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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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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향해 치닫는 그리스 비극

한 달 안에 만기 도래하는 145억유로의 채무 막지 못하면 ‘디폴트’ 상태에 빠지는 그리스… -6.8% 성장률, 20.9% 실업률의 그리스 비극이 포르투갈·스페인·이탈리아로 전염될 가능성 더욱 농후해져
등록 2012-02-24 18:06 수정 2020-05-03 04:26

지난 2월15일이다. 그리스 수도 아테네 중심가 솔로모이가 63번지에서다. ‘노동자주택기구’(OEK) 청사 2층 외벽 난간에서 남녀 한 쌍이 자살 소동을 벌였다. 주인공은 OEK 소속 공무원 부부였다. 이 기관은 정부의 긴축재정 방침에 따라 문 닫을 처지다. 이날 오전 11시께 창문을 통해 건물 외벽으로 부부가 나왔다. 울며 불며 말리는 동료들에게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뛰어내리겠다.”
구조요원과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다. 설득 끝에, 남편이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부인은 남았다. 이날 오후 4시30분께까지 5시간여를 버텼다. 악을 쓰며 ‘난간시위’를 이어갔다. 이날 현지 일간 는 인터넷판에서 당시 상황을 담은 동영상과 함께 “OEK 소속 공무원들은 2월13일부터 청사 점거농성을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끝 모를 경제위기, 그 5년째를 맞은 그리스의 현주소다.

“지구촌 ‘위기의 제2단계’ 진입해”
길지도 않은 세월, 되짚어볼 일이다. 지구촌이 지금 겪고 있는 경제위기는 2008년 여름 미국에서 촉발됐다. ‘세계 3위’를 자랑하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그해 9월 파산했다. 곧장, 전세계 금융시장이 공황상태로 빨려들었다. ‘거짓신용’에 기대, ‘위험’마저 금융상품으로 찍어낸, 무모한 탐욕이 발단이었다. 제 능력을 넘어서 돈을 빌려쓴 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공수표’는 고스란히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은행도 잇따라 휘청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비우량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정부는 은행을 지켜야 했다. 덩치가 이미 커질 대로 커진 터다. 파산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자칫 국가경제가 파국으로 몰릴 수 있었다. ‘대마불사론’(Too Big to Fail)이 등장했다. 천문학적 금액의 공적자금이 금융권으로 흘러들었다. 영국 신경제재단(NEF)이 최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영국 중앙은행이 금융권에 내준 공적자금은 모두 1조3천억파운드에 이른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영국 공공의료제도(NHS)에 들어가는 1년 예산의 10배가 넘는 규모란다.
안정을 되찾았을까? 임박한 파국만 피했을 뿐이다. 불길은 계속 번져갔다. 은행은 파산을 면했지만, 그에 들어간 공적자금은 고스란히 국가가 부채로 떠안아야 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구촌 각국이 겪는 재정위기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국가 부채를 눈덩이처럼 불린 ‘과도한 복지’의 수혜자는 기실 거대 금융기관이었던 게다.
기업처럼, 국가도 파산할 수 있다. 경제의 체질이 약해졌을 때, 그 위험성은 더욱 높아지기 마련이다. 위기는 경기침체로 이어졌다. 경제활동이 위축되자, 조세수입이 줄었다. 반면 실업수당을 비롯한 복지예산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채무 상환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이자율이 치솟아도 쉽게 돈을 빌리기 어려워졌다. 국가에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이 다시 위험해졌다. 위기에 빠진 금융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대상은 국가밖에 없다. 이를 두고 NEF는 “지금 지구촌은 부채의 늪에 빠진 국가와 금융권이 맞물리는 ‘위기의 제2단계’로 진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스의 상황이 꼭 이 모양이다.
위기의 그늘 속에 치러진 2009년 10월 총선에서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총리가 이끄는 집권우파 신민주당은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사회당에 참패했다. 하지만 좌파 정부가 넘겨받은 그리스는 이미 수렁에 빠진 채였다. 신민주당 정부가 이미 오래전부터 재정 상황을 ‘마사지’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스 재정 적자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6% 남짓이라던 카라만리스 정부의 주장과 달리, 실제 적자폭은 GDP의 12.7%인 것으로 확인됐다.

긴축재정 요구가 경기침체 불러
채권자들은 아우성을 쳐댔다. 상환능력에 의심을 품고, 이자를 올려달라고 요구해왔다. 걷잡을 수 없는 악순환의 소용돌이가 시작됐다. 값싼 이자로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비싼 이자를 주고 새로 돈을 빌려야 했다. 그럴수록 채무 부담은 가중됐고, 이자율은 갈수록 높아졌다. 영국의 경제 일간지 가 지난 2월15일 집계한 최신 자료를 보면, 그리스 정부가 발행한 10년 만기 채권의 이자율은 34.83%에 이른다. 스위스(0.79%)·스웨덴(1.86%)·독일(1.91%)은 물론 유럽에서 그리스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이자율을 보인 포르투갈(12.15%)과 비교해도, 사실상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현재 그리스의 총 국가 부채는 GDP의 160%에 이른다. 이에 따른 이자 부담만도 GDP의 15%에 육박한단다. 이미 ‘한도’는 초과했다.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유로존 전체로 위기가 ‘전염’될 것을 우려한 유럽연합(EU)·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 등 이른바 ‘트로이카’의 구제금융 때문이다. 2010년 5월 디폴트 위기에 몰린 그리스에 약 1320억유로의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이들은 그리스 정부에 긴축재정을 전제로 내세웠다. ‘악수’였다.
긴축재정은 경제성장을 둔화시킨다.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논리는 단순하다. 정부가 지출을 줄이면, 기업이 팔 수 있는 재화와 용역도 줄어든다. 임금삭감과 정리해고가 이어진다. 결국 경제활동은 얼어붙고 만다. 그리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긴축재정 2년여가 남긴 ‘성적표’를 보면 알 수 있다.
지난 2월9일 그리스 통계청(Elstat)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그리스 경제는 지난해 4분기에만 1년 전에 견줘 무려 7%나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연평균으로 따져도 -6.8%다. 경기침체는 일자리 감소로 이어졌다. 지난해 11월을 기준으로 한 그리스의 실업률은 무려 20.9%다. 전체 노동인구의 4분의 1에 육박하는 103만6천여 명이 실업자다. 한 달 전인 지난해 10월에 견줘 2.7%포인트나 상승한 수치다. 경제위기 직전인 2007년 11월, 그리스의 실업률은 7.6%였다. 특히 청년층 실업률은 가히 ‘살인적’이다. 25살 이하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48%에 육박하고 있다.
상황이 다급하기는 하다. 오는 3월20일 만기가 도래하는 채무가 줄잡아 145억유로다. 갚지 못하면 그대로 디폴트다. 그리스 의회가 지난 2월12일 논란 끝에 추가 긴축예산안을 통과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내리 3년 바짝 조여왔다. 더 어떻게 허리띠를 졸라맬 수 있을까? 추가 구제금융을 받으면 위기의 끝이 보이기는 하는 걸까? 는 이날치 사설에 이렇게 적었다.
“32쪽 분량의 긴축재정안 20쪽 하단에 보면, 현행 751유로인 최저임금은 22% 인하하기로 했다. 특히 25살 이하 청년층 노동자의 최저임금은 현행보다 32% 삭감할 수 있게 됐다. 이럴 경우, 세전 임금은 고작 510유로에 불과하다. …계속된 긴축재정으로 월평균 실업급여가 이미 500유로 수준까지 떨어졌다. 추가 긴축안에 따라 최저임금마저 추가 삭감된다면,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찾아나설 이유가 아예 없어질 것이다.”

그리스의 유일한 카드, 디폴트 선언
의원들이 추가 긴축안을 논의하던 시각, 의사당을 에워싼 10만여 명의 시위대는 의원들을 향해 ‘반역자들’이라고 외쳤다. 일자리가 없으면, 희망도 놓게 된다. 그리스 젊은이들은 이날 밤이 이슥하도록 아테네 전역에서 ‘절망’을 발산했다. 도처에서, 분노의 화염이 봉화처럼 치솟았다. 뉴스 신디케이트 는 이날 아테네발 기사에서 아내와 함께 시위에 참가한 연금생활자 조르고스 콘스탄티니디스(62)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오늘 거리시위는) 상황이 얼마나 불안하고 폭발적인지를 보여준다. 정부의 긴축재정을 감내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금 덫에 갇혔다고 느끼고 있다. 어디에서도 방향을 찾을 수 없다. 정치인들은 믿을 수 없다. 유럽연합도 믿지 못한다. 어떤 때는, 우리 서로를 믿지 못하기도 한다. 세상의 종말이 아닌가 싶다.”
추가 긴축안이 통과됐음에도, ‘트로이카’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그리스 추가 구제금융 문제를 다루기 위해 2월15일 소집 예정이던 유로존 재무장관 회담은 막판에 취소됐다. “재정 적자를 줄일 방안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는 이날치에서 윌럼 뷰터 시티그룹 수석경제학자의 말을 따 “유럽연합 각국이 그리스에 추가 구제금융을 제공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며 “이에 따라 그리스가 향후 18개월 안에 유로존에서 탈퇴해 드라크마화를 재도입할 가능성은 이제 50%를 넘어섰다”고 전했다. 어쩔 텐가?
유로존 전체로 볼 때, 그리스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2%가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그리스가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파장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금융권이 요동칠 게 뻔하다. 막대한 부채에 허덕이는 포르투갈이, 스페인이, 그리고 이탈리아가 다시 휘청거릴 수밖에 있다. ‘트로이카’가 우려하는 ‘전염’이 이것이다. 역으로, 그리스 정부가 지닌 ‘협상 카드’도 이것이 유일하다. 제임스 미드웨이 NEF 선임연구원은 지난 2월6일 쓴 칼럼에서 “그리스 정부가 ‘디폴트’란 핵폭탄의 발사 버튼에 손을 얹어놓고 있는 모양새”라고 지적했다.
오는 4월 그리스에서 총선이 예정돼 있다. 2009년 10월 총선에서 43.92%의 득표율로 제1당이 됐던 사회당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8%까지 추락한 상태다. 현재까지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은 보수야당인 신민주당이다. 하지만 신민주당의 지지율도 앞선 총선 때보다 3%포인트 남짓 낮은 31%에 그치고 있다. 공산당을 비롯한 3개 좌파정당의 지지율이 42.5%, 2개 극우정당의 지지율도 8%에 육박하고 있다. 극단의 위기에 몰린 그리스 사회가 극단의 ‘핵분열’을 하고 있다.

옛 체제는 낡았으나 새 시대는 오지 않은
옛 체제는 끝났다. 개·보수는 불가능하다.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언제나처럼,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옛 체제는 무너졌지만, 새 체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분노한 젊은 시위대가 아테네를 휩쓸어버린 다음날인 2월13일,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신민주당의 안도니스 사마라스 당대표는 “집권하면 (시위대의) 복면부터 벗겨버리겠다”고 말했다. 사흘 뒤, 국제 해커그룹 어노니머스의 사이버 공격으로 그리스 의회 홈페이지가 마비됐다. 복면을 한 거리의 젊은이들에 대한 연대의 표시였다. 마비된 것은 의회 홈페이지만이 아니다. 언제나처럼, 바로 그게 문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r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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