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두 코미디언의 승리, 이탈리아의 패배

이탈리아 총선,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와 코미디언 출신 베페 그릴로 약진… “모든 기성 권력 반대”라는 묻지마 민심 배경
등록 2013-03-09 02:46 수정 2020-05-03 04:27

“2명의 코미디언이 이탈리아를 통치 불가능한 상태로 몰고 갔다.”
지난 2월25~26일 치러진 이탈리아 총선 결과를 두고, 유럽 각국의 언론들은 한목소리로 이렇게 전했다. 첫 번째 ‘코미디언’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76) 전 총리, 두 번째는 실제 코미디언 출신인 베페 그릴로(64)를 두고 하는 말이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끈 ‘자유국민당’과 그릴로가 이끈 ‘5성운동’(모비멘토 5 스텔레)은 유효투표의 과반을 얻었다.
베를루스코니 ‘자유국민당’ 제3당 돼
건설업에서 시작해 미디어 재벌로 성장하며 막대한 부를 거머쥔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정치권에 뛰어든 것은 1994년 총선 때다. 부패로 얼룩졌던 기독민주당을 비롯해 이른바 ‘펜타파르티토’로 불리던 5개 기성 정당이 ‘마니풀리테’(깨끗한 손)의 단죄를 받던 무렵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후신인 민주당이 주도하는 ‘진보연대’의 집권 가능성이 커지자, 우파 쪽에선 대안 마련에 부심하고 있었다. 역시 부패 혐의로 ‘마니풀리테’의 조사를 앞두고 있던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정치권의 전면에 나선 배경이다.
우파의 ‘새로운 얼굴’로 떠오른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포르자 이탈리아’(전진 이탈리아)란 정당을 창당하고, 총선에 임했다. ‘포르자’란 이름은 이탈리아의 인기 축구팀 인터밀란의 응원구호에서 따왔단다. 대중적 친밀감과 미디어 재벌이란 후광, ‘공산당 집권’에 대한 우파의 두려움까지 등에 업은 전진 이탈리아당은 그해 3월 치러진 총선에서 21%를 득표하며 일약 제1당에 올랐다.
그해 정권을 잡은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이후 세 차례에 걸쳐 모두 11년여를 집권하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장수 총리란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잇따른 부패 의혹과 성추문, 이른바 ‘붕가 붕가’로 불린 호사스런 파티와 미성년자와의 스캔들까지 불거져 대중적 반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유럽 전역을 휩쓴 재정위기의 파고까지 만나, 2011년 11월 총선에서 제1당 자리를 내준 뒤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지난해 10월 유죄판결을 받은 탈세 혐의를 포함해 20여 건의 부패 의혹으로 조사를 받고 있던 그는 다시 정치권 복귀를 시도했다. 애초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에 큰 폭으로 밀리던 그는 자기가 소유한 미디어그룹의 지원을 등에 업고 막판 추격전을 벌였다. 비록 집권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가 이끈 ‘전진 이탈리아’의 후신인 ‘자유국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하원(21.56%)과 상원(22.30%) 모두 제3당에 올랐다.
그릴로 ‘5성운동’ 하원서 최다 득표
이번 총선 최대의 승자로 불리는 ‘5성운동’을 창당한 베페 그릴로는 1980년대를 풍미했던 유명 코미디언 출신이다. 독설에 가까운 정치풍자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펜타파르티토’의 부패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1990년 초반 갑작스레 공중파 방송에서 사라졌다. 정치권의 압력을 받은 방송사 쪽에서 자발적으로 출연을 정지시킨 것이란 소문이 떠돌았다. 3년여에 걸친 공백 끝에 그릴로가 1994년 에서 진행한 토크쇼는 무려 1600만 명이 시청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단다.
이후에도 방송사 쪽과 잦은 마찰을 빚던 그는 결국 1990년대 중반 방송 활동을 접었다. 그릴로가 자신의 블로그(beppegrillo.it)에 올린 ‘이력서’를 보면, 1995년부터 그는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대중 강연과 공연을 펼치는 한편 블로그를 통한 정치평론에 몰두했다. 정치·금융·언론권 등 기성 체제에 대한 그의 통렬한 비판은 대중의 갈채를 받았다. 그릴로가 직접민주주의·생태주의 등 5개 구호를 내걸고 2009년 10월 출범시킨 ‘5성운동’에 대한 여론의 폭발적 반응도, 그의 개인적 인기에 기반한 게다.
앞서 치른 세 차례의 지방선거에서도 약진을 거듭하긴 했지만, 5성운동이 이번 총선에서 이룬 성과는 모두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하원에서 단일 정당으로는 가장 많은 득표(25.55%)를 올렸고, 상원에서도 민주당에 이어 제2당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게다. 5성운동의 공식 로고에는 그릴로의 블로그 주소가 아로새겨져 있다.
“지난 총선 이후 이탈리아의 청년과 노인, 부자와 가난한 이들 모두 생활이 어려워졌다. 2조달러에 이르는 정부 부채를 갚으려고 허리띠를 졸라맨 탓이다. 세금은 치솟았고, 구매력은 떨어지기만 했다. 긴축재정의 여파로 기업이 잇따라 도산해 일자리마저 위협받고 있었다.” 독일 시사주간지 은 2월26일 인터넷판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기존 정책만 아니면 된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란 게다. 절반의 유권자가 ‘2명의 코미디언’을 선택한 이유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이번 선거를 앞두고 재정적자를 메우려고 마리오 몬티 정부가 도입한 부동산세를 폐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미 납부한 세금에 대해선 “사재를 털어서라도 환급해주겠다”는 공약도 내걸었다. ‘긴축재정의 원흉’으로 비판해온 유로존 탈퇴 문제도 언급했다. 대중이 원하는 말을 해준 게다.
5성운동 쪽은 △전면 비례대표제를 뼈대로 하는 선거법 개정 △상·하원 의원 정족수 절반 축소 △정당에 대한 국고 지원 중단 △유로존 탈퇴를 위한 국민투표 실시 등이 대표 공약이었다. 재정정책을 비롯한 당면한 정국 과제에 대해선? 글쎄,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릴로는 자신의 정당을 ‘반(反)정당’이라 불렀다. “모든 기성 권력에 반대한다”는 게다. 역시,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었다.
개표 결과만 놓고 보면, 이번 총선의 승자는 긴축재정 완화와 단계적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경기부양을 대안으로 제시한 피에를 루이지 베르사니 대표가 이끈 민주당이다. 민주당이 주도한 좌파 연대체 ‘이탈리아 공동선’은 하원에서 29.54%의 득표를 하며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상원에서도 123석을 얻어 제1당에 올랐지만, 전체 315석의 과반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상하 양원이 동일한 힘을 갖는 이탈리아에선, 정국 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이란 얘기다.
결국 남은 건 재선거뿐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끈 중도우파 연대는 상원에서 117석, 5성운동은 54석을 얻었다. 둘을 합하면, 상원의 절반을 훌쩍 넘긴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연립 구성 제안을 민주당은 거부했다. ‘부패세력’과는 함께 정부를 구성할 수 없다는 이유다. 그릴로는 총선 결과가 나온 직후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고 선언했다. “좌파가 주도하든, 우파가 주도하든 연립정부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란 게다.
결국 뭔가? 이탈리아 국민은 이번 총선에서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은 셈이다. 남은 건? 재선거뿐이다. 싫더라도 언젠가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정치는, 엄연한 현실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