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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블루칼라’ 대통령, 르펜?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선 17.9% 득표로 ‘압도적’ 3위,
블루칼라 계층에선 1위(35%)… 국수주의로 세계화 피해 계층 농민·청년 파고들고,
세련된 극우 이미지로 ‘10년 내 집권’ 노려
등록 2012-05-05 16:07 수정 2020-05-03 04:26

지난 4월22일 실시된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서 사회당(PS)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와 대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 현 대통령이 각각 28.63%와 27.18%의 득표율로 1·2위를 차지해 5월6일 치러질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그러나 지금 프랑스에서는 이번 대선 1차 투표의 진정한 정치적 승자는 따로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결선투표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17.9%의 득표율로 3위에 오른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후보가 바로 그다.

짐작과 다른 지지층, 좌파 지지층 흡수
사실 마린 르펜의 ‘성공’은 이미 지난해부터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예견되고 있었다(858호 세계 ‘인간의 얼굴을 한 극우의 공습’ 참조). 그럼에도 극우 이념을 앞세우고 1972년 창당된 이래 국민전선이 이번 선거에서 사상 가장 높은 지지율과 가장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하는 일이 현실화하자 프랑스 정치권은 온통 충격에 휩싸였다. 마린 르펜이 아버지인 장마리 르펜에게서 당권을 넘겨 받은 것은 불과 1년여 전이다.
프랑스에서 극우정당의 화려한 부상은 무엇보다 ‘인간의 얼굴을 한 극우’라는 표현으로 축약되는 마린 르펜의 새로운 대중 접근 전략이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 장마리 르펜과 달리 극단적이지 않은, 세련되고 정제된 표현과 화법으로 극우적 메시지를 ‘순화’시켰다. 또한 그는 탁월한 대중 친화력을 바탕으로 지난해부터 지방 곳곳을 샅샅이 훑으며, 극우정당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을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벗겨내왔다.
국민전선 마린 르펜 후보의 주요 지지층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뜻밖의 현실과 만날 수 있다. 극우정당의 새로운 지지 기반이 그동안 주로 좌파 혹은 진보의 텃밭으로 여겨지던 연령·지역·직업적 계층들과 상당 부분 중첩돼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청년·농민·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좌파 진영에 우호적이라는 기존의 프랑스 정치 공식이 마린 르펜의 ‘새로운 국민전선’ 앞에서 한꺼번에 무너져내리고 있는 것이다.
시앙스포와 소프라그룹 등이 꾸린 여론조사 산학연 컨소시엄(TNS Sofres-Sopra group-Sciences Po)이 대선 1차 투표 당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18~24살 젊은 연령층에서 마린 르펜의 지지율은 23%로 나타났다. 사르코지의 지지율 26%와 올랑드의 지지율 25%와 엇비슷한 수치다. 노년층의 극우정당 지지율이 높을 것이란 통념을 깨고, 르펜의 지지율은 오히려 65살 이상에서 11%로 가장 낮게 나타났다. 이러한 프랑스 젊은이들의 극우파 지지 추세는 최근 다른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전통적 좌파 지지층인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어떨까? 무려 35%가 마린 르펜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계층에서 올랑드는 25%, 사르코지는 15%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 마린 르펜과 3위를 다투며 좌파 진영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좌파전선의 장뤼크 멜랑숑 후보는 정작 노동자층에서 11%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반면 ‘화이트칼라’ 관리직들은 오히려 좌파의 올랑드에게 40%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높은 실업률은 ‘국수주의’ 토양
도시와 농촌에서도 ‘기존 공식’이 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선 1차 투표 최종 개표 결과, 마린 르펜은 주요 대도시에서 10%의 지지율을 채 넘기지 못했다. 이른바 ‘계급투표’ 성향이 가장 명확한 파리의 경우만 해도, 부유층이 많이 사는 16구에서 사르코지가 64.85%의 지지를 받은 반면, 르펜은 5.58%의 지지만 받았다. 빈곤층이 많이 사는 20구에서도 올랑드가 43.09%의 지지를 받은 반면, 르펜은 6.94%의 지지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지방으로 가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프랑스 남부 가르 지방에서 마린 르펜은 25.51%의 지지율을 올려, 24.86%를 얻은 사르코지와 24.11%를 얻은 올랑드를 모두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이뿐이 아니다. 르펜은 프랑스 북부 파드칼레 지방에서도 25.53%, 동부 모젤 지방에서도 24.73%를 얻는 등 전국적으로 대도시를 제외한 다수의 농촌 지역에서 골고루 높은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결과를 두고 마린 르펜이 얻은 청년·농민·노동자들의 표심은 프랑스의 체감경기 악화와 높은 실업률에 기인한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국내 경제 문제의 해법으로, 극우정당이 내세운 ‘국수주의’라는 위험한 선택지를 대중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르펜의 지지율이 급등한 지방들이 대부분 저가의 신흥국 상품에 밀려 공장 문을 닫거나 해외 이전한 공장이 많은 ‘반농반공’(半農半工) 지역이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극우 이념의 전형적 귀결점인 새로운 이민자에 대한 적대심과 기존 이민자에 대한 배척의 심화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2년 전 파리에서 재불 중국인 2만여 명이 치안 불안을 이유로 거리에 나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당시 프랑스 언론은 기존 무슬림 이민자와 새로운 중국계 이민자의 ‘게토 갈등’ 정도로 치부했었다. 하지만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프랑스 사회에서 무슬림 이민자에 대한 편견이 전례 없이 중국계 이민자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르펜 지지자 달래는 사르코지

마린 르펜의 ‘탈악마화’ 성공을 두고 프랑스 언론이 연일 우려를 표명하자, 르펜 지지자들은 언론이 자신들을 ‘악마화’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이런 흐름을 읽은 사르코지 대통령은 4월25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나는 마린 르펜에게 표를 던진 국민을 악마화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강조했다. 결선투표를 앞두고, ‘상처받은 그들’의 표심을 위로하고 나선 셈이다. 그러는 새 마린 르펜은 이번 선거를 사실상 자신의 승리로 평가하고, 오는 6월 총선을 필두로 10년 내 집권당이 되겠다는 ‘위험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파리(프랑스)=윤석준 통신원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유럽학연구소 박사과정 연구원 semi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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