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니라면, 이슬람 광신도를 원하는 건가?’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이 국민을 을러댈 때 툭하면 써먹던 표현이란다. 이집트는 이슬람권에서 가장 ‘세속적’인 나라 가운데 한 곳으로 꼽힌다. ‘이슬람 광신도’란 말은 ‘혐오’의 다른 이름일 터다. 무바라크가 말한 ‘광신집단’은 자신의 최대 정적인 ‘무슬림형제단’을 지칭한 게다.
혁명세력 단일화했으면 과반
‘군부독재 잔존세력인가, 이슬람 광신도인가?’
30년 독재를 무너뜨린 이집트 국민이 지난 5월23~24일 치른 사상 첫 민주적 대통령 선거 결과를
애초 선거를 앞두고 전해진 여론조사 결과는 실제 표심과 사뭇 달랐다. 꾸준히 선두권을 유지해온 것은 암르 무사(76) 전 아랍연맹(AU) 사무총장과 무슬림형제단에서 축출된 온건 이슬람주의자 압델 모네임 아불 포투(61)였다. 무바라크 정권의 수혜자였던 상류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세를 넓혀온 샤피크 후보는 중위권에서 막판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반면 무르시 후보는 하위권만 맴돌았다. 이집트 전역의 이슬람 사원(모스크)을 중심으로 그물망처럼 촘촘한 사회복지사업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무슬림형제단의 조직력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지난해 반독재 혁명의 선두에 섰던 좌파 성향의 나세르주의자 함딘 사바히(57) 후보의 지지율도 좀처럼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선거 결과 사바히 후보는 482만여 표(20.72%)를 얻어 3위를 차지했지만, 포투 후보와 무사 후보는 각각 4위와 5위에 머물렀다.
‘예상’과 다른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여론조사의 ‘함정’이다. 사이드 사덱 카이로아메리칸대 교수(정치학)는 현지 일간 과 한 인터뷰에서 “이집트 인구의 40%가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음에도, 대선 여론조사 응답자의 26%가 상류층, 29%는 중산층이었다”며 “막강한 조직력을 갖춘 무슬림형제단의 (무르시) 후보가 최하위권으로 나온 게 애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둘째, 혁명 주도세력의 분열이다. 사바히 후보가 얻은 482만여 표와 포투 후보가 얻은 406만여 표(17.47%)를 더해보는 것으로 설명은 충분하다. 두 후보 진영 간 막판 단일화 협상이 타결됐다면, 샤피크 후보의 결선투표 진출은 불가능했을 터다. 여기에 무바라크 정권에서 10년여간 외교장관을 지낸 전력에도 ‘온건 개혁파’로 분류됐던 무사 후보의 지지율을 보태면 과반 득표에 육박한다. 3자 간 후보 단일화를 통해 이른바 ‘혁명세력’의 바람이 불었다면, 결선투표를 치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결선투표엔 참여하지 않겠다”
셋째, 샤피크 후보가 결선에 진출한 배경에도 관심을 둘 만하다. 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민주적인 대통령 선거였음에도, 지난 1차 투표의 최종 투표율은 46.42%에 그쳤다. 이쯤 되면 ‘역사적’이란 수식이 무색할 지경이다. 독재정권의 수혜자들이 조용히 결집하고 있을 때, 대다수 이집트 국민은 투표소를 찾지 않았던 게다. 은 5월29일 인터넷판에서 좌파 운동가인 사이드 사덱의 말을 따 “이집트 국민은 누가 권력을 쥐든 팍팍한 삶이 바뀔 것이란 기대를 하지 못했던 것”이라며 “정치가 자신의 삶과 직결됐다고 느끼지 않은 것이 낮은 투표율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둘 다 싫다. 결선투표엔 참여하지 않겠다.” 는 5월28일 카이로 중심가 타흐리르 광장에서 만난 젊은이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혁명을 주도한 이집트 젊은이들은 ‘최선’을 원했지만, 결선투표을 앞두고 남은 선택은 ‘차악’과 ‘최악’뿐인 셈이다. 선관위의 공식 발표가 나온 직후, 분노한 젊은이들이 다시 ‘혁명의 성지’로 몰려든 것도 이 때문이다. 이집트에서도,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니었던 건가?
혁명청년연대·케파야저항운동·혁명사회주의자 등 지난해 이집트 혁명을 이끈 주축 단체들은 5월29일 이집트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독재 부역자에 대한 공무담임권 박탈에 관한 법률’의 조속한 발효를 촉구했다. 아랍 위성방송 는 이날 인터넷판에서 “이집트 하원을 거쳐 지난 4월 말 최고군사위(SCAF)를 통과한 해당 법률에 대해 선관위가 헌재에 위헌 여부를 가려줄 것을 요청해놓은 상태”라며 “이른 시일 안에 법률이 발효되면, 샤피크 후보 대신 좌파 성향의 사바히 후보가 결선투표에 나설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전했다. 그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는 많지 않아 보인다.
같은 날, 1차 투표에서 4위를 차지한 포투 후보도 기자회견을 열어 “헌재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결선투표를 연기하라”고 당국에 요구했다. 역시 가능성이 높은 주장은 아니다. 지난해 개정된 이집트 헌법에 따라, 최고군사위가 결정한 사항에 대해선 이의제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 보도를 보면, 그는 이날 회견에서 다른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내 지지자들에게 특정 후보를 지지해달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시간을 되돌릴 순 없다. 결선투표에서 무바라크 정권 인물을 뽑아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히 하고자 한다.” 사실상 무르시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읽힌다.
제헌의회와 정부 구성 방식이 지지 조건
앞서 이집트사회민주당·민주전선·아랍나세르주의당 등 좌파 성향 8개 정당도 5월28일 오전 공식 선거 결과 발표와 때를 같이해 합동회견을 열어 비슷한 발언을 내놨다. 이들은 회견에서 “제헌헌법은 이집트 사회 전 분야의 대표자가 참여하는 통합적인 방식으로 작성돼야 하며, 차기 정부 구성도 마찬가지”라며 “이를 받아들이는 후보가 있다면 (결선투표에서) 지지 의사를 밝힐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샤피크 후보의 당선은 곧 무바라크 정권의 복원이다. 좌파 성향 정당들이 그를 지지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역시 무르시 후보를 겨냥한 발언인 셈이다. 결선투표를 열흘 앞둔 6월6일엔 무바라크에 대한 선고공판이 예정돼 있다. 이집트 국민은 옛 권력의 추한 뒷모습을 다시 한번 지켜보게 될 게다. 이집트 차기 대통령 당선자 확정 발표는 6월21일로 예정돼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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