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5월16일 노르베르트 뢰트겐 환경장관을 전격 경질했다. 집권 7년여, 정례적인 개각 때를 제외하고 메르켈 총리가 현직 장관을 용퇴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뢰트겐 장관은 집권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의 차세대 주자 가운데서도 ‘선두권’으로 꼽혀왔다. 29살이던 1994년 일찌감치 연방의원에 당선된 그는, 2005년 기민련 집권과 함께 메르켈 총리에 의해 원내총무로 발탁됐다. 2009년 2월엔 환경장관에 임명돼, ‘탈원전’을 필두로 한 독일의 차세대 에너지 정책을 진두지휘해왔다. 당내 입지도 탄탄했다. 기민련 중앙당의 부대표이자, 최대 주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지역위원장을 겸해온 터다. 자연스레 ‘메르켈 총리의 후계자’란 별칭이 따라붙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경질된 이유는 뭘까?
유럽 선거 가르는 열쇳말, 긴축 반대
지난 5월13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뢰트겐 장관이 선거 총괄 책임자였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전통적인 ‘텃밭’이었음에도 기민련은 26.3%의 지지율을 얻는 데 그쳤다. 반면 야당인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은 각각 39.1%와 11.3%의 지지율을 기록해, 두 당만으로 과반 득표를 했다. 독일 차기 총선은 2013년 9월 또는 10월로 예정돼 있다. 기민련으로선 불길한 징조일 수밖에 없다.
“뢰트겐 장관은 이번 지방선거를 유로존 위기에 대처하려고 메르켈 총리가 내놓은 ‘처방’인 긴축정책에 대한 심판의 장으로 만들어놨다. 한껏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 선거에서 참패를 했으니, 메르켈 총리로선 그냥 넘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 시사주간지 은 5월17일 인터넷판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간 ‘부드러운 이미지’를 유지해온 메르켈 총리가 ‘초강수’를 둔 배경이다. 긴축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유력한 차세대 지도자를 한 방에 고꾸라뜨린 셈이다.
독일만이 아니다. 2008년 경제위기가 시작된 이후 메르켈 총리와 짝을 이뤄 ‘긴축 드라이브’를 주도해온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지난 5월6일 치른 대선에서 ‘긴축 반대’를 내건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같은 날 총선을 치른 그리스에선 저돌적으로 긴축정책 폐기를 외쳐온 급진좌파연합이 일약 원내 제2당으로 뛰어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유럽 전역이 긴축정책 찬반을 놓고 들끓고 있는 게다. ‘위기의 진원’으로 꼽히는 그리스의 상황을 좀더 찬찬히 살펴보자.
카롤로스 파풀리아스 그리스 대통령은 지난 5월15일 기자회견을 열어 오는 6월17일 재선거를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거 직후부터 9일 동안 벌여온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마라톤 협상이 끝내 결렬된 탓이다. 연정 구성 실패는 선거 결과가 나온 직후 어느 정도 예견됐다. 압도적 지지의 다수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긴축정책 유지’를 앞세운 신민주주의당과 사회당은 각각 원내 제1당과 3당에 올랐다. 하지만 지지율이 턱없이 낮았다. 각각 18.85%와 13.18%에 그쳤다. 긴축정책 폐기를 약속한 급진좌파연합은 2009년 선거에 견줘 12.18%포인트나 치솟은 16.78%의 지지율을 기록했지만, 역시 연립정부 구성 협상을 주도할 힘은 없었다. 결국 긴축정책을 밀어붙이겠다는 쪽도, 긴축정책을 뒤집어 엎겠다는 쪽도 충분한 힘을 모아내지 못한 게다. 그러니 이번 총선에서 드러난 그리스의 민심은 한마디로 ‘판단 유보’였다. 영국 경제일간지 가 5월16일치에서 “그리스 연정 구성 실패에서 그나마 미덕을 찾는다면, 정치적으로 더 분명한 선택을 할 기회를 다시 갖게 됐다는 점”이라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어차피 지갑은 비어 있다”
‘망설임’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는 지난 5월17일 인터넷판에서 흥미로운 여론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그리스 국민 80%가 긴축정책에 반대한다고 답했는데, 유로존 잔류를 원한다는 의견도 똑같이 80%로 나타났다”는 게다. 이건 무슨 뜻일까?
이른바 ‘트로이카’로 불리는 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은 그리스에 대규모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요구했다. 긴축정책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언제든 구제금융을 중단하겠다고 을러대기도 했다. 구제금융이 중단되면 그리스는 지급불능, 곧 국가 부도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부채를 갚지 않으면 더 이상 유로존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긴축정책 이행과 유로존 잔류 문제는 맞물려 있다는 얘기다. 재선거가 결정된 직후부터 안도니스 사마라스 신민주주의당 대표가 “다가오는 선거는 유로존 잔류 여부를 결정하는 선거”라며 “친유럽 전선을 구축하자”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데스포이나 차라람비두 급진좌파연합 의원은 5월17일 과 한 인터뷰에서 “유로든 드라크마(그리스 옛 화폐단위)든 상관없다. 어차피 지갑은 비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구제금융은 고스란히 채무 상환에 쓰일 뿐 그리스 국민을 위해선 단 한 푼도 사용되지 않았다”며 “긴축정책을 이행하지 않으면 유로존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리스 국민을 협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말했다. 그는 이어 “환율이 낮은 드라크마를 사용하면 수출 경쟁력이 높아져, 경기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미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Exit)를 뜻하는 ‘그렉시트’(Grexit)란 신조어가 유행을 타고 있다. 영국 일간지 은 5월17일 인터넷판 기사에서 “유로존 탈퇴로 인한 고통이 있겠지만, 악몽 같은 현 상황에 마침표를 찍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최악의 상황은 그리스가 유로존 탈퇴의 필요성을 깨닫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이렉시트, 포륵시트, 스펙시트…
하지만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몰고 올 파장이 일국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을 것임에 상황의 심각성이 있다. 따져보자. 는 5월17일 인터넷판에서 “그리스 중앙은행이 유로존의 다른 나라 중앙은행에 지고 있는 부채는 약 1천억유로에 이른다”고 전했다. 이 가운데 약 300억유로가 독일 중앙은행(분데스방크)에서 빌린 돈이다.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면 독일도 온전하기 어려워 보인다. 560억유로 규모의 그리스 국채를 보유한 유럽중앙은행도 휘청일 수밖에 없을 터다.
국채뿐 아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최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말까지 그리스 가계와 기업이 외국계 금융기관에 진 채무의 규모가 690억유로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370억유로가 프랑스계, 영국과 독일계 금융기관도 각각 80억유로와 60억유로의 채권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스의 채무불이행은 유럽 전역에서 다시 한번 금융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최근 국채 이자율이 급상승하고 있는 포르투갈·아일랜드·스페인·이탈리아 등 ‘위기 국가’들이 있다. ‘그렉시트’란 낱말이 등장한 이후, 아이렉시트(아일랜드)·포륵시트(포르투갈)·스펙시트(스페인)·익시트(이탈리아)란 신조어가 꼬리를 물고 유행을 타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5월14일 하루에만 인출된 예금이 7억유로에 이른다.” 파풀리아스 그리스 대통령은 연정 구성 협상 최종 결렬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 유로존 탈퇴 가능성이 높아지자 환율 급락을 우려해 발생한 ‘뱅크런’(예금 대량인출 사태)이다. 이날 유로화는 0.4% 폭락했고, 그리스 주가도 5%가 빠졌다. 영국·독일·프랑스 등을 비롯한 유럽 전역의 주가도 일제히 가파른 하강곡선을 그렸고,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스페인·이탈리아의 국채 이자율은 큰 폭으로 치솟았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리스 재선거 결과에 대한 전망은 성급해 보인다. 다만 현재로선 급진좌파연합이 제1당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현지 여론조사 전문기관 ‘펄스RC’가 5월17일 내놓은 조사 결과를 보면, 급진좌파연합에 대한 지지율(22%)이 신민주주의당(19.5%)을 처음으로 추월했다. 사회당은 14%로 3위를 기록했다.
“그리스의 현 위기가 긴축정책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 구제금융의 전제조건에 대한 재협상은 없을 것이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5월16일 에 출연해 이렇게 밝혔다. 그는 “구제금융에 따른 ‘의무’를 이행하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그리스 국민이 판단해야 할 일”이라면서도, “(지난 5월14일 열린) 유럽 재무장관회의에서 밝힌 것처럼 그리스가 유로존에 머물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이를 위해선 긴축정책 추진이란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압박 수위를 높였다. 타협책은 없는 걸까?
그리스를 벼랑 끝으로 몰아선 안 된다
“그리스 국민은 긴축에 반대하면서도 유로존에 남기를 원하고 있다. 급진좌파연합은 둘 다 가능하다고 말한다. 정권을 잡으면 현실이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 급진좌파연합은 저항운동단체에서 현실정치를 이끌어가는 수권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것도 기록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독일의 중도좌파 성향 일간지 은 5월16일치 사설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약 3년에 걸쳐 그리스는 ‘초긴축’ 상태를 견뎌왔다. 곳곳에서 파열음이 들려왔지만 묵묵히 고통을 감내해왔다. 5월6일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은, 6월17일 재선거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날 게다. 그래서다. 한껏 졸라맸던 허리띠를 이제는 조금이라도 풀어줘야 한다. 그리스를 유로존 탈퇴라는 벼랑 끝으로 내모는 건 위험하다. 그리스가 무너지면 유럽도 무사할 수 없다. 은 “6월 재선거에서 어느 진영이 승리하든, 유럽연합과 국제통화기금은 일정한 양보를 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새 정부도 단명에 그쳐 혼란이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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