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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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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치무라를 아시나요?

1950년대 옛 군수공장 터의 고철로 생계 유지하다 일본 경찰과 폭력사태 빚은 오사카 재일동포 집단 거주지 아파치무라를 가다
등록 2011-09-29 16:06 수정 2020-05-03 04:26
일본 오사카성 공원 근처 철길을 따라 시작되는 아파치마을의 전경. 재일동포들의 집단 거주지다. 1950년대 이곳에 살던 재일동포들은 ‘아파치족’이라 불리며 일본 경찰들과 충돌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일본 오사카성 공원 근처 철길을 따라 시작되는 아파치마을의 전경. 재일동포들의 집단 거주지다. 1950년대 이곳에 살던 재일동포들은 ‘아파치족’이라 불리며 일본 경찰들과 충돌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조선인들 잡으려고 개를 풀었어. 많이 죽었지. 개? 순사보고 개라 안 하나. 개가 오면 파이프를 타고 오다가 강에 떨어져서는 빠져 죽었어. 쇠를 짊어지고 있으니까 무겁잖아. 사람 셋이 팔로 둘러쌀 만큼 이만한 파이프 있잖아. 오다가 못 봤어?”(오사카 아파치마을 거주자 김복순씨)

“두 번째로 사람이 죽자, 이번 사건에 대한 매스컴의 관심은 단번에 고조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S신문의 1면 톱기사로 ‘경찰 부대 아파치 부락을 습격. 아파치족 1명 익사’라고 보도되었다. …경찰과 아파치족의 공방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아파치족은 점점 더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우리들은 끝까지 싸울 기다. …나는 제로니모와 같은 심경이다.’”(재일동포 소설가 양석일, )

“오사카 스기야마초의 구 조병창 터에 묻혀 있던 고철을 노린 ‘아파치족’은 그 후 세번에 걸친 단속에도 불구하고 집단폭력화되어 지난 9일 밤, 보관을 맡고 있던 긴기 재무국 스기야마 출장 사무소 수위실로 10여 명이 곤봉, 쇠망치로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 그 직후인 10일 오전 4시 또다시 수위실을 습격하여 강도상해 사건, 같은 날 9시에 3번째로 습격하는 등 범행이 험악해지자 경찰은 삼엄한 경계 태세를 폈다.”(1958년 7월11일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슬픈 마을

꽤 긴 시간을 헤맸다. 높다란 천수각을 자랑하는 오사카성 주변을 몇 차례나 맴돌았다. 천수각 뒤편으로 오사카의 하늘이 어둑해졌다. 마음은 초조한데 미국에서 사라진 인디언처럼 ‘아파치마을’은 나타나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 체인점인 ‘센츄리21’이 눈에 보였다. 한국에서는 취재하다 길을 모를 때는 눈에 보이는 부동산이나 중국집을 무작정 들어갔다. 20대로 보이는 젊은 점원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지도를 들고 와 설명해준다. 점원이 설명해준 대로 두 블록 정도 걸었는데 아무것도 없다. 아파치마을은 존재하되, 아는 이는 없는 그런 마을이었다. 빗방물이 떨어졌다. 휑한 골목길, 유일하게 문을 연 잡화점에 들어갔다. 은발에 러닝셔츠만 입은 일본인 할아버지가 혼자 신문을 보고 있다. 여든이 훨씬 넘어 보였다. 한참을 설명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더니 펜과 종이를 들고 온다. 필담까지 나누고, 어찌어찌하다 할아버지가 ‘아파치’라는 말을 알아들었다. “아파치무라?”라며 되묻는다. 아파치무라(村), 아파치부락, 아파치마을. 내 손에 들려 있던 관광지도 한 곳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준다. 여기가 확실하단다.

밤이 시작되려 했다. 어두운 강을 따라 걷다 철길을 만났다. 길이 없어 오른쪽으로 꺾으니 철길 옆으로 집들이 다닥다닥하게 붙었다. 인적 없는 골목이다.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가슴 부근에 빨간색 코르사주를 단 중년 여성이 자전거에 막 오르려 했다. 그에게 무턱대고 우리말로 물었다. “여기가 아파치무라인가요?” “에~”라며 일본식으로 놀라더니 “여기가 맞아요”라고 우리말로 답한다. 가라오케에서 저녁 6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한다는 그는 재일동포 2세였다. “얼마 전에 이사와서 여기 잘 몰라요. 저한테 들었다는 말은 하지 말고, 저쪽 집으로 가보세요.” 왜 자기한테 들었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는지 나중에 알았다. 아파치무라에서 ‘아파치’라는 말은 ‘도둑’이었다.

“여기서 아파치 소리 하면 손 끊어. 그 얘기 하면 잡아간다고.” 지난 8월20일 아파치마을에서 만난 김복순(82·가명)씨가 “왜 아파치냐”는 질문에 손목을 뚝 잘라내는 시늉을 하며 말을 끊었다. “내 이름도 기사에 내면 안 돼. 사진도 찍지 마.” 김씨는 전등 하나 켜 있지 않은 깜깜한 집에서 텔레비전만 켜놓고 있다가 기자를 맞았다. “전기가 얼마나 비싸다고.” 김씨의 집은 이층 목조건물이다. “이곳에 이사와서 1년 뒤에 도쿄올림픽을 했고, 3년 뒤에 이 집을 지었어.” 1966년에 집을 지었다는 얘기니, 50년이 다 돼간다. 집이 낡다 보니 안방 벽에 구멍이 여러 개 나 있다. 뚫린 구멍에는 한국 달력이 바람막이로 들어섰다. 달력 속 여자가 한복을 차려입었다. 이곳을 찾느라 한참을 헤맸다고 하니 “아파치라는 말, 이제 젊은 사람들은 모른다”고 했다.

“가난과 공권력에 대한 저항”

아파치마을은 오사카 조토구 기타나가카하마 1번지의 재일동포 집단 거주지를 말한다. 오사카성 동쪽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을 건너면 옛 오사카 조병창 터가 있다. 한국 관광객도 자주 찾는 오사카성 공원 일대다. 1950년대, 아파치마을 주민들은 국유지인 조병창 터에 쌓인 고철을 캐내어 내다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강 건너편에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군수공장이 있었어. 해방 직전에 폭격으로 부서졌는데 거기에 쇠 도둑질하러 간 거지.” 김씨는 “아파치라는 말은 일본 사람이 쓰고, 한국 사람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만 썼다”고 했다. ‘도둑’이라는 의미로 쓰인 탓이다. “저기 건너편에 제주도 사람이 하는 찌짐(부침개)집이 있어. 술 마시다가 아파치 얘기하면 죽어. 전에 일본 사람이 ‘여기가 아파치마을’이라고 했다가 주인이 나가라고 발로 차버렸어.”

아파치마을과 군수공장 사이를 가르는 강에는 커다란 공업용 파이프가 걸쳐 있는데, 아파치마을 사람들은 밤이면 그 파이프를 타고 군수공장으로 건너갔다가 건너왔다. 갈 때는 빈 몸이었지만 올 때는 군수공장 터에서 훔친 쇳조각을 보자기에 싸서 몸에 둘렀다. 경찰이나 경비원에게 걸리면 어두운 파이프 위를 내달리다 강에 빠져 익사하는 일도 있었다. “엔삐, 아메리카징이 너인가 서 있어. 돈종이 쥐어주고 ‘눈감아달라’ 그러기도 했다고 하더라.” 김씨가 말하는 ‘엔삐’는 엠피(MP), 헌병을 뜻한다. 미군정 때 군수공장을 지키던 미군 헌병에게 돈을 주고 봐달라고 했다는 얘기다.

김씨는 “그때 도둑질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떠났다”고 했다. 현재 아파치마을의 가구 수는 50~60가구다. 1950년대에는 180가구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골목마다 어린아이들이 바글거려서 “제대로 걸어다니지 못했을 정도”라고 했다. 당시에는 대부분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소속이었는데, 지금은 총련 소속이 몇 집 없다.

재일동포 소설가 양석일은 1994년 아파치마을 이야기를 담은 소설 를 썼다. 2002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소설에서는 아파치라는 말의 등장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 신문은) 당시 외화팬을 열광시킨 서부극의 제로니모를 추장으로 한 신출귀몰하고 용맹과감한 아파치족과, 어둠을 틈타 쇳덩이를 갈취해 가는 조선인 부락민들을 오버랩시켜 썼다.”

의 당시 기사들과 양석일의 소설을 비교 분석한 부산외국어대 박정이 교수는 관련 논문에서 “일본에 남은 재일조선인은 여전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구 조병창 터에서 먹고살기 위해 고철을 캐는 절도를 저질렀다. 그러나 의 아파치족에게 있어 고철을 캐는 것은 가난에 대한 저항이며, 나아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 일본의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양석일은) 구 조병창 터에서 고철을 캐는 행위를 군국주의의 잔해를 처리하는 정당행위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아파치마을 주민들이 군수공장 터를 오가며 이용했던 커다란 파이프가 철길을 따라 놓여 있다. 일본 경찰에 쫓긴 주민들은 몸에 지닌 쇳덩이 무게를 못 이겨 익사하기도 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아파치마을 주민들이 군수공장 터를 오가며 이용했던 커다란 파이프가 철길을 따라 놓여 있다. 일본 경찰에 쫓긴 주민들은 몸에 지닌 쇳덩이 무게를 못 이겨 익사하기도 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허연 몸피를 드러낸 파이프

소설은 아파치마을을 정당한 투쟁이 벌어지는 공간으로 형상화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김씨에게 아파치마을에 산다는 현실은 정당한 투쟁도, 정의로운 싸움도 아닌 숨겨야 할 무엇이었다. “우리 딸이 예뻤는데 선본 남자가 ‘너 아파치마을에 살지’라고 묻고는 끝내버렸어. 우리 나이만치 된 사람만 아는 얘기야. 친정 엄마도 나한테 ‘이사갈 데가 없어서 그런데로 가느냐’고 했어.” 아파치마을에 사는데다, 일본 남자에게는 딸을 절대 시집보내지 않겠다던 남편 때문에 예쁜 딸은 선을 마흔 번이나 봐야 했다.

달력을 보니 추석이 3주 정도 남았다. 일본에서 태어난 김씨에게 ‘추석에는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다. “애들 시집가기 전에는 한국 명절을 지냈지. 그런데 손자들 태어나고는 그러지 못해. 학교 때문에 일본날(일본 명절, 양력 8월15일 ‘오봉’ 명절)로 하기로 했어.” 인터뷰를 마치니 밤이 깊다. 아파치족들이 타고 건넜다는 파이프를 찾아나섰는데, 금세 허연 몸피를 드러낸다. 파이프와 나란히 놓인 철길 위로 전철이 지나가며 파이프 위로 사람 그림자 여럿을 찍었다.

오사카(일본)=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일본 최초 인권박물관 ‘리버티오사카’
다양한 차별의 역사 두루 모아 전시
한겨레21 김남일 기자

한겨레21 김남일 기자

오사카에는 1985년 문을 연 일본 최초의 종합인권 박물관인 ‘리버티오사카’(오사카인권박물관)가 있다. 리버티오사카에서는 일본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별과 그 역사, 그 현재를 두루 모아 보여준다. 동성애자, 에이즈 환자, 한센병 환자, 공해병 환자, 장애인, 고령자, 노숙자, 신분제가 살아 있던 전근대의 일본에서 ‘히닌’(非人)이라 불렸던 부락민 차별이 각종 사진과 영상물, 유물 등으로 전시돼 있다. 특히 재일동포(자이니치) 차별 전시실과 더불어 일본인이면서도 ‘2등 시민’ 취급을 받는 류큐(오키나와)·아이누(홋카이도)에 대한 차별의 역사까지 따로 전시실을 만들어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재일동포 전시실에서는 ‘영상으로 보는 해방 후 재일코리안’이라는 영상물을 볼 수 있다. 재일동포 사학자 고 신기수씨가 모은 영상자료로 △재일동포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 집회 △조선학교 폐교령에 반발한 교육투쟁 △일본 정부의 재정 지원 없이 재일동포들이 직접 지은 조선학교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또 ‘재일코리안 1세의 투쟁’이라는 영상물에서는 징용으로 끌려온 재일동포와 그들의 지문날인 거부운동 등도 알려준다. 일제시대 조선에서의 쌀 공출, 오사카 지역 조선인 노동자의 삶에 대한 설명,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이 사용해야 했던 ‘일본국어독본’과 해방 뒤 조선학교 교과서로 사용된 ‘한글 첫걸음’도 전시돼 있다.
현재 오사카부(府)는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일본에서 가장 위험한 포퓰리스트’인 하시모토 도루가 지사를 맡고 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최관익씨는 “극우 성향의 하시모토는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을 모두 중단했다”고 비판했다. ‘리버티’ 오사카는 아직 멀었다. 위치. 오사카 제이아르(JR) 아시하라바시(芦原橋)역에서 걸어서 10분. 인터넷 홈페이지. http://www.liberty.or.jp. 재일동포 관련 영상물에는 한글 자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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