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에 대한 관대함은 동서고금의 예의이다. 하지만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이런 관대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 4월8일 타계한 대처를 놓고 영국에서 전례 없이 여론이 엇갈리고 있다. 4월17일 그의 장례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하고, 영국 상·하원은 그의 추모 회기를 소집했다. 국장으로 치르지 않는 정치인의 장례에 여왕이 참석하기는 처음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놓고 영국 각지에서는 축하 파티가 벌어진다. 보수 언론들은 그를 평화시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하나, 진보 언론들은 영국에서 공동체 정신을 앗아간 분열과 갈등의 인물로 혹평한다.
고인에게 관대한 것은 그에 대한 평가가 이미 끝났거나, 그의 영향력이 소멸됐기 때문이다. 대처가 여전히 환호와 증오의 인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의 영향과 유산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유산과 영향은 여전히 어떤 이들을 환호케 하고, 다른 이들을 절망시키는 현재형이다.
복지 시스템의 핵심은 안 건드려
그는 영국을 구했는가? 모두 구하지는 않았다. 계층적으로 부자와 상류계급만, 산업적으로는 금융산업만, 지역적으로는 런던 등 동남부 지역만 구했다.
민영화(더 정확하게는 사영화) 정책, 변동환율 체제로의 이행 등 탈규제로 대표되는 시장자유화 정책인 대처리즘하에서 영국 경제는 그의 집권 전보다 분명 활력이 돌았다. 1975년 27%에 달하던 인플레이션은 1986년 2.4%로 떨어졌다. 성장률은 집권 직전 -4%에서 시작해 1987년 말~1988년 중반에는 7%대까지 올라갔다. 그것을 대처리즘의 효과로 볼 수 있느냐는 반론도 있다. 1970년대 중반은 오일쇼크로 모든 나라가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고, 1980년대 중반엔 모두가 저유가와 경기회복을 맛보았다. 보수 진영은 세계적인 경기회복이 대처와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정권이 주도한 시장자유화 정책의 결과였다고 방어하기도 한다.
마거릿 대처는 어쨌든 영국 경제가 짊어진 짐을 완화했다. 활력과 경쟁력을 잃은, 노조가 장악한 국영기업을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 짐을 진 사람의 체력이 좋아졌다기보다는, 그 짐을 던져버린 것이다. 집권 전 150만 명 내외에 5%이던 실업자 수와 실업률이 경기회복에도 불구하고 대처 정부에서 300만 명, 10%대로 올라간 것에서 잘 드러난다. 무거운 짐에 무너지기보다는 그 짐을 던져버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방법이 유일했느냐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그의 집권 기간에 영국의 제조업은 공동화됐다. 금융규제가 철폐된 공간에 세계의 자금이 몰려들어 파운드화는 영국의 소득과 생활수준에 비해 줄곧 강세를 보였고, 이는 이미 경쟁력을 잃은 영국 제조업을 고사시켰다. 런던의 금융허브 고수를 위해서도 고평가된 파운드화가 필요했다. 런던이 금융허브가 되는 비용이었다.
대처의 사임 뒤 보수당은 런던을 중심으로 한 동남부의 지역정당화됐다.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북부 도시에서는 사실상 전멸했다. 대처의 집권 동안 산업이 공동화된 지역이다. 그의 영국 구하기의 편중적 효과가 잘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불행한 정치적 말로
그는 복지국가를 와해시켰나? 그렇지 않다. 그는 전후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 정부가 구축한 유럽에서 가장 사회민주주의화된 영국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국가 시스템의 핵심 기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국 복지 시스템의 핵심 중 하나인 국립의료보험제도(NHS)는 건재하다. 노령연금이나 실업보험 등도 여전하다. 대처는 이런 복지 시스템을 일부 건드리기는 했으나, 이를 시장 논리에 완전히 맡겨두는 것은 거부했다. 영국 국민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작은 정부’ 신봉자가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정부’ 신봉자였다. ‘큰 정부’를 혐오했으나, 작은 정부를 선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집권 내내 지방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려 했고, 국가의 경찰력을 키웠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의 씨를 뿌렸나?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대처리즘의 핵심인 사영화와 규제 완화 철학을 가장 정력적으로 옹호해온 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대처가 없었다면, 빅뱅(런던을 금융허브로 만든 금융규제 완화)은 없었을 것이다. 금융 분야는 영국 경제에서 그렇게 많은 몫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국은 과도한 대출로 인한 개인 부채와 은행 구제로 야기된 정부 부채에 허덕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논거의 일부는 진실이다.” 물론 는 “대처리즘이 없었다면, 영국 경제는 여전히 국가 통제의 수렁에 허덕이고, 경제의 핵심은 정부가 소유하고, 전투적 노조가 여전히 득세할 것이다”라고 옹호했다.
아마 대처가 아니었다면 신자유주의가 그렇게 주류 정책으로 득세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처의 집권 전에, 시장과 경제학계에서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의 신고전주의 경제학과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는 여전히 찬밥과 비주류 취급을 받았다. 대처를 통해서, 그의 밀어붙이기 사영화 정책을 통해서 이들의 사상과 아이디어는 신자유주의로 발화했다.
그는 성공한 정치인인가? 그렇지 않다. 보수 세력에게는 축복이었으나, 그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정치적 말로를 걸었다.
그의 장기 집권과 정치적 성공에는 다분히 운이 따랐다. 포클랜드전쟁은 패배 직전에 있던 총선에서 그와 보수당을 구했고, 집권 중반 이후 터져나온 북해 유전의 수입은 보수당 정부의 재정을 뒷받침했다. 미국에서 보수 지도자인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과 소련의 약화도 그의 국제적 입지를 도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3기 집권 이후 자신의 성공을 과신하며 독단에 빠져, 당내에서 입지를 잃었다. 집권 초 내각 구성원으로 유일하게 남은 제프리 하우 당시 부총리도 그가 추진하던 인두세에 반대하며 등을 돌렸다. 대처는 당수 선거에서 안팎의 압력으로 중도 하차해야 했고, 퇴임 이후 당내에서 영향력이 소멸됐다. 레이건이 퇴임 뒤에도 국민적 인기와 당내 영향력을 확고히 누린 것과는 대비된다.
는 “지금은 대처의 중심적 통찰력을 꽉 붙잡을 결정적인 때다. 나라가 번영하려면 국민은 국가의 전진을 다시 뒤로 돌려야 한다. 세계에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대처리즘이지, 더 적은 대처리즘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은 “대처가 씨름했던 전후의 실패한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실패한 해답으로 돌아가서도 안 된다. …그녀의 유산은 공공의 분열, 개인적 이기심, 탐욕의 추종이다. 이 모두는 어느 때보다 인간 정신에 족쇄를 채웠다”고 혹평했다.
영국과 세계는 어떻게 변했나?
1975년 보수당 당수로 첫 연설을 할 때, 그의 연설담당관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연설을 인용하라고 권고했다.
“강자를 약화시켜서 약자를 강하게 할 수 없다. 검약을 위축시켜서 번영을 가져올 수 없다. 고용주를 끌어내려서 피고용인을 도울 수 없다.”
대처는 핸드백에서 낡은 인쇄물을 꺼냈다. 그 구절에 줄이 그어진 인쇄물이다. “내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라고 대처는 응답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영국과 세계는 어떻게 변했나? 대처는 강자를 강화해서 약자도 강하게 했는가? 검약을 장려해서 번영을 가져왔는가? 고용주를 부추겨서 피고용인을 도왔는가? 부자와 강자는 그렇다고 하고, 약자와 빈자는 아니라고 한다. 대처는 죽었지만, 대처리즘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정의길 한겨레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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