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라트 알카드르.’
이슬람권에서 ‘운명의 밤’ 또는 ‘계시의 밤’으로 부르는 날이다. 라마단(금식월) 기간이던 서기 610년 이날 밤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땅 메카 외곽의 누르산에 있는 히라 동굴에서, 예언자 무함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아 성서 쿠란을 적기 시작했단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날일 터다. 올해의 ‘라일라트 알카드르’는 8월12일이었다. 그날, 이제 갓 18개월째를 맞은 ‘신생 민주주의’의 명운을 건 한 편의 정치 드라마가 이집트에서 펼쳐졌다. 주인공은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었다. 이집트에 ‘새날’이 열리고 있는 건가?
1952년 이후의 권력 정점에서 내려온 군부
이날 밤 무르시 대통령은 카이로 나스르시티에 자리한 알아즈하르센터를 찾았다. 알아즈하르는 이집트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이슬람 기관이다. 수백 명의 성직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라일라트 알카드르’를 기리는 연설에 나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내린 결정은 특정 개인이나 국가기관을 욕보이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다.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이들에겐, 국가도 충직해야 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생각은 없다. …국가의 안정과 부흥을 목표로 해야 한다. 더 나은 미래로 성큼성큼 나아가야 할 때다.” 무르시 대통령이 언급한 ‘오늘 내린 결정’은 대체 뭔가?
“첫째, 2012년 6월17일 반포된 헌법 부속조항은 폐기한다. 둘째, 2011년 3월30일 채택된 헌법선언 제25조 2항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대체된다. ‘이 선언 제56조가 규정하고 있는 모든 권리·의무 사항은 대통령이 성실히 이행한다.’ 셋째, 새 헌법을 작성할 제헌위원회가 (법원의 결정에 따라)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이날 오후 야세르 알리 대통령실 대변인은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회견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했다. 알리 대변인의 얘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제헌위원회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대통령이 제 정치세력과 협의를 거쳐 이집트 사회의 모든 분야를 대표할 수 있는 새 제헌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 새 제헌위원회는 구성된 날로부터 90일 안에 제헌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 헌법안 작성 작업이 마무리되면 30일 안에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 또 새 헌법안이 통과된 날로부터 60일 안에 새 의회 구성을 위한 투표를 실시해야 한다. 넷째, 새 헌법선언은 관보에 게재된 다음날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끈 ‘청년장교단’이 파루크 왕조를 무너뜨린 1952년 7월23일 이후, 이집트 사회를 쥐락펴락해온 것은 군부였다. 지난해 2월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철권통치가 무너진 뒤에도, 탐욕스런 군부는 최고군사위원회(SCAF)를 꾸려 권력의 정점을 지켰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게 지난해 3월 만들어진 이른바 ‘헌법선언’이다. 무르시 대통령이 ‘라일라트 알카드르’에 맞춰 전격 발표한 ‘새 헌법선언’은 혁명 이후 최고군사위가 장악했던 권력을 박탈하는 게 핵심이었다. 한 가지씩 따져보자.
지난 6월17일 무바라크의 수하였던 무함마드 탄타위가 이끄는 최고군사위가 뜬금없이 ‘헌법 부속조항’을 발표했다. 대통령 선거의 최종 개표 결과 발표가 연기된 상황에서 나온 일이다. 새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에도, 군부가 행정·입법권을 장악하는 것은 물론 새 헌법 제정 과정을 주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뼈대였다. 이를 폐기함으로써, 무르시 대통령은 군부에 빼앗겼던 자신의 법적 권한을 완벽하게 회복시켰다.
최고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 군복 벗어
두 번째로 언급된 헌법선언 제56조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국정을 운영해나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입법권 △정책과 예산 편성·집행권 △의회 소집·해산 요구권 △법률 반포·거부권 △총리·내각 임명권 △공무원 임면권 △사면권 등이 최고군사위에 부여돼 있다. 이를 대통령의 의무이자 권리로 돌려놨으니, 군부의 권력 기반 자체가 사라진 게다. 여기에 제헌위원회 구성과 운영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까지 열어놨다. 군부가 쥐고 있던 모든 권력을 무르시 대통령이 장악하게 된 셈이다. 이집트 일간 가 “무르시 대통령이 군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표현한 이유다.
제도만 바꾼 게 아니다. 이집트군 최고사령관이자 1991년 이후 국방장관직을 유지해온 탄타위와 그의 최측근인 사미 아난 육군참모총장이 이날 군복을 벗었다. 모하브 메미시 해군참모총장과 레다 하페즈 공군참모총장도 이날 전역했다. 3군 수뇌부가 통째로 갈린 게다. 혁명 이후 지난 18개월여 지속적으로 강화돼온 군부의 권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꼴이다.
“무르시 대통령의 이번 조처는 민간권력과 군부권력 간의 대결 구도가 확실히 민간 쪽으로 기울게 만든 상징적인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bbc>은 8월13일 인터넷판에서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도하센터의 중동전문가 오마르 아쇼르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아쇼르는 “군부 최고위층이 내린 결정을, 선출된 민간인 출신 정치인이 뒤집은 것은 이집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난 8월5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와 맞닿은 시나이반도의 이집트 국경검문소에 무장괴한들이 닥쳤다. 무차별 총질이 이어졌고, 이집트 국경수비대원 16명이 목숨을 잃었다. 1970년대 중동전쟁 이래 벌어진 최악의 참사였다. 1979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캠프데이비드 평화협정’을 체결한 이래 처음으로 시나이반도 일대에서 이집트군이 대대적인 군사작전에 나섰지만, 괴한들의 정체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성난 여론이 군부에 대한 질타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급 장교들은 군 최고위층 인사들이 그간 보여온 행태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지나치게 현실 정치에 깊숙이 개입해온데다, 시나이반도 습격 사건 이후 보인 대응 역시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일간 은 정치평론가 카드리 사예드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사예드는 이어 “이제는 군부가 정치에 간여할 게 아니라,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지난 6월30일 취임한 무르시 대통령으로선 생각보다 이른 시일 안에 군부와 맞설 절호의 기회를 만난 셈이다.
“군부가 쉽게 물러나는 게 수상하다”
현재로선 군부의 저항은 없다. 무르시 대통령은 8월14일 탄타위 전 국방장관과 아난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국가 최고훈장인 ‘나일 메달’을 수여했다. 또 두 사람을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임명해 예우를 갖췄다. 메미시 전 해군참모총장과 하페즈 전 공군참모총장은 각각 수에즈운하청장과 군수장관으로 취임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무르시 대통령이) 군부와 사전 조율을 거쳐 인적 쇄신 절차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반세기 이상 권력을 누려온 군부가 이렇게 쉽게 물러나는 게 수상하다”는 게다.
군부의 정치 개입을 원천 차단했다. 행정권과 입법권도 완벽히 장악했다. 향후 제헌 과정에서도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무르시 대통령의 다음 행보는 뭘까? 은 8월16일치에서 ‘법원·검찰 개혁’을 지목했다. 이 매체는 대통령실 고위 인사의 말을 따 “(무르시 대통령은) 무바라크 정권 아래서 임명된 사법부와 검찰 지도부가 여전히 혁명에 반감을 품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며 “조만간 법원과 검찰에 대한 인적 쇄신 조처가 취해질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지난 8월12일 새 헌법선언 발표 등과 함께 마흐무드 메키 파기법원 부원장을 부통령에 임명한 것도 이를 위한 사전 포석으로 읽힌다. 권력이, 급격히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대통령은 헌법선언을 수정할 아무런 법적 권한이 없다.” 지난해 3월 헌법선언 초안 작성을 주도했던 법조인 타렉 엘비슈리는 8월14일 현지 일간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는 이어 “무르시 대통령은 새 헌법선언을 통해 스스로 ‘불법’으로 규정해 폐기한 최고군사위의 헌법 부속조항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며 “자기 자신에게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한 셈”이라고 꼬집었다.
앞서 유력한 대선 후보로 꼽혀온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8월13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군부의 정치 개입 차단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면서도 “입법권과 행정권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반하는 것으로, 임시방편에 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난처한 상황이긴 하다. 새 의회가 들어서기 전까지, 누군가는 입법권을 행사해야 한다. 독재정권의 버팀목이던 군부와 민주적으로 선출된 민간 대통령, 둘 중 누가 나을까? 결국 후자일 수밖에 없다.” 정치평론가 아이만 엘사이드는 8월14일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는 이어 “(새 헌법선언에서) 무르시 대통령은 향후 선거와 관련된 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며 “현재로선, 비정상적인 권력 구조를 장기간 유지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향후 선거 관련 일정 구체적으로 제시돼”
한번 손에 쥔 권력은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오랜 독재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준다. 군부가 찬탈해간 권력을 되찾아온 지금, 무르시 대통령은 어느 길로 나아갈 것인가? 이집트 혁명이, 다시 시험대에 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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