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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유럽의 문제는 일자리야

시장의 신뢰 회복 위해 긴축재정 처방 ‘강요당한’ 유럽 각국, 오히려 ‘경기침체’ 빠져…
문제 근본인 ‘일자리 적자’ 해결하지 않으면 ‘더블딥’ 가능성 높지만, 부자증세 걸림돌
등록 2012-05-11 15:26 수정 2020-05-03 04:26

국제통화기금(IMF)의 자료를 보자. 2011년을 기준으로 유럽연합(EU)의 역내총생산은 12조6290억유로(약 17조5780억달러) 규모다. 같은 자료에서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약 15조달러로 추산됐으니, ‘단일경제’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유럽 경제가 흔들리면 지구촌 전체가 요동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경제위기 앞에 허리띠를 졸라맨 이후, 부쩍 ‘몸살’이 심해진 유럽의 모습이 불안하기만 한 이유다.
쉽게 풀어보자. 벌이보다 씀씀이가 많았다. 빚이 터무니없이 늘었다. 정상적인 이자율로는 더 이상 돈을 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리를 쓰며 빚이 빚을 낳았다. 돌려막기에 신경 쓰느라, 일자리조차 변변히 챙길 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씀씀이부터 줄여라.’ 휘청이던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받아든 처방이었다.

“재정적자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
그리스·스페인·아일랜드·포루투갈 등 막대한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나라들은 유럽중앙은행(ECB)의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긴축재정안을 마련해야 했다. 부채 규모를 줄여야 이자율을 낮출 수 있다. 이를 통해 시장의 믿음을 얻을 수 있다. 시장의 신뢰는 곧 투자로 이어진다. 그래야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경제성장도 이뤄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다. 1990년대 말 한국을 포함한 신흥개발국가들이 IMF에서 들은 설교다. 유럽에선, ‘약발’이 잘 듣지 않고 있다.
유럽 각국이 막대한 빚더미에 허덕이게 된 직접적 계기는 2008년 금융위기다. 세계적 차원의 현상이었다. 일개 국가의 잘못된 정책 판단이 불러온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국가 경제가 송두리째 무너질 수도 있었다. 금융시장의 붕괴만은 막아야 했다. 그 뒤의 얘기는 익히 아는 바다.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재정적자 폭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유다. 미 재무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가 지난 4월30일치 에 기고한 글에서 “재정적자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증상이었을 뿐”이라고 쓴 것도 이 때문이다.
벌써 3년이 흘렀다. ‘긴축’의 결과는 어땠을까? 서머스 교수의 지적처럼 “질병의 뿌리를 놔둔 채 증상만 치료하려 들면, 환자가 괴로워지는 법”이다. 유럽에서도 그랬다. 서머스 교수는 “유럽 경제위기의 본질은 경제성장이 둔화된 것”이라며 “이자율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상황에서, 부채는 통제가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유럽 각국이 집중해야 할 것은 경제성장이며, 이런 측면에서 긴축정책은 잘못된 방향”이라는 게다.
실제 EU의 통계청 격인 ‘유로스태트’가 5월3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상황이 좋지 않다. 지난 3월 말 현재 유로존 17개국의 평균 실업률은 10.9%까지 치솟았다. 바야흐로 유럽 전역으로 경기침체의 그늘이 번지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EU 27개 회원국의 평균 실업률도 10.2%를 기록했다. 1999년 유로화가 유통되기 시작한 이래 최악의 상황이다.

ILO, 2007년 이후 5천만 개 일자리 감소
EU 회원국 가운데 현재 두 자릿수 실업률에 허덕이고 있는 나라도 13개국이나 된다. 지난 3월 말 현재 스페인이 24.1%, 그리스가 21.7%로 ‘최악’과 ‘차악’을 기록하고 있다. ‘경기침체’를 뜻하는 2분기 이상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나라도 12개국, 이 가운데 9개국이 유로존에 속한다. 최근 들어선 유럽 제1의 경제대국인 독일조차 ‘위험국가’로 분류되고 있는 형편이다. 은 5월2일 인터넷판에서 “지난해 4분기에 0.2%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독일이 올 1분기에도 마이너스 성장을 했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고 전했다. 독일의 1분기 경제지표는 5월15일께 발표될 예정이다.
“재정적자보다 심각한 게 ‘일자리 적자’(Jobs Deficit)다. 일자리가 사라져 사회불안이 커지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딸린 국제노동연구소 레이먼드 토레스 소장은 지난 4월26일 펴낸 에서 “조사 대상국 106개국 가운데 57개국이 2010년에 비해 2011년에 사회적 불안이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4월29일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스페인 전역 50개 도시를 휩쓴 대규모 긴축재정 반대 시위는 토레스 소장의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스페인에선 성인 4명 가운데 1명, 25살 이하 청년 2명 가운데 1명이 실업자 신세다. 그럼에도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 정부는 초긴축 재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앞서 네덜란드에선 지난 4월23일 마르크 뤼터 총리가 이끄는 중도보수 정부가 극우정당 등과의 긴축예산안 협상 결렬로 내각이 총사퇴하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ILO의 보고서를 보면, 긴축정책을 채택한 국가의 90%에서 실업률이 경제위기 이전인 2007년 수준을 훨씬 웃돌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경제위기 이전에 견줘 무려 5천만 개의 일자리가 줄었단다. ILO는 “선진개발국을 중심으로 상당수 국가에서 긴축재정과 함께 강력한 노동시장 개혁 방안을 밀어붙여, 노동시장에 강력한 타격을 주는 한편 일자리 창출에도 악영향을 끼쳤다”며 “이로 인해 세수가 줄고, 그에 따라 재정적자가 다시 커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유로존 각국이 긴축재정에 몰입할수록 고용위기가 심각해져, 경제가 새로운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게다. 이른바 ‘더블딥’에 대한 경고다. 은 지난 4월26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의 말을 따 “(경제위기 이후) EU 27개 회원국이 줄인 예산 총액은 약 4500억유로(약 6천억달러)에 이른다”며 “그리스 같은 작은 나라라면 몰라도, 영국·프랑스 등 거대 경제까지 한꺼번에 긴축에 나서, 그 경제적 효과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이어 “경제 규모가 큰 국가에서 긴축정책이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며 “유럽은 지금 더블딥으로 가는 자살 행위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1%에게 불편한 진실, 부자증세
“경제위기가 닥치면 사회적 약자는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진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면 경기를 부양시킬 수 있다. 경제학 교과서에 나와 있는 얘기다. 정부 지출을 늘려 일자리를 창출하는 한편 재정적자를 줄이려면, 부자들의 세금을 올려야 한다. 모두들 이를 잘 알고 있다.” 최근 (End This Depression Now)란 책을 펴낸 폴 크루그먼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지난 5월1일 에 출연해 이렇게 강조했다. 소득 상위 1%에겐 ‘불편한 진실’일 게다. 그래선가? ‘긴축’은 계속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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