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내 가장 큰 위선자인 보시라이가 다시는 연기를 계속 하지 않기를 바란다. 만일 이런 간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면 그것은 중국 미래의 가장 큰 불행이자 민족의 재난이 될 것이다. …‘창훙다헤이’(唱紅打黑·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고 부패를 척결한다) 같은 황당한 운동은 완전히 그가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기 위한 쇼였다. 그것은 보시라이의 문화대혁명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껌으로 여기며, 다 씹으면 맘대로 뱉어버리고 누구의 발 아래 밟히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최대의 범죄조직 두목이다….”
숙청과 맞물린 ‘범죄와의 전쟁’
지난 2월10일 중국 사회과학원 사회학연구소 연구원이자 여성·동성애 인권운동가인 리인허(작고한 유명 소설가 왕샤오보의 아내)가 경제주간지 의 인터넷 블로그에 공개한 ‘왕리쥔의 공개서한’ 내용 가운데 일부다. 이 서한은 2월2일 작성된 것으로 쓰여 있다. 이날은 충칭시 정부가 공식적으로 왕리쥔의 직무이동을 발표한 날이기도 하다.
왕리쥔은 이 편지를 작성한 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모종의 결단을 내리고, 미국 영사관행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한에서 보시라이를 “청렴한 체 가장하지만 누구보다 부패하고, 색을 밝히며, 재정을 맘대로 낭비했다”며 “충칭을 자기만의 왕국으로 만들었고, 중국의 최고 보스가 되지 못하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왕리쥔은 보시라이의 최측근이자 심복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보시라이가 2007년 12월 상무부 부장에서 충칭시 서기로 발령받자, 랴오닝시 성장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왕리쥔을 전격 ‘스카우트’해서 충칭시의 사법·공안 부문을 책임지게 했다. 왕리쥔은 중국 내 공안 분야에서 최고의 능력을 인정받는 실력자일 뿐 아니라, ‘동북 호랑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조직폭력배 사회에서도 두려워하는 인물로 알려졌다. 왕리쥔을 데려온 보시라이는 그를 이용해 대대적인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왕리쥔 이전의 사법국장이자 공안국장이던 원창을 부패 혐의로 체포해 사형시키는 등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했다.
원창 등 숙청된 많은 정적들은 보시라이 이전의 총칭시 서기인 왕양(현 광둥성 서기)과 허궈창(현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의 심복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 정가에서는 보시라이가 범죄와의 전쟁을 빌미로 자신의 최대 정치적 라이벌인 왕양의 수족들을 쳐냄으로써, 충칭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보시라이는 2007년 12월 충칭시 서기가 된 뒤, 창훙다헤이 운동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 정서 고취와 서민들을 위한 보장성 임대주택 정책 등 분배 위주의 경제정책과 공동부유에 초첨을 둬 충칭을 ‘좌파들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이런 보시라이의 새로운 충칭 만들기 방식은 중국 내외에서 ‘충칭 모델’로 불렸다. 충칭 모델은 국유기업의 민영화와 정부관리 기능의 축소 등 시장경제 확대에 초점을 둔 왕양의 ‘광둥 모델’과 대비되며 중국 내에서 두 지역을 둘러싼 ‘모델 논쟁’이 치열하게 불붙었다.
하지만 공평한 분배와 공동부유 실현 등 진정한 사회주의 경제 실현을 모토로 내건 충칭 모델의 많은 긍정적 측면에도 보시라이의 새로운 충칭 만들기 실험은 왕리쥔 사건으로 결국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커졌다. 그가 야심차게 진행한 창훙다헤이 운동은 시대를 역행하는 문화대혁명식 발상이라는 비판과 함께, 잔인하고 탈법적인 방법으로 물의를 빚었다.
보시라이는 마오쩌둥, 왕리쥔은 린뱌오?
왕리쥔 사건이 발생한 뒤 중국 인터넷에서는 ‘마치 1960년대 문화대혁명의 재현을 보는 것 같다’는 풍자가 널리 떠돌고 있다. 왕리쥔을 1960년대 문화대혁명 말기 마오쩌둥의 심복이었다가 나중에 그에게 반기를 들고 정권 탈취까지 노리다 결국 비행기를 몰고 몽골로 도망가다 추락해 사망한 린뱌오에 빗대고 있다.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 등에서는 보시라이의 낙마를 문화대혁명 때 ‘4인방’의 몰락에 비유하기도 한다. 당시 4인방의 체포 뒤 덩샤오핑이 전격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는데, 공교롭게도 왕리쥔 사건 이후 중국 정부와 언론매체에서는 연일 ‘개혁 심화’를 부르짖고 있다.
원자바오 총리는 지난 3월14일 양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전국인민대표대회)가 끝나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공산당은 ‘4인방’을 몰아낸 뒤 개혁·개방을 실시했지만 문화대혁명의 영향은 철저히 제거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정치 개혁 없이는 경제 개혁을 끝까지 진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거둔 성과도 잃을 수 있다”며 “사회적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특히 문화대혁명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원 총리의 이런 발언 바로 다음날 은 보시라이 해임 소식을 전격 발표했다. ‘보시라이의 문혁’이 막을 내린 것이다.
왕리쥔 사건이 불거진 이후, 중국 정계는 핵폭풍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양회가 끝난 직후인 3월15일 보시라이의 전격 해임에 이어 장더장 부총리가 충칭시 서기로 임명되는 등 발 빠르게 사태를 수습하고 있지만, 내부 권력투쟁의 ‘추태’를 숨기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내부 정보’가 유출됐다. 이 때문에 중국 정치 전문가들은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등 권력의 분배와 방향을 조율할수 있는 강력한 ‘조타수’들이 사라진 뒤 집단지도 체제로 변하면서 나타난 파벌정치의 부작용”으로 이번 사건을 해석하기도 한다. 차기 지도자로 내정된 시진핑이 ‘강력한 후원자’가 없는 첫 세대 지도자라는 점도 내부 권력투쟁의 불안정성을 부추긴 요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시진핑으로 권력이양 순탄치 않을 것”
이와는 달리, 왕리쥔 사건으로 드러난 고위층 내부의 권력투쟁 양상은 몇 년 전부터 가열되고 있는 중국 내부의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이자, 중국식 발전 방식을 둘러싼 노선 혹은 모델 투쟁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미국 경제일간지 은 지난 3월13일 중국 전문가들의 말을 따 “왕리쥔 사건은 중국 정치권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뜻하며, 중국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와 관련되는 방향성 문제”라며 “후진타오 이후 시진핑으로의 권력이양이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3월15일 보시라이의 낙마 소식이 전해진 뒤, 중국 인터넷에서 좌파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동안 보시라이의 충칭 모델과 창홍다헤이 운동 등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온 중국 내 대표적인 좌파 인터넷 사이트들이 이날 이후 ‘서버 점검’을 이유로 일제히 문을 닫았다. 보시라이의 문화대혁명이 실패한 뒤, 중국은 다시 ‘좌측 불을 끄고 우향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베이징(중국)=박현숙 통신원 phschin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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