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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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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혁명은 시작됐다

수도 마드리드에서 한 달째 지속된 ‘분노한 사람들’의 시위… 직접민주주의 외치며 토론과 축제로 새로운 혁명 불 지펴
등록 2011-06-22 16:31 수정 2020-05-03 04:26
» 스페인 시위대가 6월13일 수도 마드리드의 시청 앞에 모여서 정부의 긴축재정과 경제위기 대응 및 정당 부패 등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 AP

» 스페인 시위대가 6월13일 수도 마드리드의 시청 앞에 모여서 정부의 긴축재정과 경제위기 대응 및 정당 부패 등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 AP

한 남자가 거리의 시민들에게 뭔가를 나눠준다. 모자를 쓰고 말끔한 반팔 난방을 입은 남자 뒤로 말풍선이 눈에 띈다. “일도 없고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다.” 이 남자에게 받아든 1978년 스페인 헌법 21조 1항. “비무장과 평화적 집회의 권리을 인정하며 이 권리의 실행은 사전 허가가 필요하지 않다.”

누구나 참여해 발언하는 민중의회

6월11일 오후 8시,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중심의 ‘태양의 문’ 광장에 모여들었다. 매일 열리는 ‘민중의회’ 시간이다. 한때 최고 3만 명까지 모이며 5월15일 이후 한 달 가까이 이 광장에서 계속된 ‘분노한 사람들’의 캠핑 노숙시위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조율한다. 시간이 흐르자 어느덧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다. 회의의 중심은 다음날 진행될 ‘철수 축제’에 대한 내용과 함께 향후 투쟁의 방법이다.

60대의 한 노신사가 자유발언 때 손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는 “몇십 년간 일했는데 먹고사는 게 힘들고, 퇴직을 앞두고 있지만 마음대로 퇴직할 수도 없다”며 “자본은 독재자”라고 연방 외쳤다. 뒤따라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정치적 불만을 터뜨렸다. 현재 스페인 사람들은 경제위기의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정부의 무능한 대응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해 있다. 더불어 정치인들이 부패를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활동한다며 “우리 월급은 너희 팁이 아니다” “세금을 잘 냈는데 경제위기를 왜 우리가 책임지는가”라는 외침이 커지고 있다. 고실업난 속에 스페인 정부의 긴축정책과 정치인들의 부패 등을 비판하는 것이다.

민중의회는 특별한 연사가 있거나 투쟁의 신념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다. 정치·경제 상황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가 하면, 오전에 사람들이 노트에 적어놓은 제안들을 함께 이야기하고, 다음 단체행동과 관련한 약속을 결정한다. 길을 가다가 들른 사람, 이민자, 환경주의자, 예술가, 장애인 등 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한다.

“내일은 10시부터 활동을 시작합니다. 텐트를 철수하고 광장을 청소한 뒤, 오후 민중의회를 시작으로 밤 12시까지 우리의 축제를 이어갑시다.” 수화봉사를 하는 참가자는 사회자의 말을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전했고, 참가자들은 다음날 축제의 성공을 기원하는 박수와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이번 시위는 단순한 반정부 시위 또는 기존 정당이나 특정 단체에서 조직한 게 아니다. 청년들을 중심으로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게 특징이다. 또 45%에 이르는 청년실업 문제뿐 아니라 선거 시스템, 정치 부패, 환경, 이민법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모여 토론하고 축제를 즐기며 ‘이제, 진짜 민주주의’를 하자고 주장한다. 참가자들은 이 모든 현상과 행위를 ‘스페인 혁명’이라고 이름 붙였다. 일차원적 반정부 시위가 아니라 거리의 주인, 민주주의의 주인들이 모여 평화롭게 웃음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거리축제다.

광장 시위, SNS 통해 전세계로 중계

지난 5월 초, 스페인 정부는 긴축정책을 발표하고 경제위기를 함께 이겨내자고 밝혔다. 그러나 국민의 반응은 차가웠다. 5월15일 청년 27명이 반긴축정책에 항의시위를 벌이다 연행됐다. 이 사건은 트위터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하는 시발점이 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광장의 발언과 현장 분위기는 세계로 실시간 중계된다. 소통위원회에서 시청각을 담당하는 디에고(27)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지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지키려면 부패로 물든 정치인들을 향해 직접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껴 시위에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텐트는 12일 광장에서 철수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 앞으로 국회와 은행 앞에서 함께할 것이다. 스페인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6월12일 태양의 문 광장의 캠핑시위 철수를 앞두고 여느 때보다 민중의회 열기가 뜨거웠다. 실업으로 생활고에 힘들어하는 36살의 기술자 하비에르 역시 경제적 불만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 계기였다고 했다. “광장에서 20일을 지내는 동안 이번 스페인 혁명이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힘과 행동이 필요하지만, 단기적으로는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들과 연대해 변화의 시작을 알렸으며, 진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리는 성과가 있었다.” 그는 광장에서 캠핑시위대가 철수한다고 투쟁이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투쟁을 이어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했다. 6월19일 스페인을 선두로 유럽과 전세계의 사람들이 함께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밤 12시30분, 민중의회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소규모 토론의 장을 만들었다. 소규모 그룹들은 환경, 여성,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밤이 깊도록 토론했다.

늦은 시각 집으로 돌아가다가 광장에 들른 베아트리스(37)는 “돈을 버는데 왜 돈이 늘 없는지 모르겠어”라며 말문을 열었다. “정치인은 우리를 대표하기는커녕 우리 돈만 가져가.” 오늘은 남자친구 펠리페, 동료 호르헤와 함께 왔다. 펠리페는 옆에 서 있는 입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어.” 베아트리스처럼 광장에서 잠을 자는 캠핑투쟁에 동참하지 못하는 시민들은 캠핑시위대에 물품을 기부하거나, 인터넷을 통한 지지 등의 방법으로 참여했다. 토론의 장 한쪽에서는 콘서트가 시작됐다. 새벽 2시, 참가자들의 눈과 귀가 기타와 바이올린 연주에 집중된다. 음악이 흐르고, 한 여성 참가자의 플라멩코 춤사위가 참가자들의 피로를 풀어준다. 어느덧 참가자들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광장의 마지막 밤을 지새운다. 시위 중인지 축제 중인지 모호한 그 경계선에서 새로운 싸움의 방법이 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텐트투쟁에 모두가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마리아(31)는 이런 시위 방법에 동의하지 않았다. “정치인들의 부패와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좋은데, 사실 시위 내용에 명확성이 없어요. 이렇게 광장에서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것도 그리 보기 좋지 않고요.”

또 다른 방법으로 시작될 혁명 2막

6월12일,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철수하기로 한 태양의 문 광장에 아침이 밝았다. 여느 때처럼 요가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 태양의 문 앞에서 참가자들은 짐을 정리하고 텐트를 철수하고 쓰레기를 주웠다. 광장 지하철 입구 벽면을 가득 메웠던 글귀들이 떼어지고, 공동 물품들이 수거됐다. 천막을 가지런히 접고 남은 유인물들도 차곡차곡 정리했다.

부패한 정치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거리에서 시작된 진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바라는 스페인 사람들의 혁명 1막이 이제 막 끝났을 뿐이다. 1막의 끝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거리에서 또 다른 방법으로 이어갈 혁명의 2막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태양의 문 광장을 둘러싼 많은 글과 그림 중에 “스페인 혁명이 시작됐다”는 문구가 있다. 스페인 국민은 그들 스스로 만드는 내일의 스페인을 기다리고 있다. 태양의 문 광장에서는 새로운 투쟁 방식을 위해 캠핑시위 철수를 결정했지만, 아직 바로셀로나의 카탈루냐 광장, 세비야의 시청 광장 등 스페인 곳곳에서 캠핑시위는 멈추지 않고 확대되고 있다. 지금, 스페인은 혁명 중이다.

마드리드(스페인)=연정화 한국외국어대 중남미연구소 리서치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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