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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고는 파라과이의 노무현?

옛 여당과 연정 파트너 주도로 탄핵된 루고 파라과이 대통령… 독재자가 준 토지, 개혁으로 뺏길까 두려운 기득권층의 ‘의회 쿠데타’
등록 2012-07-03 17:09 수정 2020-05-03 04:26

남미의 파라과이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지난 6월22일 취임한 페데리코 프랑코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와 같은 날 의회의 탄핵으로 물러난 페르난도 루고 전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다. 한쪽에서 적법 절차를 거쳐 이뤄진 권력 교체라고, 다른 쪽에선 의회 쿠데타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지고 있다.
콜로라도당, 61년간 집권한 옛 여당
지난 6월21일 파라과이 하원은 대통령 탄핵안을 발의해 표결에 부쳤다.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찬성이 76표, 반대는 단 1표였다. 이튿날 상원 표결에서도 결과는 비슷했다. 찬성이 39표였고, 반대가 4표였다. 이로써 루고 대통령은 사임을 하게 됐고, 프랑코 부통령이 직을 승계해 내년 8월까지 남은 1년2개월여 임기를 채우게 됐다.
이번 탄핵을 주도한 세력은 콜로라도당과 자유당이다. 콜로라도당은 2008년 4월 대선에서 루고 대통령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무려 61년간 집권한 정당이다. 자유당은 당시 대선에서 루고 대통령과 연대해 콜로라도당의 장기 집권을 끝장내는 데 기여한 정당이다. 두 정당이 루고 대통령 탄핵을 위한 ‘기이한 연대’에 나선 배경에는 파라과이 특유의 문제가 얽혀 있다. 바로 토지제도다.
지난 6월15일 파라과이 동부 쿠루과티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부유한 사업가인 블라스 리켈메가 소유한 대규모 농장의 일부를 점거하고 텐트 생활을 해온 약 150명의 농민이 진압에 나선 경찰과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농민 11명과 경찰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콜로라도당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 비난 여론이 봇물을 이뤘다. 토지 불법 점거를 방조·옹호하고, 폭력사태를 부추겼으며, 국민의 재산권조차 보호하지 못했다는 게다.
비난 여론이 커지자 루고 대통령은 야권의 요구대로 카를로스 필리졸라 내무장관을 경질하고 루벤 아르마리아 전 검찰총장을 후임자로 임명했다. 필리졸라 장관은 좌파 정당 출신이었다. 콜로라도당 정권에서 검찰총장을 지낸 신임 아르마리아 장관은 농민들의 점거농성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전력이 있다. 보수 여론을 달래려는 의도였을 게다. 계산 착오였다. 내무장관 경질과 함께 루고 대통령의 권력 장악력이 급속도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배신’이 빠질 수 없다. 루고 대통령의 ‘연정 파트너’ 격인 자유당도 전격적으로 등을 돌렸다. 2008년 대선 당시 약속대로 루고 대통령 정부에서 부통령과 장관직 네 자리를 챙겼던 자유당은 돌연 지지 철회를 선언하고는, 탄핵안이 발의되던 날 교육·농업·산업무역·법무노동부 장관 등 자기 당 출신 장관 4명을 사임시켰다. 아귀가 착착 들어맞았다.
2008년 4월 대선과 함께 치러진 총선 결과, 콜로라도당(29석)과 자유당(26석)은 하원 80석 가운데 과반을 훌쩍 뛰어넘었다. 상원 45석 역시 콜로라도당(15석)과 자유당(14석)이 완벽히 장악했다. 반면 루고 대통령이 이끈 ‘변화를 위한 애국동맹’은 하원에서 단 2석을 얻는 데 그쳤고, 상원에선 아예 의석을 얻지 못했다. 라틴아메리카 전문 싱크탱크인 미국 남반구위원회(COHA)의 자료를 보면, 파라과이 의회에서 ‘좌파’로 분류되는 정당의 의석은 하원 6석, 상원 3석에 불과하다. 탄핵 재판은 해보나 마나였던 게다.

남아메리카국가연합, 의회 쿠데타 규정
“파라과이 기득권층에게 루고 대통령이 지나치게 과격한 존재였다.” 는 6월26일치에서 그레그 위크스 미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교수(정치학)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위크스 교수는 “기득권층은 루고 대통령 집권 직후부터 지금껏 그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며 “6월15일 유혈사태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명분’을 잡았으니 눈치 볼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루고 대통령의 어떤 면이 그들을 불안하게 했을까? 해방신학자이자 빈민사목에 열정을 다한 가톨릭 사제 출신인 루고 대통령은 집권과 함께 광범위한 토지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파라과이 인구 650만 명 가운데 약 40%가 소농이지만, 경작 가능한 토지 가운데 약 80%를 인구의 2%가 차지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이런 기형적인 토지 소유 구조가 만들어진 것은 1954년 쿠데타로 집권한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독재정권 치하에서였다.
스트로에스네르는 루고 대통령 집권에 앞선 콜로라도당의 61년 집권 기간의 절반을 넘는 35년 동안 철권을 휘둘렀다. 채찍만으론 절대권력을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그가 활용한 ‘당근’이 바로 토지였다. 정치인·군인·기업인 등 정권을 지지하는 측근세력에겐 어김없이 토지를 ‘하사’했다. 사실상 충성의 대가로 봉건영주가 내린 ‘봉토’였던 셈이다.
쿠루과티 유혈사태가 벌어진 농장의 주인인 블라스 리켈메 역시 콜로라도당 소속 상원의원 출신이다. 그의 농장도 ‘하사품’인 게다. 2004년 6월~2008년 8월 활동한 파라과이 ‘진실과 자유위원회’(CVJ) 조사 결과, 부유층과 외국인이 보유한 토지 가운데 64%가량이 이 시절 정부의 불하를 받거나 강제로 빼앗은 땅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국가가 불법적으로 내준 땅이다. 당연히 국가가 몰수해 재분배해야 한다.” COHA가 정리한 파라과이 농민운동 진영의 토지개혁 논리다. 기득권층으로선 ‘재산권의 위협’을 느끼는 게 당연해 보인다. 루고 대통령이 집권 이후 여러 차례 마련한 토지개혁 법안은 그렇게 의회를 틀어쥔 보수정당의 반발로 번번이 무위에 그쳤다. 콜로라도당도 자유당도, ‘지켜야 할 땅’이 많았던 게다. 탄핵의 배후다.
“의회 쿠데타다!” 라틴아메리카 12개 국가가 참여하고 있는 남아메리카국가연합(UNASUR)은 루고 대통령 탄핵 소식이 알려진 직후 성명을 내어 이렇게 비판했다. 브라질·멕시코·콜롬비아 등 남미 각국은 앞다퉈 파라과이 주재 자국 대사를 불러들였다. 파라과이의 주요 원유 공급 국가인 베네수엘라는 원유 수출 중단을 선언했다. 파라과이가 창립회원국으로 참여한 남미 공동시장 메르코수르는 6월28~29일 아르헨티나 멘도사에서 열린 정상회담에 프랑코 대통령의 참석을 금지했다. 파장은 남미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내년 4월 총선과 대선 치를 예정
파라과이에선 내년 4월 총선과 대선이 예고돼 있다. 콜로라도당은 5년 만의 권좌 복귀를 노리고 있다. 자유당은 사상 첫 단독 집권을 갈망하고 있다. 가 6월26일치에서 “콜로라도당과 자유당의 밀월은 탄핵안 통과 직후 끝장이 난 셈”이라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신문은 “콜로라도당이 곧 프랑코 정부를 흔들어대기 시작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앞서 루고 대통령은 6월25일 기자회견을 열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투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예비내각을 구성해 프랑코 정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프랑코 대통령이, 루고 대통령 처지가 된 모양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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