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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엑센트 vs 신형 에쿠스

[세계] 남미 탐방기 ③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이 진행 중인 베네수엘라와 신자유주의 경제성장 모델이 뿌리내린 칠레
등록 2010-10-27 18:14 수정 2020-05-03 04:26

“없는데요!” “써드릴까요? 그냥 빈칸으로 드릴까요?”
영수증을 달라고 하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택시기사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못 받은 영수증이 많아, “빈 영수증 몇 장 더 줄 수 있느냐”고 하자 선뜻 몇 장을 건넸다. 칠레 산티아고는 달랐다. 찌르르릭. 택시 미터기가 영수증을 뱉어냈다. 미터기가 고장난 기사는 영수증 칸 빼곡하게 기사 이름과 탑승 시간, 이동 구간 등을 적어서 건네줬다. 카라카스는 대형 식당조차 신용카드를 거의 받지 않았다. 산티아고는 카드 결제가 되지 않는 곳은 택시와 한 한국식당 정도였다. 카라카스 공항에서는 공항세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어디서 내는지 몰라 헤매다 공항세를 내려고 다시 길게 한참이나 줄을 섰다. 산티아고 공항은 따로 공항세를 내라고 낯선 외국인을 줄 세우지 않았다.

베네수엘라와 칠레의 대조적인 오늘은 ‘혁명’과 ‘발전’을 고민하게 만든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한 빈민가에 다닥다닥 판잣집이 들어서 있다(왼쪽). 칠레 산티아고의 상업지구에 고층 빌딩들이 잇따라 건설되고 있다. 한겨레 김순배 기자

베네수엘라와 칠레의 대조적인 오늘은 ‘혁명’과 ‘발전’을 고민하게 만든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한 빈민가에 다닥다닥 판잣집이 들어서 있다(왼쪽). 칠레 산티아고의 상업지구에 고층 빌딩들이 잇따라 건설되고 있다. 한겨레 김순배 기자

납치가 두려운 밤, 차베스 찬양 울리는 낮

칠레 제2도시 콘셉시온행 고속버스는 주행속도를 승객에게 전광판으로 줄곧 알려줬다. 순간 시속 100km를 넘으면 삑삑거렸고, ‘고객의 안전을 생각한다’는 안내문구가 흘렀다. 카라카스에서는 약속이 30분 늦어지는 것은 예사였고 공무원조차 늦게 나타났다.

카라카스에서 시민들은 납치와 살인을 두려워했다. 산티아고에서는 소매치기와 지진을 걱정했다. 카라카스의 택시는 멈춰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치안이 나쁜 탓에 택시기사가 승객의 행선지 등을 확인한 뒤에야 문을 열어줬다. 칠레 택시의 문은 서자마자 곧바로 열렸다. 카라카스는 보안검색 없이 국립 시몬볼리바르대 캠퍼스에도 들어갈 수 없었고, 가이드의 학생 신분을 확인하고서야 철문을 열어줬다. 반면 산티아고의 가톨릭대 정문을 들어설 때 신분증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라카스의 상점에는 곳곳에 쇠창살을 달았지만, 산티아고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대신 노천카페가 눈에 띄었다. 카라카스 시내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과 외국인은 나 혼자인 듯했다. 칠레 대통령궁 라모네다 앞에서는 디지털카메라를 든 관광객이 건물을 지키는 경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밤 9시께 카라카스 시내의 지하철역 인근 노천바에서 마침 현지를 방문한 한국인과 맥주를 마셨다. 이 얘기를 들은 현지 한국인 가이드는 “카라카스를 너무 우습게 보네. 10년 넘게 산 나도 위험해서 잘 안 가는데”라고 말했다. 산티아고에서도 현지 교민을 만나 밤 10시가 넘을 때까지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이 교민은 지하철까지 어두운 밤거리를 꽤 걸었지만, 여성인데도 조심해야 한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마천루 뒤로 드리운 빈곤이라는 그늘

카라카스에서 건물 신축현장의 타워크레인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산티아고는 타워크레인이 여러 곳에 치솟았다. 칠레의 작은 ‘월스트리트’와 ‘맨해튼’에는 초고층 건물 건설현장 옆으로 신축 건물들의 유리 외벽이 햇빛에 빛났다. 산티아고도 카라카스도 현대차가 굴러다녔다. 산티아고에서는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이 현대자동차의 신형 에쿠스를 타고 다닌다. 카라카스에서는 10년이 훨씬 넘은 구형 엑센트가 굴러다녔다.

카라카스의 텔레비전에서는 채널을 돌리면 차베스의 모습이 나왔고, 거리에는 베네수엘라 국기가 곳곳에 내걸렸다. 산티아고에서는 칠레 대통령궁 앞에 수십 개의 대형 국기가 내걸린 것을 보고서야 ‘아, 칠레 국기를 그동안 잘 못 봤구나’라고 깨달았다. 카라카스에서 지지자들의 차베스 찬양은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되풀이됐다. 반대자들은 비난을 토하며 차베스를 매도했다. 산티아고에서는 맹목적 찬양이나 매도 대신 비판과 반성이 들렸다. 베네수엘라의 무상 의료와 교육 서비스를 안내하던 공무원은 “모두 공짜”를 열심히 설명했지만, 칠레의 의료 서비스에 대해선 여러 사람으로부터 “돈 없으면 죽는다”는 평가를 들었다. 칠레의 최저임금이 월 17만2천페소(약 40만원)지만, 국립 칠레대의 1년 등록금은 440만~900만원에 이르렀다.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이 진행 중인 베네수엘라와 야만적이라는 신자유주의 경제성장 모델이 뿌리내린 칠레 가운데 어디가 더 ‘살기 좋은 나라’인지 판단하기에는 13박14일의 출장이 짧았다. 카라카스 여기저기에 나붙은 단어 ‘혁명’ 대신 칠레가 ‘발전’을 고민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칠레 디에고 포르탈레스대 파트리시오 나비아 교수(정치학)는 “기자가 20년 전에 왔으면 베네수엘라가 남미에서 가장 성공적인 나라라고 했을 것이다. 칠레도 지난 20년간 잘해왔지만, 다른 나라는 더 성공적이었다. 40~50년 전 칠레의 국민소득은 한국의 두 배였지만, 지금은 한국이 두 배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처음에는 월드컵 진출에 만족했지만, 이제 거기에만 만족하지 않듯이 칠레도 더 잘해야 한다. 칠레는 지금 한국만큼은 안 되지만 10~20년 뒤 한국처럼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칠레 가톨릭대 알프레도 레렌 교수(정치학)도 “칠레가 경제적으로 성장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소득분배 면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하고 피녜라 정부가 해결에 노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같은 학교 다비드 알트만 교수(정치학)는 “칠레는 지옥도 천국도 아니다. 상대적으로 잘하고 있지만 교육·복지·의료 등 개선해야 할 게 많다. 우리는 아직 한국에 구리를 수출해 자동차를 수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칠레는 1986~97년 평균 7%의 높은 성장을 기록해 ‘라틴아메리카의 재규어’로 불리기도 했다.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의 급격한 정책 변화에 따른 혼란이 남긴 학습효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안정적 경제성장, 소련 해체에 따른 대체 발전모델 부재 등은 신자유주의 발전모델을 지속시켰고 이는 적절한 국가 개입과 맞물려 개발도상국 가운데 성공적 개혁모델로 자리잡았다. 나비아 교수는 “칠레가 다른 나라처럼 빈부격차의 문제가 있지만, 빈부격차는 몸의 콜레스테롤과 같은 문제다. 칠레는 꾸준히 약을 먹으며 치료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칠레는 올해 1월 남미 국가 가운데 첫 번째로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31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각기 다른 남미, 악마는 미세한 부분에

칠레가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달성하는 라틴아메리카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레렌 교수는 “칠레는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브라질과 다르다. 이런 모델을 다른 라틴아메리카에 제시하거나 복제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알트만 교수는 “칠레는 칠레다. 뉴질랜드 같은 복지국가 모델을 칠레에 이식한다고 성공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남미 속담처럼 ‘악마는 미세한 부분에 있다’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라마다 다른 상황과 특징이 있어 차이가 나고 그에 맞는 모델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베네수엘라에서는 휴대전화 방식이 달라, 낯선 홍콩 전화기를 쓰며 불편을 겪었다. 칠레에서는 로밍한 삼성 애니콜 전화기로 문자메시지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베네수엘라 스페인어가 단어 끝을 씹어먹는 칠레식보다 더 잘 들렸지만, 칠레가 내게는 더 친근했다. ‘혁명’보다 ‘발전’이라는 용어가 그러하듯.

카라카스(베네수엘라)·산티아고(칠레)=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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