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는다. 2009년 가을, 비행기가 서서히 내려앉던 창밖으로 보이던 그곳의 풍경을. 나지막한 산들 사이로 자리잡은 분지. 해질 무렵, 언덕 위 작은 집들의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다. 10만 명 넘게 숨진 보스니아 내전(1992~95)의 격전지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수단 다르푸르 전범 혐의자 초청한 중국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기억을 좇아가다 만난 한 여성은 벽에 붙은 지도를 가리켰다. 그의 눈망울은 갑자기 붉어졌다. “죄 없는 수천 명을 죽였다. 아직도 가족의 주검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끔찍하다.” 보스니아 동북부 무슬림 마을인 스레브레니차 학살 현장이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 스릅스카공화국 군사령관이던 라트코 믈라디치는 이곳에서 전쟁 참여가 가능한 이슬람계 남자 8천여 명을 학살하는 등 ‘인종청소’를 주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집단학살이다. 7월11일이 16주기다. 뒤늦게 신원이 확인된 613명의 백골이 7월11일 안장된다. 그 학살의 특급 전범 믈라디치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다. 또 다른 특급 전범 라도반 카라지치는 2008년 7월, 13년 넘는 도피 생활 끝에 검거돼 역시 이곳에서 재판받고 있다. 이들처럼 국제형사재판에 직면한 이들이 최근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과 달리 사라예보 곳곳에 남은 총탄의 흔적처럼, 오롯한 반인류 범죄의 고통에 역사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지난 6월30일 레바논 특별재판소(STL)는 2005년 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암살 사건에 대한 공소장을 레바논 검찰에 전달하고, 용의자 4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6월27일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에 대해 최근 반정부 시위 대응 과정 등에서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ICC가 현직 국가원수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은 2008년 수단의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 이후 두 번째다. 알바시르 대통령은 2003~2009년 약 30만 명이 숨진 다르푸르 대학살과 관련한 전쟁범죄 및 대량학살 혐의로 지난해 7월 ICC로부터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그런데 그가 체포영장을 비웃듯, 지난 6월28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해 논란이 불거졌다. 또 6월27일에는 1975~79년 집권 당시 170만 명의 자국민 학살을 주도한 크메르루주 정권의 핵심 인물 4명에 대한 재판이 32년 만에 캄보디아특별재판부(ECCC)에서 시작됐다.
국제형사재판제도는 조금씩 발전해왔다. 2002년 7월1일 출범한 ICC는 국제법상 개인의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설제도를 최초로 마련한 국제법 발전의 이정표로 꼽힌다. ICC 창설 이전에도 간헐적인 국제형사재판을 실시했지만, 특정한 전쟁이나 국가에서 벌어진 사태만을 대상으로 한 예외적 사례일 뿐이었다. 국제형사재판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 처벌이 전기가 됐다. 당시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아돌프 히틀러나 나치 친위대 책임자 하인리히 힘러 등 독일 수뇌부는 명백한 죄를 지었으므로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약식 절차를 거쳐 처벌하자고 주장했으나, 스탈린이 국제재판소 설치를 주장했고 미국과 프랑스도 지지했다.
ICC는 상설기구, 특별재판소는 임시기구독일인 전범 처벌을 위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1945년 10월 나치 수뇌 24명에 대한 기소가 이뤄져 19명이 유죄판결은 받았고 그 가운데 12명은 사형, 3명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일본 전범은 미국이 주도한 도쿄 국제군사재판소(극동군사재판소)에서 진행됐다. A급 전범 25명 전원이 유죄판결을 받아 7명은 사형, 16명은 무기형, 1명은 20년형, 1명은 7년형을 받았다. 뉘른베르크와 도쿄 국제재판소가 인류에 대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개인에 대한 재판으로서 형사책임을 추구하는 선례를 수립한 것이다. 현재 ICC는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전쟁범죄, 침략범죄의 네 가지를 관할한다. 지금까지 모두 26명을 기소했으나 2명은 사망하거나 기소가 취소돼 24명이 남았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17명 가운데 5명만 검거돼 재판을 받고 있다.
국제형사법원이 여럿이어서 헷갈리지만, ICC만이 영구 상설 국제형사법원으로 반인류범죄를 단죄한다. 옛 유고 국제형사재판소와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는 임시 국제형사재판소다. 사후적인 임시 재판소는 잔혹한 범죄의 예방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국가들의 정치적 의지에 따라 재판소 자체가 설립되지 않을 수 있지만, 두 임시 재판소의 설치는 현 ICC 탄생의 결정적 가교가 됐다. 옛 유고와 르완다의 경우처럼 모든 사태에 개별적 국제재판소를 설립·운영하기는 어렵다 보니 태어난 제도가 국제재판소와 국내재판소의 성격을 혼합한 특별재판소다. 과거 국제형사재판이 전승국이나 국제사회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요돼 재판이 공정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해당국과 유엔이 협력해 재판소(부)를 구성한다.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SCSL), 캄보디아 특별재판부, 레바논 특별재판소가 그런 경우다. 캄보디아 특별재판부는 캄보디아 정부가 특별재판소 설립에 반대하며 자국 법원이 책임자를 재판하겠다고 주장한데다 국제사회도 새 특별재판소 설립에 적극적이지 않아, 결국 캄보디아 국내 법원에 국제적 성격이 혼합된 특별재판부를 설치한 사례다.
이처럼 여러 임시 국제형사재판소와 영구상설 국제형사법원 ICC가 있지만, 반인류 범죄 처벌은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다. ‘발칸의 도살자’로 불린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은 2001년 체포돼 2002년 정식 기소된 이후 4년 이상 재판을 질질 끌다가 2006년 3월 재판 도중 감옥에서 숨졌다. 법의 이름으로 단죄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다른 임시 국제형사재판소도 언제 재판이 완료될지 몰라 ‘예산 낭비’라는 지적도 나온다. 특정 사태에 대한 책임자 처벌 시기를 놓치면 그 의의가 반감되고 국제사회의 지지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캄보디아의 경우도 훈 센 총리가 크메르루즈의 지역사령관으로 일한 전력이 있는 등 정부가 과거사 청산에 미온적이다 보니, 노령인 피고인들에게 법의 심판을 내릴 기회를 잃게 될지 모른다. 피고인들은 심리를 거부하거나 면책을 주장하고 있다. 크메르루주 정권 서열 2위였던 누온 체아(85) 전 부서기장은 “기분이 나빠서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퇴정하기도 했다. 7월4일에는 믈라디치가 판사에게 “네 멋대로 해라”고 외치는 등 소란을 피우다 쫓겨났다.
이라크 특별법정 설치한 미국의 이중성
무엇보다 ICC는 영장 강제집행권이 없다. 이 때문에 체포영장이 발부된 국가 지도자가 반정부 세력에 붙잡혀 ICC에 인도되거나 로마조약 체결국 방문 때 해당 국가 정부가 붙잡아 넘겨야 신병을 확보할 수 있다. ICC 설치 근거인 로마조약 체결국에서는 ICC 수사관이 해당 국가의 경찰을 지휘해 신병 확보에 나설 수 있지만, 조약 체결국이 아니면 현지 경찰이 체포영장을 집행하거나 ICC 수사관에 협력할 국제법적 의무가 없다. 이런 문제는 체포영장이 발부된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의 최근 중국 방문에서 잘 드러났다. 나바네템 필라이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6월30일 “국제법을 어긴 개인을 법정에 세워 정의가 실현되도록 하는 것은 중국 등 모든 나라 정부의 의무이자 책임”이라며 “몇 나라 정부들이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실망스럽다”고 비난했다.
카다피의 경우도 체포영장이 발부됐다지만 반군에 맞서 트리폴리에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체포가 쉽지 않다. 최고 국제 사법기구의 한국인 수장인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장은 7월4일치 기고에서 “ICC 자체는 집행력이 없고 해당 국가의 협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혐의자들에 대한 구속영장의 집행이 오랫동안 미집행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서도 “ICC의 구속영장은 시효가 없으므로 체포를 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동안 혐의자의 행동이나 여행 등이 매우 제한돼 점차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말 것”이라고 밝혔다.
6월 말 현재 ICC에는 192개 유엔 회원국 가운데 114개국만 가입했고, 미국·중국·러시아·이스라엘·인도 등이 자국민 소추에 따른 주권 침해 등을 이유로 가입하지 않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군의 전범 기소 등을 우려해, ICC 설치 근거인 로마조약에 대한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서명을 철회했다. 대신 미국은 ICC 대신 자신들의 뜻대로 재판정을 열어 처벌하는 일방적 행태를 보였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에게 교수형을 내린 이라크 특별법정은 이라크를 점령한 미국이 주도한 임시행정처(CPA)가 설립해 공정성 논란이 일었다. 당시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는 “미국은 시종일관 ICC나 유엔의 보조를 받는 유엔-이라크 혼합 재판소에 반대해 재판의 합법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지만, 후세인은 2006년 12월30일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서방국 범죄는 무시하는 이중성”ICC의 형평성 논란도 있다. 아프리카연합(AU) 53개 회원국들은 7월1일 정상회담 뒤 “ICC가 이라크·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에서 서방국가들이 벌인 범죄는 무시하면서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범죄만 차별적으로 좇고 있다”며, 카다피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현재 ICC에서 재판 및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은 콩고민주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수단, 우간다, 케냐, 리비아 등 6건이다. 모두 아프리카와 관련된 것이다.
남북관계도 국제형사재판에 부쳐질지 모른다. 납북자가족모임과 북한 정치범수용소 고문 피해자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ICC에 제소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뒤 자유선진당은 북한 지도자들을 전쟁범죄 행위로 ICC에 즉각 제소하라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ICC는 현재 북한의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침몰이 전쟁범죄인지를 가리는 예비조사를 벌이고 있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참고 문헌
‘국제형사재판제도의 발전’ 정인섭, 5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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