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억2571만2848명. 미국 인구통계국이 7월12일 낮 12시21분(동부 표준시각)을 기준으로 추정한 지구촌의 인구다. 이 가운데 1226명을 눈여겨보자. ‘퍼센트 계산기’를 돌려보니, ‘0.000017%’가 나온다. 사실상 의미 없는 수치다.
78조9500억달러.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해 세계 각국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산해낸 액수다. 지구촌 차원의 GDP라 할 만하다. 이 가운데 4조6천억원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다시 퍼센트 계산기를 돌리면, 약 5.8%가 나온다. 이 정도면, 꽤 의미 있는 수치라 할 만하다. 무슨 말인지는, 지금부터 따져보자.
5.8% 가진 0.000017%의 1%
지난 7월5일 유엔 경제사회국(DESA)은 ‘2012년 세계 경제·사회 조사보고서’를 펴냈다. 해마다 내놓는 자료다.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 다만 부제가 눈길을 끌었다. ‘새로운 개발·원조기금 마련 방안을 찾아서.’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 각국이 허리띠를 졸라매, 유엔은 지난해에만 약 1670억달러 규모의 개발·원조금 부족 사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모두 174쪽 분량의 보고서에서 DESA는 몇 가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놨다.
탄소배출세 도입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 1t에 25달러씩 세금을 부과하면, 한 해 약 2500억달러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게다. 달러·유로·엔·파운드화 등 4대 통화를 거래할 때, 거래 대금의 0.005%를 세금으로 부과하는 통화거래세 도입도 제안했다. 이를 통해 해마다 400억달러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단다. 여기에 유럽연합(EU) 차원에서 도입이 추진되고 있는 금융거래세를 확대 도입하면, 해마다 710억달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게 DESA 쪽의 분석이다.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로버트 보스 DESA 개발분석실장은 “이런 분야에 대한 과세를 통해 녹색성장을 촉진하고,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며 “세금 부과를 통해 원조개발 약속도 지키고 동시에 지구촌 차원의 혜택도 돌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탄소배출세는 이미 유럽 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 등지에서 도입·시행되고 있다. 통화거래세는 198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의 이름을 딴 ‘토빈세’로 잘 알려져 있다. 이와 맥을 같이하는 금융거래세 역시 유럽을 중심으로 이른바 ‘로빈후드 세금’으로 불리며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딱히 ‘혁신적’이라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마련된 돈은 어떻게 쓸까? 유엔은 크게 두 가지를 얘기했다. 첫째, 그동안 에이즈·말라리아·결핵 등 특정 질병 치료·퇴치를 위해 따로따로 마련했던 기금을 이른바 ‘국제보건기금’ 형태로 통합해 운영하자는 게다. 둘째, 탄소배출세 등의 재원은 기후변화에 대한 지구촌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려는 이른바 ‘녹색기후기금’ 설립·운용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단다. 역시 ‘한 번쯤 들어본 소리’다. 그런데 한 가지 ‘아이디어’가 더 있었다. 이른바 ‘억만장자 세금’이다.
“10억달러 이상 자산을 보유한 지구촌 부자들에게 1%의 세금을 부과해 개발·원조 자금으로 활용하자.” 보스 실장은 이날 보고서 발표에 맞춰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그는 “2012년 현재 지구촌에서 10억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개인은 모두 1226명으로, 이들이 보유한 자산총액은 무려 4조6천억원에 이른다”며 “이들에게 자산총액의 1%를 세금으로 부과하면, 2012년을 기준으로 해마다 460억달러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루 1천달러씩 써도 다 쓰는 데 2749년”
이날 회견에서 보스 실장이 인용한 통계는 지난 3월7일 경영·경제 전문지 가 보도한 내용이다. 이 매체는 1987년부터 해마다 10억달러 이상 자산을 지닌 세계 최고 갑부 명단을 발표해왔다. 첫 발표 당시에 10억달러 이상 자산가는 140명에 그쳤단다. 의 3월 보도를 보면, 1226명의 지구촌 갑부 가운데 미국인이 425명으로 가장 많다.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유럽에는 각각 315명과 310명의 부자가 있다. 또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아메리카대륙 각국에 90명, 중동과 아프리카에 86명이 있다. 이들 ‘슈퍼 리치’의 1인당 평균 자산총액은 37억5천만달러에 이른단다.
‘억만장자 세금’을 처음 제안한 것은 배리 허먼 미 뉴스쿨대학 선임연구원으로 알려져 있다. 허먼 연구원은 지난해 유니세프가 마련한 ‘인간의 얼굴을 한 경기회복’이란 주제의 사이버 토론에서 “10억달러 이상을 가진 부자들의 재산이 한 해 평균 5%씩 늘어나면, 14년이면 2배로 늘어나게 된다”며 “1%의 억만장자 세금을 물려도, 재산을 2배로 늘리는 데는 20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DESA의 보고서 역시 비슷한 논리를 펴고 있다.
“10억달러를 가진 사람이 하루 1천달러씩 쓴다면, 재산을 다 쓰는 데 2749년이 걸린다. 평균 자산이 37억달러라면, 하루 1천달러씩 1만 년 넘게 쓸 수 있다. 재산을 불리기도 한다면, 소비 기간은 더욱 길어질 것이다. …2008~2009년 금융위기 이전까지, 지난 20년 동안 10억달러 이상 자산가들의 재산은 해마다 4%가량 늘어났다. 1%의 세금을 내지 않고 재산을 늘리면 18년 만에, 1%의 세금을 내면 23년 만에 재산을 2배로 불릴 수 있다. 그러니 ‘억만장자 세금’이 큰 부담이 되는 건 아니다.”
유엔엔 조세를 부과하는 법적 권한이 없다. 결국 개별 국가 차원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인 게다. 가능할까? DESA는 보고서에서 “(‘억만장자 세금’은) 분명 대단히 ‘매력적인 가능성’을 담고 있다”면서도, “아직까지 이를 국제협력기금 마련을 위한 실질적인 방안으로 보는 이는 많지 않다”고 인정했다.
경제위기가 길어지자 세계 각국에서 ‘부자증세’ 움직임이 나오고 있기는 하다. ‘연간 100만유로 이상 고소득자에게 최대 75%까지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7월4일 구체적인 증세 계획안을 마련해 공개했다. 상속세율 인상과 금융권에 대한 신규 과세, 부유세 확대 등이 그 뼈대다. 지난해 말 이른바 ‘버핏세’ 논쟁이 뜨거웠던 미국에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부자증세’를 다가오는 11월 대선의 쟁점으로 키우고 있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논쟁도 거세질 게다.
‘부자증세’ 미국 11월 대선의 쟁점
‘매력적인 가능성’에 대한 논의의 물꼬는 터졌다. 지구촌 인구의 ‘0.000017%’다. 그들에게 단 1%의 세금을 부과하자는 게다. 논쟁의 물줄기가 전세계로 퍼져간다면, 어쩌면 유엔이 국제사회의 ‘의적’ 노릇을 하는 모습을 보는 날이 정말 올지도 모른다. 이르든, 늦든 말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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