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패배에도 ‘기적’처럼 회생했다. ‘좀비’라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며 석 달여를 버텨왔다. 그랬던 ‘2인자’가 갑작스레 작별을 고했다. 지루하게 이어져온 예선전도 이로써 마무리됐다. 여전히 2명의 후보가 남아 있지만, 오는 11월6일 치르는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는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로 사실상 결정됐다. ‘마라톤’의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려퍼진 게다.
자금 부족에 차기 노린 선택
공화당 보수 진영의 암묵적 지원 속에 경선 판도를 흔들어온 릭 샌토럼 후보가 4월10일 경선 포기 의사를 밝혔다. 샌토럼 후보는 이날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가족한테 둘러싸인 채 “가족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대선 출마를 결심한 것처럼, 지난 주말 가족과 상의해 경선 포기를 결정했다”며 “오늘부로 선거운동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앞서 공화당 경선에서 꾸준히 3위를 달려온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도 “내가 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없다”고 인정한 바 있다. 줄곧 4위로 처진 극우 성향의 론 폴 후보가 여전히 경선 완주를 고집하고 있지만, 샌토럼 후보의 사퇴로 롬니 후보는 2012년 미 대선 공화당 후보로 확정됐다는 데 이견은 없다.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미 주류 언론이 이날 ‘드디어 본게임이 시작됐다’고 일제히 보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기실 공화당 경선 판세는 이미 지난 3월 초반부터 롬니 후보 쪽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그럼에도 샌토럼 후보는 ‘완주’를 다짐하며 부지런히 보수층의 표밭을 다져왔다. 이 시점에 전격 사퇴를 결정한 이유는 뭘까? 정치 전문 인터넷 매체 <폴리티코>는 4월10일 “샌토럼 후보의 경선 포기는 ‘차기’를 노린 승부수”라고 평가했다.
사실상 승부는 끝났음에도 경선이 격화하며 당 안팎에서 ‘본선 경쟁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던 터다.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둔 채 ‘대의’를 위해 결단을 내리는 모양새를 취하는 건, 장기적으로 정치적 활로가 될 수 있다. 하긴 막대한 선거자금으로 무장한 롬니 후보를 꺾는다는 게, 애초부터 샌토럼 후보에겐 역부족이었는지 모른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최근 집계한 자료를 보면, 롬니 후보는 유권자 1명당 17.14달러의 선거자금을 쏟아부었다. 샌토럼 후보는 그 6분의 1에도 못 미치는 2.54달러였다.
현실도 녹록지 않았다. 샌토럼 후보 쪽은 애초 4월24일로 예정된 펜실베이니아주 경선에 큰 기대를 걸어왔다. 그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에는 모두 72명의 대의원이 걸려 있다. 펜실베이니아에서의 승리를 교두보 삼아, 대의원이 많고 보수 색채가 강한 텍사스주(155명) 등에서 ‘역전’을 노려보겠다는 전략이었다. 문제는 펜실베이니아의 상황이 샌토럼 후보의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샌토럼의 유산을 떠안고 가야하는 롬니
경선 초기인 지난 1~2월 한때 샌토럼 후보는 현지 여론조사에서 롬니 후보를 20%포인트까지 앞서나갔다. 하지만 3월 중순 이후 지지율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같은 기간 펜실베이니아에서 텔레비전 선거광고를 집중시킨 롬니 후보의 지지율은 급반등했다. 정치 전문 인터넷 매체 <리얼클리어폴리틱스>가 집계한 자료를 보면, 지난 3월20일~4월4일 샌토럼·롬니 두 후보의 평균 지지율 격차는 1.7%포인트까지 좁혀졌다.
특히 지난 4월4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퍼블릭폴리시폴링’(PPP)이 내놓은 조사 결과에선, 롬니 후보가 42%의 지지율을 얻어 샌토럼 후보(37%)를 5%포인트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게다. 앞서 2006년 연방 상원의원 3선 도전에 나선 샌토럼 후보는 현역 의원 신분이었음에도, 민주당 밥 케이시 후보에게 무려 17%포인트 차이로 참패한 바 있다.
“샌토럼 후보가 공화당의 정강·정책은 물론 경쟁자인 롬니 후보의 정책적 입장까지 뒤바꿔놨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4월11일치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샌토럼 후보는 사퇴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이 본선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란 게다. 신문은 “기독교 우파 진영의 폭넓은 지지를 받은 샌토럼 후보가 선전을 거듭하자 공화당 주류와 롬니 후보까지 정책적으로 오른쪽으로 더욱 기울 수밖에 없었다”며 “이는 본선에서 중도파 유권자들의 표를 얻는 데 치명적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전했다.
진보 성향의 매사추세츠 주지사 출신 롬니 후보는 공화당 내에서 이른바 ‘온건파’로 평가돼왔다. 하지만 극우적 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샌토럼 후보가 예상외의 선전을 이어가자 롬니 후보도 그에 보조를 맞춰온 게 사실이다. 이를테면 낙태 반대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고, 이란에 대해선 ‘군사적 행동’을 거론하며 강경한 자세를 취해왔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 개혁 정책(이른바 ‘오바마 케어’)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해왔다. 정작 오바마 행정부 쪽에선 롬니 후보가 매사추세츠 주지사 시절에 입안한 건강보험 개혁 정책이 ‘오바마 케어’의 모델이라고 반박한다.
특히 선거운동 과정에서 ‘피임’에 대한 연방정부 예산 지원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밝힌 것을 두고는 논란이 커지고 있다. 역시 기독교 보수 성향의 유권자를 의식한 발언이었지만, 민주당 쪽에선 ‘여성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이는 고스란히 ‘표심’으로도 연결된다. <usa>와 갤럽이 공동조사해 지난 4월1일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롬니 후보는 남성 유권자들 사이에선 오바마 대통령을 근소한 차로 앞서는 반면 여성 유권자 사이에선 19%포인트나 뒤졌다. 결국 오바마 대통령(51%)이 롬니 후보(44%)를 7%포인트 앞서는 형국이 됐다.
당내 보수파, 당밖 무당파 지지 얻어야
예선을 마친 롬니 후보는 자신의 애초 정책 방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사실상 후보로 확정됐지만, 롬니 후보는 여전히 당내 입지가 불안해 보인다. 시사주간지 <네이션>은 4월11일 인터넷판에서 “메릴랜드 등 3개 지역에서 경선이 치러진 지난 4월3일까지 롬니 후보가 경선에서 얻은 평균 지지율은 약 41%”라며 “나머지 59%의 공화당 지지자들은 여전히 롬니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더구나 경선 과정에서 내놓은 발언을 뒤집는다면, ‘말 바꾸기’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오바마 캠프에서 이를 가만둘 리 없다. 이래저래 운신의 폭이 좁다는 얘기다. 이를 두고 <파이낸셜타임스>는 4월11일치에서 “샌토럼 후보 사퇴 이후 롬니 후보는 당내에선 보수파의 지지를, 당 밖에선 중도·무당파 유권자의 표심을 얻어야 하는 이중의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예상보다 길어진 ‘과열 경선’이 남긴 상흔도 크다. 샌토럼 후보의 경선 전략은 비교적 단순했다. 그는 자신을 ‘노동자 계급’으로 포장하는 한편, 롬니 후보에겐 ‘부유한 자산가’란 딱지를 붙였다. 실제 금융업체를 운영했던 롬니 후보의 자산 규모는 2억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010년을 기준으로 그가 낸 세금의 평균세율은 고작 13.9%로 월급쟁이 평균치보다 낮았다. 경선 과정에서 드러난 롬니 후보의 약점은, 본선에서 고스란히 민주당의 ‘공격 포인트’가 될 터다. 이래저래 쉽지 않은 사세다. 차기 유력 대선주자로 꼽히는 바비 진달 루이지애나 주지사를 포함한 공화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샌토럼 후보 사퇴 직후 봇물처럼 롬니 후보 지지 선언을 쏟아낸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다.
샌토럼 후보가 사퇴 회견을 하고 있던 무렵, 오바마 대통령은 플로리다주 보카레이턴에 자리한 플로리다애틀랜틱대학교에서 공화당의 부자감세 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제 미국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때”라며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일을 지속할 것인지, 국가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통해 일자리 안정을 기하기 위한 쪽에 투자를 해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롬니 후보를 직접 겨냥한 발언이다.
부쩍 높아진 롬니 겨냥한 오바마 진영의 비판
“롬니 후보가 아니라 그를 지원하는 기득권층이 결국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의 승부를 갈랐다.” 샌토럼 후보 사퇴 회견 직후 오바마 대통령의 선거대책본부는 성명을 내어 이렇게 주장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멘토’이자 선거캠프 전략가인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이날 <허핑턴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돈으로 사랑을 살 순 없지만, 공화당 대선 후보직은 살 수 있는 모양”이라고 비꼬았다. 표현의 수위가 높아졌다. 시범경기의 탐색전이 끝나고, 마침내 본시즌이 개막한 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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