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일 오후, 노르웨이 오슬로 중앙역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창밖으로 야트막하게 솟은 언덕이 보였다. 검은색 히잡을 뒤집어쓴 여성이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종점에서 한 정거장 전인 ‘프루세트’역에서 10명과 함께 내렸다. 7명이 무슬림, 3명이 백인이었다. 역에서 몇백m 떨어진 곳에 하얀색 모스크 사원이 신기루 같은 자태를 드러냈다. 프루세트는 오슬로 인구 60만 명 가운데 약 20%를 차지한다는 무슬림의 최대 밀집 지역이다. 히잡을 쓴 여성들이 유모차를 끌고 프루세트역 바로 옆 쇼핑센터로 들어갔다. 7월22일 77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가 벌어진 뒤 열흘째, 프루세트역 바로 옆 슈퍼마켓에 꽂힌 신문의 1면이나 주요 면은 테러범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의 사진이 차지하고 있었다.
테러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는 삶“테러는 노르웨이에 비밀스럽게 숨 쉬는 인종주의를 까발린 사건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 놀라긴 했지만….” 역 앞 벤치에 한가로이 앉아 있던 카림(60·가명)이 말했다. 방글라데시 출신인 카림은 1985년 노르웨이 땅을 처음 밟았을 때만 해도 인종주의를 예상하지 못했다. 민주화운동가였던 카림은 군부의 감시를 피해 오슬로에 왔다. “사람과 날씨, 건물 등 노르웨이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내 꿈은 노르웨이에서 언론인이 되는 것이었다.” 3년쯤 지나 그 꿈을 접었다. 노르웨이 대학에서 치른 영어 토플과 노르웨이어 능력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았지만, 방글라데시에서 취득한 학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나름대로 방글라데시 명문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힘들게 망명 와서 돈 한 푼 없는데 다시 이곳에서 대학에 입학해 공부할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프리랜서로 방글라데시 신문에 기고하며 가끔이나마 기자의 삶을 체험하는 게 위안거리다.” 망명한 지 7년쯤 지나니, 사무직이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50여 곳에 지원서를 냈지만 연락이 없었다. 면접 보는 게 소원이었다. “이력서에 적힌 내 이름을 통해 무슬림임을 알고 서류전형에서 탈락시켰을 것이다.” 카림은 테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는 건물 청소와 호텔 룸서비스 등을 해왔지만, 최근 근육통이 악화된 탓에 몸 쓰는 일을 더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쉴 수도 없는 처지다. 노르웨이 정부에서 한 달에 생활지원금 1만2천크로네(약 237만원)를 받지만, 방 3개가 딸린 그의 집 월세는 세금을 포함해 1만7천크로네(약 335만원)다. 지원금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어학원에서 이민자들을 상대로 노르웨이어를 가르칠 기회를 얻어 생활에 보탠다.
역시 벤치에 앉아 있던 소말리아 출신의 이민자 이브라힘(35·가명)은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무슬림을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브레이비크가 죽인 건 결국 백인 노르웨이인들이다. 자꾸 인종주의니 뭐니 머리 아프게 연결하려 하지 마라.” 그는 국가적 재앙보다는 현실이 더 급했다. 3년 전부터 프루세트에서 처자식과 함께 살고 있는 이브라힘은 노르웨이에서 일한 적이 없다. “노르웨이어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직장을 구할 수 없다.” 영국 런던으로 가 몇 달씩 머물며 건물 관리인 등의 일을 해 프루세트로 돌아온다. 다시 생활이 쪼들리면 런던으로 가야 한다. “가족이 여기에 있는데 런던으로 다시 가고 싶겠나. 직장만 구하면 노르웨이에 영원히 안착할 것이다.”
잠재된 인종주의가 드러났다?역을 등지고 정면으로 이어진 낮은 오르막길을 2분 남짓 걷자 4층짜리 주택가가 나왔다. 건물 창을 통해 히잡을 쓴 여성이 집 안을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주택가 사이를 쌍둥이 형제가 자전거를 타며 노닐었다. 형제의 한 반 총인원은 23명인데, 백인 노르웨이 학생은 단 1명뿐이라고 했다. 쌍둥이 형제와 헤어지고 프루세트역 쪽으로 내려가는데 욘센(15·가명)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담배 있으면 하나 줄래요?” 하얀 피부에 여드름이 불그스름하게 두드러진 욘센이 이곳에 사는 이유는 변호사인 어머니가 무슬림이기 때문이다. 욘센은 오슬로 중심가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방학이라 축구를 하곤 하지만 무슬림과 함께 뛴 적은 없다. “무슬림 친구는 전혀 없어요. 친해질 기회가 있어야 말이죠.”
저녁 6시께, 프루세트역 인근 모스크를 찾았다. 바닥에서 20여 명이 엎드려 절을 했고, 흰색 도포를 입고 검은색 수염이 길게 난 파키스탄 출신의 압둘라 라만(23)은 신도를 바라보며 꾸란(코란)을 낭송했다. “테러 때문에 오셨죠? 제가 위험해 보이나요?” 라만은 모스크를 찾은 이유를 간파했다.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마호메트)는 우리 가족, 심지어 (나) 자신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노르웨이 최대 신문이 앞장서 우리의 우상을 비하하고 있는데,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브레이비크와 비교도 할 수 없죠.” 노르웨이의 유력 일간지 (VG)은 페이스북에서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사진을 그대로 가져와 버젓이 싣기도 한다며 라만은 화를 참지 못했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많은 무슬림에게 지상낙원은 아닐지라도 고향보다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프루세트 주택가 쉼터에서 만난 파키스탄 이민 2세 알리 무니르(29)는 브레이비크를 ‘예외적’ 경우로 본다. 오슬로 중심가에서 고등학교 상담교사로 일하는 무니르는 “백인 학생 모두 내 얘기를 경청하고 존중한다. 테러리스트 하나 때문에 노르웨이를 인종주의 국가로 보지 말라. 노르웨이는 시민의식 수준이 높은 국가다.” 무니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오히려 자신과 같은 이민자들이다. “도무지 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힘들게 벌어 낸 세금이 빈둥거리는 그들에게 가는 건 공정하지 않다.” 무니르는 인종차별은 어린 시절에 한두 차례 겪었을 뿐 직장에서도 무슬림이라고 무시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민자 정책만은 노동당의 포용정책에 맞서는 극우정당 진보당(FrP)을 지지한다. “진보당의 강력한 이민 규제 정책이 옳다고 본다. 무분별하게 이민자들을 받았다간 노르웨이도 언제가는 소말리아처럼 가난해질 것이다.”
극우정당의 이민규제정책 지지하는 무슬림오슬로 중심가의 한 슈퍼마켓에서 과일을 파는 이라크 태생의 무슬림 마이템 자바(35)도 비슷한 생각이다. “3년 동안 이 상점에서 일했지만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멸시받거나 험한 일을 겪은 적이 없다.” 그는 선량한 노르웨이인들의 얼굴에서 테러리스트 브레이비크를 떠올리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당연히 “일상이 갑자기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테러보다 살벌한 조국의 환경 속에서 비극에 둔감해졌는지 모른다. 그는 미군이 점령한 이라크에서 승용차를 타고 빠져나와 그리스에서 비행기로 갈아타는 등 한 달 가까이 목숨을 건 탈출을 한 끝에 노르웨이에 도착했다. 체류를 허가해준 노르웨이가 여전히 감사하다. “이라크에서는 무서워서 살 수 없었다.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폭격에 건물이 부서진 모습을 떠올리면 노르웨이는 정말 안전하다. 죽는 순간까지 이곳에 머물고 싶다.” 예순 살의 어머니가 이라크에 남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노르웨이를 비판하든 찬양하든, 무슬림 이민자들에게 노르웨이는 떠날 수 없는 두 번째 나라였다.
오슬로(노르웨이)=글·사진 이승환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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