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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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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만4400끼니의 투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수감자 1600명 단식에도 지구촌 언론 침묵
28일 단식 끝에 가족 면회 등 타협안 끌어내
등록 2012-05-24 14:14 수정 2020-05-03 04:26

하루 세끼를 먹어야 산다. 28일이면 84끼니다. 77일이면 231끼니다. 간단한 산수다.
이스라엘 감옥에 갇힌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이 지난 4월17일 집단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전체 4800여 명 가운데 이날부터 스스로 곡기를 끊는 무모한 싸움에 참여한 이들은 줄잡아 1600여 명에 이르렀다. 수감자 가운데 약 320명은 기소도, 재판도, 기한도 없이 구금돼 있는 이른바 ‘행정구금자’다.

최장기 단식자들, 462끼니 굶어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단식투쟁이었다. 이유는, 그리 복잡할 것도 없었다. 극한 수감 환경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달리 길이 없었던 게다. 단식에 나선 이들의 요구사항은 크게 세 가지였다. ‘가족 면회를 좀더 자주 할 수 있게 해달라, 독방 생활을 그만하게 해달라, 행정적 구금을 중단하라.’
고립된 채 굶주리는 이들에게, 세상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리처드 포크 유엔 팔레스타인 인권 특별보고관이 지난 5월12일 아랍 위성방송 인터넷판에 기고한 글에서 “언론이 실종됐다”고 질타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 이처럼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단식을 하는데, 서방 언론이 철저히 침묵을 지키겠느냐”며 “오로지 팔레스타인 문제이기 때문에 철저히 침묵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단식 기간이 길어질수록 긴장감도 높아졌다. 특히 행정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지난 2월28일부터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빌랄 디압(27)과 타에르 할랄레(33)의 단식이 70일을 넘기자 위기의식이 커졌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건국기념일, 곧 팔레스타인의 ‘나크바’(재앙의 날)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집트 정부의 중재로 지난 5월14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쪽이 단식을 풀기로 전격 합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전한 협상 결과를 보면, 이스라엘 정부는 독방 생활을 해온 팔레스타인 수감자 19명을 일반 감방으로 옮기기로 했다. 또한 하마스가 장악하고 있는 가자지구에 사는 이들도 그 외 지역에 수감돼 있는 가족·친지를 면회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행정구금자들을 석방하겠다는 다짐은 없었다. 그저 “관련 부처가 공동으로 내부 검토를 거쳐 적절한 의견을 내게 될 것”이라고만 밝혔다.
협상이 타결된 다음날,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은 단식을 풀었다. 1600명이 하루를 굶으면 4800끼니다. 단식은 28일 동안 이어졌다. 1600명이 모두 13만4400끼니를 굶은 게다. 빌랄 디압과 타에르 할랄레는 77일을 굶었다. 모두 462끼니의 배고픔이다. 이날 팔레스타인 땅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예루살렘의 아랍인 거주구역 일대에선 크고 작은 시위가 벌어졌다. 나크바를 기리며, 오랜 단식투쟁을 ‘승리’로 이끈 수감자들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 그들만의 나라가 아니다
1948년 그날, 이스라엘군은 약 76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자기 땅에서 쫓아냈다. 그로부터 68년이 흐른 지금, 중동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은 약 470만 명에 이른다.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출신 주민도 약 130만 명이나 된다. 이스라엘 인구의 20%는 아랍인이다. 이스라엘은 ‘유대인만의 나라’가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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