정을 잘 아는 킨 마웅(가명)은 아웅나잉이 고문으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군의 성명은 또 아웅나잉이 DKBA 정치국인 ‘클로투보 카렌조직’(KKO·Klohtoobaw Karen Organization)의 ‘통신 담당 대위’라고 단정했다. 아웅나잉을 전시 보호 대상인 기자로 보지 않고 적군 소속으로 규정한 건 살해를 조금이라도 합리화하겠다는 ‘꼼수’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DKBA 소 론론 소장은 데모크라틱보이스오브버마(DVB)와의 인터뷰에서 군의 주장을 반박했다.
“우리는 많은 기자들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아웅나잉 역시 보도에 필요하다며 이런저런 정보를 물어볼 때 접촉한 적이 있어 알고 있을 뿐이다.”
군의 주장대로 아웅나잉이 DKBA의 정치국 대위라 해도 ‘정치국’ 소속인 그는 비전투원 신분이다. 게다가 버마는 전쟁포로에 대한 인간적 대우를 명시한 ‘전쟁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정’에 사인한 196개 국가 중 하나다. 군이 어떤 변명을 내놓아도 아웅나잉 사망에 대해 면죄부를 갖기 어렵다.
정정으로 충분한 기사를 ‘국가모독’ 선고버마에서 기자가 살해된 건 처음이 아니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언론인보호협회(CPJ)에 따르면, 1999년에도 버마 기자 두 명이 군 요원들에게 고문당한 뒤 사망했다. 그리고 2007년 9월27일, 군부독재에 맞서 승려와 대중 수십만 명이 거리를 메웠던 ‘샤프란 혁명’ 당시 시위를 취재하던 일본 기자 나가이 겐지가 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쓰러진 뒤에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나가이의 모습은 많은 이들 사이에 회자된 바 있다. 그러나 곧 군인 한 명이 나가이의 카메라를 들고 사라졌다. 정황이 담겨 있을 증거물인 나가이의 카메라가 그날 이래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는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는 이가 없다. 나가이의 죽음 역시 진상 규명 한 글자 없이 7년의 세월에 묻혀갔다. 그리고 올해 9월27일, 나가이의 누이 오가와 노리코는 나가이의 카메라를 돌려달라며 다시 한번 버마 정부에 요청했다. 응답이 있을 리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을 주무르는 전·현직 장군들에게 ‘증거 보전’이란 없다.
사실 버마 안팎으로 부는 개혁 바람이 유일하게 의미를 보여온 건 정치범 석방과 언론 자유 ‘개통’이었다. 군복을 벗고 준민간정부로 출범한 테인 세인 정부는 12명의 기자를 석방하고 사전 검열을 폐지하며 국제사회로부터 환호에 가까운 박수를 받았다. 그 유일한 개혁상이 최근 빠르게 일그러지고 있다.
10월17일에는 소속 기자 세 명과 발행인 두 명이 ‘국가모독’을 금하는 형법 제505(b)조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았다. 문제가 된 보도는 7월8일치 1면 기사, 즉 아웅산 수치와 소수민족 지도부가 테인 세인 정부를 대체하기 위한 과도정부를 꾸렸다는 내용이다. 정정이나 반론 요구로 충분한 다소 어리숙한 기사를 국가모독급으로 키운 셈이다.
7월10일에는 소속 기자 네 명과 저널 최고경영자(CEO) 등이 중노동이 포함된 10년형을 선고받았고 10월2일 7년형으로 감형받았다. 은 1월25일 마궤 지방에 위치한 군사시설에서 화학무기를 만든다는 의혹을 심도 있게 다뤘다. 이들을 처벌한 근거 법안은 1923년 버마가 영국령 인도에 속했을 당시 만들어진 ‘공공기밀 누설에 관한 법’(Official Secrets Act)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버마가 개혁 과정에서 반드시 건드려야 하지만 전혀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면 바로 군이다. 소수민족 문제나 무장단체 그리고 정권 교체까지도 모두 군을 건드리는 민감한 이슈로 엮여 들어간다. 기자 아웅나잉이 살해당한 것으로 확인된 뒤 들끓고 있는 여론이 심상치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분노한 시민과 누리꾼들은 그동안 ‘정부’에 국한돼온 비판의 화살을 ‘군’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군복만 벗은 테인 세인 정부의 ‘군사적’ 본질을 뼈저리게 확인하고 있다.
진짜 수장인 ‘군’과의 싸움은 이제 시작“민주화 이행기에 있다는 과장된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는 도덕도 정의도 법치도 없습니다. 우리는 저 군인들이 멋대로 누구나 살해할 수 있는 시스템과 그래도 된다는 정신머리를 종식시키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10월26일 랑군 시청 주변에 모여든 수백 명의 시위대 앞에 선 ‘88세대’ 민코 나잉은 88항쟁 당시처럼 군중을 달궜다. 시위를 조직한 ‘제너레이션 웨이브’ 활동가 모 뜨웨이에 따르면 40개 시민단체와 일반 시민들이 참여한 이날 시위는 허가도 받지 못했다. 경찰이 출동해 막으려 했지만 시위는 이어졌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진상조사특위가 이끄는 투명한 수사가 우리의 요구다. 무책임하고 잔인한 행위에 면죄부를 누려온 군인들을 더 이상 봐줄 수 없다.”
모 뜨웨이는 정부는 물론 군 당국에도 항의 성명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1962년 쿠데타 이래 누구라도 고문하고 총살해온 권력, 개혁기라지만 권력의 진짜 수장인 ‘군’과의 지난한 싸움이 이제 비로소 시작된 듯하다. 기자 아웅나잉이 군에 살해된 사실이 밝혀진 뒤 전 학생운동가 모티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다.
“52년이면 충분하다.”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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