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은 참아왔다. 주먹질에 주먹질로 맞서지는 않았다. 지금 이 시간부터 경찰의 대응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지난 6월12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 문제(시위)를 24시간 안에 매듭짓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지난 5월28일 이스탄불 중심가 탁심 광장의 게지 공원에서 열린 평화로운 집회를 강경 진압하면서 촉발된 터키의 반정부 시위 사태가 기로에 선 모양새다.
그간 에르도안 총리는 시위대를 ‘약탈자’로 규정해왔다. ‘소수 극단적 이념을 가진 집단’이라거나, ‘외국인과 테러단체, 표를 노린 야당의 합작품’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시위대에 ‘최후통첩’을 하던 날, 에르도안 총리는 이른바 ‘시위대 지도부’와 면담에 나섰다. 이번 시위 사태가 시작된 이래 처음이다.
이날 수도 앙카라의 집권 정의개발당(AKP) 당사에서 열린 면담에 참석한 11명의 ‘시위대 지도부’는 정부가 선별한 것으로 전해진다. 터키 일간 는 6월12일 휘세인 셀리크 AKP 대변인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면담에서 에르도안 총리는 게지 공원 개발사업에 대한 여론을 확인하기 위해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주민투표는, 게지 공원이 있는 이스탄불 시민들만 대상으로 실시될 것이다. 정부가 주민투표 실시를 제안한 만큼 시위대는 즉각 해산하고 일상으로 복귀하기를 바란다.”
시위대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날도 탁심 광장과 수도 앙카라의 키질라이 광장 등지에선 평화로운 밤샘 시위가 이어졌다. 등 외신들은 6월12일 게지 공원 시위대의 말을 따 “정부가 지명한 ‘시위대 지도부’는 우리의 대표자가 아니다. 총리와 시위대 지도부의 면담은 농담 같은 얘기일 뿐”이라고 전했다.
이스탄불 빌기대학교 연구팀이 게지 공원 시위대 3천 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70%는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했다. 또 응답자의 92.4%는 시위에 참가한 이유로 ‘에르도안 총리의 권위주의적 행태’를 꼽았다. 이 대학 에스라 에르칸 빌지크 교수는 6월10일 와 한 인터뷰에서 “이번 시위에 참가한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한마디로 정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들은 ‘자유’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에르도안 총리 집권 이후 지속적으로 이뤄져온 ‘사소한 권리’에 대한 침해를, 터키의 주류 정치권은 전혀 견제하지 못했다. 평화로운 집회가 군홧발에 짓밟히던 날,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시민들이 직접 나섰다. 켜켜이 쌓여온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게다.
시위대의 분노가 자신들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점을 이제야 깨달은 걸까? 내년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급격히 번져가는 시위 사태를 바라보며 ‘주판알’만 튀기던 터키의 야권이 뒤늦게 부산해진 모양새다. 제1야당 공화인민당(CHP)의 구르셀 테킨 부대표는 와 한 인터뷰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는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에 좀더 귀기울여야 한다는 교훈을 새삼 얻었다”고 말했다.
집권당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간 는 지난 6월12일 압둘라 귈 대통령이 “시위대가 말하는 게 뭔지 깨달았다. 민주주의가 투표함에서만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요지부동인 것은 에르도안 총리뿐이다. 주민투표 제안은, ‘투표하면 또 이긴다’는 자만심의 표현이다. ‘알리 카르프’란 네티즌은 관련 소식을 다룬 의 기사에 이런 댓글을 남겼다.
“그럼 말이야, 존경하는 술탄(에르도안 총리)께서 이참에 남편이 아내에게 매질하는 것을 허용할지도 주민투표에 부쳤으면 좋겠어. 술탄의 지지자들은 당연히 찬성 표를 던질 테지. 그런다고, 그게 옳은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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