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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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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빠진 찌아찌아 한글교육

표기문자로 한글을 도입한 지자체장 임기는 끝나가고 중앙정부는 “언어정책 거스른다” 비판… 한국의 경제적 지원 바라지만, 외교 문제 때문에 돕기도 힘들어
등록 2011-11-24 10:48 수정 2020-05-03 04:26
»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주의 바우바우시에 있는 찌아찌아족 마을 소라월리오의 카르야바루 국립초등학교에 한글로 표기된 팻말이 보인다.

»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주의 바우바우시에 있는 찌아찌아족 마을 소라월리오의 카르야바루 국립초등학교에 한글로 표기된 팻말이 보인다.

햇볕이 내리쬐는 지난 10월30일 오후 2시께. 한글을 문자로 도입해 관심을 모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주 남부 부톤섬의 바우바우시 찌아찌아족 마을 소라월리오는 평화로웠다. “안녕하세요!” 동네 어귀에 들어선 한국인을 알아보고 찌아찌아족 아이들이 인사를 건넸다. 악수를 청하자, 수줍게 미소짓던 라스나양사(11)는 손 대신 공책을 내밀었다. 연필로 그린 커다란 하트 안에 뜻 모를 한글이 공책 한 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제 친구한테 배웠어요.” 라스나양사와 친구들의 이름이었다.

그만둘까 고민하는 유일한 한글 선생님

올해 카르야바루 국립초등학교 4학년 라스나양사의 한글 선생님은 한 학년 선배인 에비(12)다. 지난밤,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에 모여 놀던 라스나양사와 친구들은 그렇게 처음 한글을 접했다. 생경한 문자인 한글로 낙서를 하고 가르쳐주기도 하는 일상은 2009년 7월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표기문자로 도입하자 생긴 변화다. 찌아찌아족은 500여 년간 문자 없이 입말로 그들의 언어를 유지해왔다. 현재 소라월리오를 중심으로 술라웨시주 남부에서 6만 명가량이 쓰는 찌아찌아어는 한글을 도입해 기록으로 보존할 계기가 마련됐다.

그러나 라스나양사와 에비가 손꼽아 기다리는 한글 수업은 2주째 취소됐다. 찌아찌아족의 유일한 한글 선생님인 아비딘(34)이 몹시 바빴기 때문이다. 아비딘은 2009년 서울대에서 6개월간 한국어를 배운 뒤 돌아왔다. 그는 한글로 된 첫 찌아찌아 책이 발간된 2009년 7월부터 현재까지 혼자서 한글을 가르쳐왔다. “아이들이 기다리는 걸 아는데, 도저히 짬을 낼 수 없었어요. 어휴, 이번 학기에만 혼자서 일주일에 3개 학교의 14학급 380명에게 한글을 가르쳐야 하는데 정말 벅차네요. 제 원래 과목인 영어 수업도 해야 하고….” 10월29일 카르야바루 국립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만난 아비딘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피곤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아비딘을 기다리는 것은 카르야바루 초등학교 학생만이 아니다. 고등학교 2학년 주마르니(18)는 고1이던 지난해에는 바우바우 제6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올해 초 새로 개교한 농업고로 전학한 뒤론 한국어를 다 잊어버렸다. 한국어 수업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밖에 기억이 안 나요.” 칠판에 한글로 이름을 겨우 써낸 주마르니는 “처음 배울 때는 더 잘 썼다”며 삐뚤빼뚤한 손글씨를 머쓱해했다. 한국의 농촌진흥청 지원으로 한글로 표기된 농업 교과서도 발간됐지만, 이 학교 교사 피트리아(23)는 “내년부터 새 농업 교과서를 교재로 쓸 예정이지만, 나도 학생들도 아직 한글을 읽고 쓸 수 없다”고 말했다.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늘지만 문자가 정착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교육 환경과 제반 여건이 열악한 탓이다. 교사는 지난 2년간 단 1명이고, 교재는 2009년 8월 발간된 과 아비딘이 한국에서 가져온 한국어 교재 2권뿐이다. 아비딘은 “찌아찌아말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가르치는 일은 즐겁지만, 지금처럼 혼자서 해나가야 한다면 그만둘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일자리 기대하고 도입했으나

찌아찌아족의 한글 교육이 어려움을 겪는 현실은 충분한 준비 없이 지방자치단체장의 의지만으로 시작된 탓이 크다. 찌아찌아족과 한글의 인연은 2005년 바우바우시에서 열린 국제고문헌학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외국어대 전태현 교수(마인어 통번역학)가 현 바우바우시 아미룰 시장에게서 찌아찌아족의 사정을 처음 접했다. 찌아찌아족이 바우바우시의 여섯 종족 중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한데다 이들의 언어가 소멸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이다. 이후 전 교수는 한글 세계화 사업을 구상하던 훈민정음학회에 찌아찌아족을 소개했고, 바우바우시와 훈민정음학회의 제안에 따라 찌아찌아족은 부족장 회의를 거쳐 한글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찌아찌아족과 한글의 공식적 만남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인도네시아 교육부 산하 언어개발기구의 수기요노 박사는 지난 11월11일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 문자로 도입한 것은 중앙정부의 언어정책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도네시아 헌법에 따라 제정된 법률 24호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인도네시아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해야 한다. 공식 문자인 로만라틴이 있는데 또 다른 문자체계를 채택하는 것은 위법이다.” 수기요노 박사의 말은 단호했다. 이에 대해 찌아찌아족 한글표기법을 연구한 서울대 이호영 교수(언어학)는 10월24일 전화 인터뷰에서 “찌아찌아의 한글 보급은 잘못하면 외교 갈등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한국 정부, 학계, 민간단체에서 돕겠다고 나서기엔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이렇듯 치밀한 정책적 협의 없이 추진된 터라 찌아찌아족의 한글보급사업은 불안정한 상태다.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바우바우시장은 임기가 2012년 12월에 끝나고, 3선이 금지돼 재출마할 수 없다는 사실도 불확실성을 키운다. “술라웨시섬에는 2000년대 초반부터 많은 한국 기업들이 들어왔다. 가스 등 지하자원 개발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낙후한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배워두면 한국 기업에서 일자리를 찾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지난 10월31일 바우바우시청에서 만난 아미룰 시장은 ‘왜 찌아찌아족에게 한글 도입을 권했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지만, 자신의 구실은 거기까지라고 잘라 말했다. 사실상 찌아찌아족의 한글 정착을 위한 재정은 전적으로 외부에 기대고 있다.

든든하던 외부 지원이 흔들리는 것도 한글 교육을 중단시키는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바우바우시와 훈민정음학회의 관계가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지난 3월 바우바우시장은 훈민정음학회가 초기에 약속한 경제지원 등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다며 협력관계 결렬을 선언했다. 훈민정음학회 이기남 이사장은 지난 11월12일 전자우편을 통해 “훈민정음학회는 찌아찌아어 교과서 출판과 교사 아비딘 한국어 연수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했다”며 “그외의 경제적 지원은 약속한 바가 없다”고 밝혔다. 바우바우시는 서울시와 2009년 12월, 농촌진흥청과는 2010년 10월 각각 문화와 농업기술 교류협력 의향서를 체결했지만 이 기관들은 한국어 교육 등 본격적 재정지원은 꺼리는 상태다.

“찌아찌아어 위해 지키고 싶어”

한글 교육이 교착상태에 놓였지만 찌아찌아족은 여전히 기대하는 바가 크다. 지난해부터 제6고등학교에서 아비딘에게 한글 수업을 받는 삼실(18)에게는 작은 바람이 생겼다. “찌아찌아말은 우리의 상징이에요. 한글을 통해 찌아찌아어가 기록된다면,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지켜나갈 수 있다고 믿어요.” 와수디(54)도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한다. “한글로 표기된 찌아찌아 이야기책을 손주들 잠자리에서 읽어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한글이 찌아찌아어를 지키고 경제적으로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한글교사 아비딘은 찌아찌아어가 가정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라지는 찌아찌아어와 역사를 지켜나가야겠다고 이제 막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한글을 통해 보존 가능성을 확인했고, 찌아찌아어를 위해서 한글을 지키고 싶어요.”

바우바우(인도네시아)=글·사진 이슬기 통신원 skidolm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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