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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기 직전의 미국을 살려낼 허경영?

튀는 언행으로 미국판 허경영 같아도 공화당 유력 대선후보로 떠오른 허먼 케인…망하기 직전의 피자 회사를 살려낸 이력이 강점이었지만 성희롱 논란으로 위기에 처해
등록 2011-11-11 11:42 수정 2020-05-03 04:26

허경영. 그가 2007년 대한민국 대선에 출마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웃었다. 그의 언행은 선거가 끝난 뒤에도 놀림감이 됐다.
허먼 케인. 미국 공화당의 대선주자로 피자 체인 ‘갓파더스 피자’ 최고경영자 출신의 케인이 출마를 선언했을 때도 그랬다. 연설료나 더 받고 방송에나 출연하려는 ‘감초 후보’ 정도로 여겨졌다. 대중 앞에서 이른 아침에 술을 마시는 등 그의 독특한 행동은 가십 기사로 취급됐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 공화당의 유력 대선주자로 떠올랐다. 지난 10월25일 가 발표한 조사에서 지지율 25%를 기록해 21%를 얻은 밋 롬니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앞질렀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10월17~30일 실시한 조사에서도 케인은 20%를 기록한 롬니에 이어 18%로 2위를 기록했다. 9월5~18일 조사에서 케인의 지지율이 5%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다.

흑인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케인은 워싱턴의 기존 정치인들에게 신물난 유권자들 사이에서 주목받으며 떠오른 정치 신인이다. 실업률이 9.1%에 이르는 등 경제위기 상황에서 케인은 위기를 해결할 기업가 출신의 경제전문가로 자신을 부각시켜왔다. “망하기 직전의 피자회사를 살렸듯이 미국을 살려내겠다”는 것이다. 그는 운전사 아버지와 청소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퍼듀대학에서 컴퓨터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코카콜라와 버거킹 등에서 중역을 지냈다. 그리고 도산 직전의 피자회사를 부활시켰다. 이렇게 자수성가해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인물인데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친근한 이미지를 지녔다. 라디오 진행자로 언변이 뛰어나, 개인소득세·법인소득세·판매세를 모두 9% 세율로 통일해 재정 문제를 해결하자는 ‘9·9·9 플랜’ 등 현실적 타당성과 별개로 이해하기 쉬운 정책을 내놓았다. 이민정책 강화, 세금 인하와 총기소지권 강조 등으로 보수층 유권자를 끌어들이며 티파티 등의 지지를 받은 것도 지지율이 상승한 배경이다. 그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최종 선출되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2명의 흑인 후보가 겨룬다는 점에서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몰이는 찻잔 속 태풍이 될 위기에 처했다.
정치 전문 매체 가 지난 10월31일 “케인이 1996~99년 전미요식업협회(NRA) 회장으로 재직할 당시 협회 여직원 2명이 성희롱 문제를 제기하자 그들에게 돈을 주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하면서부터다. 는 “한 여성이 당시 1년치 봉급인 3만5천달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11월2일에는 비슷한 시기에 성희롱을 당했다는 제3의 여성까지 등장했다. 이 여성은 케인이 동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털어놓았다고 했고, 케인의 아파트로 자신을 초대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케인과 접촉할 일이 줄어들고 이미 다른 여성들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자신은 문제 삼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여성은 다른 여성 2명과 같은 시기에 전미요식업협회에서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케인은 “나와 이번 선거를 파괴하려는 세력의 음모”라며, 공화당 경쟁자인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 선거캠프가 의혹을 유포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케인은 과거 자신의 선거를 도왔다가 현재 페리 캠프에서 일하는 선거 참모를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성희롱 의혹은 케인의 희망과 달리 눈덩이처럼 커지는 형세다. 전미요식업협회 회장 당시 가족과 떨어져 살며 직원들과 어울리려고 많이 노력했고 결코 선을 넘은 적이 없다는 증언도 나왔지만 의혹을 뒤엎지는 못했다. 성희롱을 당했다는 여성이 당시 체결한 ‘비공개 계약’ 때문에 증언을 망설였지만, 케인의 주장을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방안을 전미요식업협회와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의 핵무기 개발 폭로?
“첨단 린치다”라며 케인을 옹호하는 주장도 나왔다. 보수 성향의 저명한 방송인 러시 림보는 “시궁창 정당정치”라고 케인을 거들었다. 일부에서는 케인에 대한 공격을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인준 때 제기된 인종차별 논란에 비유하고 있다. 흑인인 토머스 대법관도 당시 성희롱 논란이 불거지며 청문회 통과가 불투명한 위기를 맞았다. 애틀랜타 티파티 패트리어츠 지도자인 데비 돌리는 “좌파가 보수적인 흑인이 권력에 가까워지고 유명해지니까 완전히 겁에 질렸다”고 주장했다. 보수 인사 앤 커틀러도 “자유주의자들이 흑인 보수주의자를 다루는 방식이 너무도 충격적이다”라고 비난했다. 성희롱 의혹이 제기된 뒤 케인의 선거 후원금은 되레 늘어나고 있다. 는 11월3일 “사건의 진상은 명확하지 않지만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만은 분명하다”고 내다봤다.
성희롱 논란은 그동안 제기된 케인의 약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케인은 논란이 불거진 뒤 “성희롱을 한 적이 없다” “합의한 사실을 모른다” “합의한 사실은 알지만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유머를 이해하지 못했다” 등 수차례 말을 바꿔 신뢰를 잃으며 위기대응 능력에 의문이 제기됐다. 10월3일에는 “더 이상 묻지 말라”고 언론을 성토하며 언론도 적으로 만들고 있다. 가뜩이나 그의 능력이 논란거리가 되던 상황이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한다”고 말한 게 구설에 올랐다. 이에 공화당 대선주자이자 전 중국 주재 미국대사인 존 헌츠먼은 “중국은 이미 1964년부터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데 케인이 국가안보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다”고 공격했다.
케인의 위기는 따분한 공화당 대선 경선을 더 지루하게 만들 분위기다. 케인이 돌풍을 일으키며 ‘난쟁이들의 경쟁’이라고 불릴 만큼 스타가 없는 공화당 대선 레이스에 그나마 흥미를 불러일으켰던 탓이다. 10월6~9일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6%가 2012년 11월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를 찍고 38%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투표하겠다고 밝혔지만, 그 46%의 마음을 가져갈 공화당 후보는 나오지 않고 있다. 공화당 안에서는 선거자금이나 조직력 등을 고려할 때 결국 롬니와 페리의 대결이 되지 않겠느냐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공화당 지지자들은 개신교가 이단으로 여기는 모르몬교도인 롬니에게 선뜻 열정적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다. 롬니는 공화당의 보수파 유권자를 의식해 말을 자주 바꾼다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데이비드 플러프 백악관 선임고문은 롬니를 두고 “선거를 위해서라면 하늘이 초록색이고 잔디가 파란색이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롬니를 둘러싼 딜레마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선 경선전이 본격적으로 개막되는 2012년 1월3일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공화당 지지자 3명 가운데 1명이 아직 지지 후보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아메리칸대학 엘런 리츠먼 교수는 11월2일 과의 인터뷰에서 “공화당 지지자들은 이성적으로는 롬니가 오바마에 맞서 승리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에 롬니를 후보로 지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롬니가 공화당 이념에 충실하지 않고 대통령에 당선되면 자신들의 가치를 대변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다”고 분석했다. 지지율 추락으로 재선을 고민하던 오바마로선 나쁘지 않은 상황 전개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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