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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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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적 자유작전이 남긴 항구적 전쟁상태

알카에다 소탕하려 시작된 미국의 아프간 침공, 11년5개월여 지났지만 알카에다·탈레반 건재… 미군이 철수하면 군벌로 찢어져 종족·인종 간 분쟁 상태 격화되고 ‘국민국가’ 붕괴될 가능성 커
등록 2013-03-23 08:02 수정 2020-05-03 04:27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따지고 보면 아예 ‘명분’이 없는 전쟁은 아니었다. 9·11 동시테러를 저지른 테러단체 알카에다가, 탈레반의 비호 아래 아프간에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오스트레일리아·프랑스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들이 다국적군을 결성하고, 이른바 ‘북부동맹군’으로 불린 아프간의 반탈레반 군벌세력이 미국과 힘을 합쳤다.
어둠이 깔린 아프간의 메마른 대지를 토마호크 미사일이 때려대기 시작한 것은 2001년 10월7일이다. 9·11 동시테러가 벌어진 지 불과 26일 만의 일이다. 전세는 처음부터 싱거웠다. 다국적군의 막강한 공중전 속에, 북부동맹군의 지상군 병력은 개전 한 달여 만인 그해 11월9일 북부 최대 도시 마자르이샤리프를 장악했다.
이어 11월13일엔 수도 카불이, 11월25일엔 탈레반의 거점이던 쿤두즈가 차례로 함락됐다. 그해 12월7일 ‘탈레반의 심장부’로 불리던 남부 칸다하르마저 북부동맹군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는 듯했다. 하미드 카르자이를 수반으로 한 아프간 과도정부가 수립된 것은 그해 12월22일, 전쟁 발발 78일 만의 일이다.
2006년부터 ‘춘계 대공세’
탈레반은, 산을 넘었다.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부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선 ‘잔당 소탕작전’이 이어졌다. 연일 ‘승전보’가 전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오사마 빈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를 궤멸시키겠다고 나선 전쟁터에서, 그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알카에다는, 이미 국경 너머 파키스탄의 와지리스탄 지역으로 근거를 옮긴 뒤였다. 세월이 흘러갔다.
몸을 추스른 탈레반은 미국이 이라크에서 발이 묶인 2003년 중반부터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2006년부터는 노골적으로 공세 수위를 높였다. 산악지대에서 험악한 겨울을 보내고 나면, 으레 ‘춘계 대공세’가 시작되고는 했다. 칸다하르 등 남부 일대를 중심으로, 탈레반의 거점이 다시 만들어졌다. 카르자이 정부는 ‘카불 정부’란 비아냥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지난해 10월1일 타계한 세기적 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세기’라 불렀다. 그 극단을 상징하는 건 두 차례 치러진 ‘세계대전’이다. 1차 대전이 4년3개월, 2차 대전이 6년간 이어졌다. 그 기록은, 만 8년간 이어진 미국의 ‘베트남전쟁’으로 깨졌다. 옛 소련을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했던 ‘아프간 침공’도 9년2개월 만에 마무리됐다. 작전명 ‘항구적 자유’, 미국의 아프간 전쟁은 3월15일 현재 11년5개월과 8일째로 접어들었다. 하루하루, 미 역사상 최장기 전쟁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신기록 행진에도, 끝은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이미 2014년 말까지 아프간 주둔 미군의 철수를 완료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NATO 역시 마찬가지 ‘시간표’를 추진하고 있다. 외국군이 떠나면 아프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역사가 말해준다. 1989년 2월 옛 소련군이 물러간 아프간은 혼돈에 휩싸였다. 소련군에 맞서 싸웠던 이슬람 전사, 곧 무자헤딘은 무함마드 나지불라 대통령이 이끈 공산당 정권을 1992년 4월 그예 고꾸라뜨렸다.
아프간의 ‘존재론적 두려움’
그야말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이어졌다. 지역과 종족에 기반한 군벌이 발호해 아프간 전역에서 피를 뿌렸다. 내전이 불을 뿜던 무렵, 군벌의 무도함에 맞서 아프간 남부 지역 출신 파슈툰족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게 ‘탈레반’(학생 또는 진리를 좇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부분은 소련 침공 기간 동안 국경 너머 파키스탄으로 피란을 떠났던 난민의 자녀였다. 말하자면, 무자헤딘의 후예란 얘기다. 아프간 내전은 1996년 9월 말 탈레반의 카불 입성으로 마감됐다. 불과 5년 남짓 이어질 불안한 평화의 서막이었다.
분쟁지역 전문 언론단체인 ‘전쟁과 평화 보도 연구소’(IWPR)는 지난 2월5일치 보도에서 “다국적군 철수를 앞둔 아프간에서 ‘존재론적 두려움’이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가 전한 아프간 내부의 목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여보자.
“2014년은 아프간이란 국가가 생사의 기로에 서는 해다.”(아슈라프 가니 아흐마드자이 전 중앙은행장)
“미국 등 서방은 언젠가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군대를 물리면, 여기서 수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수십만 명이 난민으로 떠돌 테고, 아프간이란 국가 자체가 혼돈 속으로 빨려들 것이다. 중앙정부는 국민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것이다.”(암룰라 살레 전 정보국장)
“군벌이 발호할 게다. 아프간 내부에서 봉건 시절처럼 ‘미니 국가’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들은 이웃한 세력과 결탁해 혼란을 부추길 테고, 결국 종족·인종 간 분열상이 극심해지면서 이른바 ‘국민국가’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워질 것이다.”(압둘 라티프 페드람 국민회의당 대표)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지금으로선, 2014년 이후에도 미군이 아프간에서 아예 철수하는 게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중순 미국을 방문한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일련의 ‘안보협약’에 합의했다.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이 가운데는 2017년까지 미군 일부가 아프간에 남아 현지 군경 훈련을 책임지는 내용도 포함됐다. 미군 주둔은 2024년까지 한 차례 추가 연장이 가능하단다.
2011년 말 미군이 이라크에서 전면 철수를 단행한 것은, 이라크 정부와 벌인 주둔군지위협정(SOFA) 관련 협상을 매듭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핵심은 주둔 미군에 대한 면책특권 부여 문제였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아프간 주둔 미군 장병은 아프간 국내법에 따라 처벌되지 않는다는 점을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귀국 뒤 문제가 불거지자, 그는 “부족대표자 회의(로야 지르가)를 소집해 면책특권 부여 문제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탈레반은 (2014년 이후) 외국군이 전면 철수하면 유혈사태가 늘어날 거라고 겁을 주려 한다. 이런 식으로 외국군 주둔을 연장하려는 것은 결국 미국을 돕는 짓이다.” 척 헤이글 신임 미 국방장관이 첫 해외 순방지인 아프간에 도착한 지난 3월10일, 카르자이 대통령은 부족 원로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탈레반과 이면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주장도 내놨다. 지난해 중반 이후 카르자이 대통령은 부쩍 ‘반미 발언’을 일삼고 있다. 그는 2014년 4월 대선을 치러야 한다.
유일한 전과는 빈라덴 사살
“아프간은 지난 세기에도 (옛 소련의 침공을 포함해) 지금과 같은 존재론적 위기 상황을 여러 차례 겪었다. 미국 등 서방 군대가 11년 넘게 주둔하고 있음에도, 이란과 파키스탄은 아프간의 정치·경제·문화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종국에는 이 때문에 아프간이란 국민국가가 파국을 맞게 될 것이다.”
가푸르 레왈 아프간지역연구센터(ACRS) 소장은 IWPR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항구적 자유작전’이 항구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알카에다는 건재하다. 탈레반도 무탈하다. 11년5개월여 전쟁이 남긴 유일한 성과는 2011년 5월1일 파키스탄의 한적한 산골마을에서 미 해군 특수전부대(네이비실) 요원들이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다는 것뿐이다. 뭔가, 이게 대체.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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