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1일 서아프리카 말리의 수도 바마코 북부 카티 지역에 자리한 순디아타 케이타 군기지가 소란스러워졌다. 신임 국방장관에 임명된 사디오 가사마 장군의 위로방문 자리였지만, 현지 병사들의 분위기는 험악하기만 했다. 가사마 장관은 몰려든 병사들에게 신형 무기 지원이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한 뒤, 군사반란이 일어난 북부 지역으로 병력을 증파하겠다는 발언으로 옮아가는 참이었다. 어디선가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프리카연맹의 비난, 유엔의 촉구
지난 1월17일 말리 북부 아자와드 일대에서 토착민인 투아레그족이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반란’을 진압하려고 정부군이 급파됐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두 달여 만에 줄잡아 정부군 장병 1천 명이 죽거나, 사로잡히거나, 탈영을 했다. 특히 지난 1월24일엔 투아레그족 반군이 아구엘혹 지역의 정부군 기지를 ‘접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기지를 지키고 있던 정부군 병사들은 탄약이 동난 상태였단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수도 바마코에선 성난 군 가족들의 시위가 연일 이어져온 터였다.
국방장관을 공격한 병사들은 삽시간에 기지를 장악하고, 무장을 갖췄다. 이어 수도 바마코로 행진해나갔다. 그날 밤 바마코 중심가 대통령궁이 화염에 휩싸이고 있을 때, 낯선 초급장교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했다. 이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아마두 투마니 투레 정권에 종지부를 찍는 책임을 떠맡기로 결정했다”며 “말리가 다시 단합되고 자긍심을 되찾게 되면, 지체 없이 민주적으로 선거를 치러 뽑힌 대통령에게 권력을 넘길 것”이라고 발표했다. 군사 쿠데타다.
쿠데타군은 이내 ‘민주주의 회복과 국가 재건을 위한 위원회’(CNRDRE)를 구성하고, 아마두 하야 사노고(40) 대위를 의장으로 옹립했다. 이윽고 사노고 의장 명의로 포고령이 내려졌다. 무기한 통행금지령이 내려졌고, 모든 국경이 차단됐다. 헌정질서는 중단됐다. 투레 대통령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튿날인 3월22일, 바마코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afp>은 “대낮부터 술에 취한 병사들이 한 손에는 맥주병을 든 채, 다른 손으로 총을 공중으로 쏴대고 있다”며 “일부 쿠데타군은 대통령궁과 정부청사 등지에서 평면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니터 등 값나가는 물건을 약탈하는 데 열 올리고 있다”고 전했다.
국제사회는 발 빠르게 대응했다. 아프리카연맹(AU)이 비난 성명을 내놨고, 유엔도 ‘헌정질서 회복’을 촉구했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는 3월27일 순회 의장국인 코트디부아르의 수도 아비장에서 긴급회의를 열어 말리의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키는 한편, 이른 시일 안에 진상조사단을 말리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ap> 등 외신들은 “ECOWAS는 필요할 경우 (말리의 헌정질서 복구를 도울) 평화유지군을 투입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 국무부도 군부의 권력 장악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놨다. 하지만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쿠데타 첫날엔 “현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이튿날인 3월22일 빅토리아 뉼런드 국무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말리에서 발생한 사건을 쿠데타로 보느냐’는 질문에 “이번 군사행동이 번복돼 민주정부가 회복되기를 바란다”며 답변을 피해갔다.
대테러의 최전선이 된 아프리카 ‘사헬’
미국이 한 해 말리에 지원하는 원조 총액은 약 1억4천만달러 규모다. 미 국무부는 쿠데타 발생 엿새 만인 지난 3월26일에야 식량 등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군사원조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 등의 보도를 보면, 미 국무부는 이날도 말리에서 발생한 ‘군사행동’을 쿠데타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저 ‘반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둘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미국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무너뜨리는 쿠데타가 발생한 국가에 대해선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그 어떤 원조도 제공할 수 없게 법으로 정하고 있다. 일단 ‘쿠데타’로 규정하고 나면, 원조를 재개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 복잡해진다. 정국이 안정되고,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거를 치르고, 그에 따라 새로운 세력이 집권해야 군사 등 여타 분야에 대한 원조 중단 조처를 풀 수 있다. 결국 미국이 쿠데타를 기정사실화하지 않는 것은 말리에 대한 군사원조 중단 기간을 최소화하려는 의도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사연이 조금 길다.
2001년까지만 해도 미군은 아프리카 대륙에 주둔기지가 없었다. 하지만 9·11 동시테러가 발생한 뒤 불과 2년 만에 지부티의 레로니어 캠프 등지에 주둔하는 군 병력과 민간 요원이 1800여 명으로 급속히 불어났다. 북아프리카 일대의 이슬람권 국가들로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이 침투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사하라 사막에서 수단의 대초원(사바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흔히 ‘사헬’이라 부른다. 서쪽으로 대서양 연안에서 동쪽으로 홍해 연안에 이르는 아프리카 북부 일대가 사헬 지역에 속한다. 서쪽부터 세네갈, 모리타니 남부, 말리, 부르키나파소, 알제리 남부, 니제르, 나이지리아 북부, 차드, 카메룬 북부, 수단, 에리트레아까지다.
9·11 동시테러 이후 미 국무부에 꾸려진 대테러청은 2002년 11월7일 ‘범사헬구상’(PSI)을 발족시키고, 막대한 군사·경제적 원조를 퍼붓기 시작했다. 말리와 니제르·차드·모리타니 등 4개국이 참여했는데,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측면 지원하는 한편 현지에서 알카에다 등의 위협을 막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자체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2005년 6월 미국은 PSI의 몸집을 키워, ‘범사하라 대테러 동반자’(TSCTP)로 재탄생시켰다. 기존 PSI 회원국에 알제리·모로코·튀니지 등 이른바 마그레브 지역 국가와 나이지리아·세네갈 등이 새로 참여했다. 그해부터 TSCTP 참가국들은 미군의 주도 아래 ‘플린트록’이란 작전명으로 3주짜리 연례 군사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이어 2007년 2월 미 국방부는 아프리카대륙 53개국을 관할하는 아프리카사령부(아프리콘) 창설을 발표했다. 아프리카도 ‘대테러 전쟁’의 최전선이 된 게다.
미 해병대 교육 이수 배지 단 쿠데타 주역
PSI 시절부터 미국은 아프리카 각국의 초급장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제군사교육훈련’(IMET)에 공을 들였다. 미 국방부에 딸린 국방안보협력청(DSCA)의 자료를 보면, IMET는 “훈련생들이 미군의 조직과 체계, 군의 민간 통제를 핵심으로 하는 체계와 절차를 체험”하고 “미국식 생활방식, 특히 민주적 가치와 인권존중·법치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핵심 목적으로 한다.
해마다 약 1만 명의 훈련생이 미국 안팎에 마련된 150여 개의 군사학교·기관에서 모두 4천 개가 넘는 코스를 이수하게 된다. 현장실습이 병행되며, 교육 대상국으로 직접 교관을 파견해 훈련하기도 한단다. 흥미로운 건, 이번 말리 쿠데타를 주도한 사노고 대위 역시 IMET의 수혜자였다는 사실이다. <afp>은 지난 3월27일 미 국방부 관계자의 말을 따 “(사노고 대위는) 1998년 이후 적어도 5차례 미국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전했다.
미 국방부가 밝힌 내용을 종합하면, 사노고 대위는 1998년 조지아주 포트베닝 기지의 미 육군 하사관학교에서 기본교육을 이수했다. PSI 초기인 2003년엔 미 버지니아주 퀀티코에 자리한 해병 하사관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2004년엔 텍사스주 랙클랜드 공군기지에서 영어연수를 받았다. 이어 2007년엔 애리조나주 포트후아추카에서 미 육군 정보장교 기본교육을, 2010년엔 다시 포트베닝에서 보병장교 기본교육을 각각 이수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지난 3월28일 인터넷판에 올린 인터뷰 기사를 보면, 사노고 대위는 이번 쿠데타의 목표로 “말리 군부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서아프리카 사헬 지역의 안정화군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을 첫손에 꼽았다. <타임>은 “사노고 대위가 입고 있는 군복에 미 해병대의 교육을 이수했음을 기념하는 배지가 매달려 있었다”고 전했다.
애초 미국은 지난 2월 말리에서 ‘플린트록 2012’ 훈련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북부 투아레그족의 봉기로 현지 상황이 여의치 않아져 훈련 연기를 결정했다. 제러미 키넌 영국 런던대학 교수가 지난 3월20일 <알자지라> 인터넷판에 기고한 글을 보면, 투아레그족이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말리 정부군과 맞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키넌 교수는 “말리 북부 이와자드 지역을 중심으로 약 100만 명의 투아레그족이 거주하고 있다”며 “이들은 1962~64년과 1990~95년, 2007~2009년에도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무장봉기를 일으킨 바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번 봉기는 앞선 세 차례의 것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투아레그족들의 무장 수준이 대폭 강화됐기 때문이다. 무기의 출처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리비아다. 지난해 내전이 불을 뿜으면서 다급해진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은 투아레그족 전사들을 ‘용병’으로 투입했다. 같은 해 8월 트리폴리가 반군 수중에 떨어져 귀국길에 오른 투아레그족 전사들의 손에는 카다피 정권이 쥐어준 중화기가 들려 있었다. 2천~3천 명으로 추산되는 잘 무장되고 실전 경험까지 갖춘 이 ‘리비아 참전군’들이 이번 봉기를 촉발했다는 게다. 말리 정부군이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를 알 만하다.
말리를 넘어서는 쿠데타의 파장
투아레그족의 무장봉기를 이끌고 있는 ‘아자와드민족해방운동’(MNLA)은 미 국무부가 테러단체로 규정한 ‘이슬람 마그레브 지역 알카에다’(AQIM)와 맞닿아 있다. 이웃 나라인 알제리와 모리타니가 그간 여러 차례에 걸쳐 “(투아레그족 거주 지역이) AQIM의 온상이 되고 있다”며 말리 정부를 비난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미 외교·안보 전문 제임스타운재단이 3월23일 내놓은 ‘말리의 대혼란: 쿠데타의 파장’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쿠데타로 말리 정부군의 북부 지역 지휘체계가 무너져, MNLA 진영이 전략적 요충지인 북부 가오·키달·팀부크투 등지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다”며 “알카에다 역시 이번 쿠데타로 말리에서 세력을 넓힐 수 있는 호조건을 만난 셈”이라고 지적했다. 미 국무부가 말리의 쿠데타를 ‘쿠데타’로 부르지 못하는 다급함이 여기서 나온다. 말리에 드리워진 ‘대테러 전쟁’의 그림자가 짙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afp></ap></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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