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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법원 86살 몬트 전 대통령에게 80년형 선고… 30년 전 집권 당시 저지른 학살·반인도 범죄 혐의 인정
등록 2013-05-24 20:59 수정 2020-05-03 04:27

역사는, 때로 집요하다. 30년 전의 일을 새삼 들춰, 오늘의 교훈으로 삼을 줄 안다. 다시는, 그 불행했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지난 5월10일 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 법원이 내놓은 판결을 전 인류가 곱씹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 재산이 ‘29만원’뿐이라는 은퇴한 독재자가 활보하고 있는 동방의 한 나라에서는 더욱 그럴 게다.
과테말라 제26대 대통령을 지낸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는 1982년 3월23일 쿠데타로 집권해, 이듬해인 1983년 8월8일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1926년 6월 태어났으니, 그는 올해로 만 86살이다. 여느 남미의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몬트는 초급장교 시절이던 1951년 일찌감치 냉전 시절 미국이 남미 각국의 엘리트 장교들을 데려다 훈련시킨 ‘스쿨오브아메리카’(SOA)를 거쳤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54년 미 중앙정보국(CIA)이 과테말라에서 하코보 아르벤스구스만 정권을 겨냥한 군사 쿠데타를 배후 조종했을 때, 몬트는 미국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 쿠데타에 적극 가담한 그는 이후 승진 가도를 내달렸고, 카를로스 아라나 오소리오 군사독재 시절이던 1970년 마침내 육군참모총장에 오른다.
쿠데타로 집권한 뒤 쿠데타로 축출
군복을 벗은 몬트는 1974년 대선에 도전했다. 하지만 같은 군 출신인 에우헤니오 라우게루드 가르시아에게 7만 표 차이로 석패했다. 그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지만,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옮겨가 1978년 가톨릭과 절연을 선언하고, 캘리포니아주에서 개신교 목사 안수를 받는다. 이후 몬트는 제리 팔웰, 팻 로버트슨 등 극우 성향의 미 교계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군부독재는 이어졌다. 1982년 3월 치러진 대선에선 앙헬 아니발 게바라 장군이 당선됐다. 지나치리만치 노골적인 부정선거였다. 그는 취임도 하기 전 쿠데타의 역풍에 휘말린다. 주동자는 몬트였다. 만연한 부패와 잇따른 부정선거에 신물이 난 여론은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환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헌정 질서가 다시 중단됐다. 의회는 해산됐고, 초법적인 군사재판소가 설치됐다. 납치와 고문, 불법 처형과 암살이 횡행하기 시작했다. 집권 직후 이른바 ‘국가성장안보계획’을 발표한 몬트는,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농민과 원주민의 통합을 강조했다. 당시 그는 “문맹에다, 무식하고, 미성숙한 농민과 원주민은 좌파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고 강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해 6월 쿠데타 주도 세력을 잇따라 숙청하며 1인 통치체제를 확립한 몬트는 이른바 ‘프리홀레스 이 푸실레스’(콩과 총) 작전을 본격화한다. “내 편에 서면 콩을 먹여줄 것이요, 반군 편에 서면 총알을 박아줄 것”이란 게다. 왜곡된 개신교 신앙으로 무장한 그는 당시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한 손에는 성서를, 다른 손에는 기관총을 들고 ‘싸움’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단다.
특히 치케·우에우에데낭고 지역을 중심으로 한 마야 원주민의 희생이 컸다. 1999년 유엔이 지원해 설치된 진실화해위원회가 펴낸 보고서를 보면, 당시 약 600곳의 원주민 마을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1982년 7월 이른바 ‘산체스 계획’에 따라 바하베라파스 지역의 라비날에서 벌어진 학살극으로 268명이 숨졌다. 페텐 지역의 도스에레스에서도 200명 이상이 한꺼번에 살해됐다.
반공 영웅, 레이건의 칭송을 받다
몬트는 ‘반공의 영웅’이었다. 학살이 극에 달했던 1982년 12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 대통령은 몬트 정권 지지를 위해 과테말라시티를 직접 방문했다. 그해 12월4일 정상회담을 마친 레이건 대통령은 “몬트 대통령은 인품이 훌륭하고 의지가 확고하신 분”이라며 “몬트 대통령이 과테말라 국민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적 정의를 진작시키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독재자의 최후는 쉽게도 찾아왔다. 길지 않은 집권 기간에 3차례나 쿠데타 시도가 벌어졌다. 1983년 6월 말 몬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인 1984년 7월 대선을 치르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해 8월 자신의 심복이던 오스카르 움베르토 메히아 빅토레스 국방장관이 주도한 쿠데타로 결국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몬트 축출 이후에도 살육은 멈추지 않았다.
몬트는 1989년 과테말라공화전선(FRG)이란 정당을 창당하고 정치권으로 복귀했다. 1990년엔 대선 출마까지 선언했다. 하지만 ‘쿠데타의 주역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1985년 개정 헌법 조항을 근거로 헌법재판소가 후보 자격을 박탈했다. 방향을 튼 그는 1990~2004년 국회의원 생활을 하며, 1994년엔 국회의장에 오르기도 했다. 1995년 대선 출마 재도전 역시 금지됐다. 그해 대선에 몬트 대신 FRG 후보로 나선 알폰소 포르티요 후보는 간발의 차로 낙선했지만, 결국 1999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2003년 5월 FRG는 다시 한번 몬트를 대선 후보로 지명했다. 법원은 또다시 그의 후보 자격을 박탈했지만, FRG 쪽이 지명한 항소심 재판부가 하급심을 뒤집고 출마 자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후보 자격을 다투는 동안 유세를 중단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상황이 꼬였다. 몬트는 즉각 라디오 연설을 통해 지지자들에게 대대적인 항의시위를 벌이라고 촉구했다. 그해 7월24일 벌어진 이른바 ‘후에베스 네그로’(검은 목요일) 사건이다. 총칼과 곤봉으로 무장한 FRG 지지자들은 몬트의 ‘해산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이틀 동안 수도 과테말라시티를 유린했다. 결국 과테말라 헌법재판소는 “1985년 헌법이 정한 출마 금지 규정을 소급 적용해선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해 11월9일 치러진 대선에서 몬트는 단 11%의 득표율로 3위에 그쳤다. 대선 출마 때문에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포기한 탓에 면책특권도 잃게 됐다. 이듬해인 2004년 3월 법원은 몬트에게 출국금지령을 내리고, 검은 목요일 사건 관련 재판을 받도록 했다. 법정 공방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법원 “원주민 1771명 학살극의 배후”
2007년 9월 몬트는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면책특권의 보호막 아래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2012년 1월14일 의원 임기가 끝나자 법원은 다시 출두요구서를 몬트에게 보냈다. 그해 1월26일 몬트는 집권 기간에 저지른 학살과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됐다. 몬트는 묵비권으로 버텼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선고기일이 잡혔다. 야스민 바리오스 재판장은 5월10일 판결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피고인은 학살을 배후 조종했다. 익실리스 원주민을 ‘공공의 적’으로 내몰았고, 열등한 종족으로 낙인찍었다. 익실리스 원주민 인구의 5.5%에 이르는 1771명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고 조직적으로 실행에 옮겨진 15건의 학살극으로 목숨을 잃었다.”
학살 혐의는 유죄가 인정됐다. 징역 50년형이 언도됐다. 반인도적 범죄행위 혐의도 유죄였다. 징역 30년형이 추가됐다. 86살의 은퇴한 독재자에게 모두 80년의 징역형이 내려진 게다. 국가수반을 지낸 인물이, 자기 나라에서, 학살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건 몬트가 사상 처음이란다. 휴먼라이츠워치(HRW)는 5월10일 성명을 내어 “이번 판결은 과테말라는 물론 전세계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어느 누구도, 전직 국가 지도자라 해도, 학살을 저지르고는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해졌다”고 환영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몬트는 즉각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수하들도 줄줄이 재판을 받게 될 터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1982년 9월 육군 소령으로 학살의 현장을 지켰던 오토 페레스 몰리나 현 과테말라 대통령이다. 어쩌면, 싸움은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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