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가 졸졸졸 물을 뿜어댔다. 따스한 햇살 아래 시민들은 웃고 장난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건물을 지키던 경찰관이 기념사진을 찍는 시민들을 위해 함께 포즈를 취했다. 한 경찰관은 북한에 대해 묻더니 얼굴을 확 찡그렸다. “독재구먼. 민주주의가 없고….” 지난 8월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대통령궁 ‘라모네다’는 평화스러웠다.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1970년 11월~1973년 9월 집권)의 사회주의 정부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폭탄을 떨어뜨렸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74~90년 집권)의 흔적을 그곳에서 찾기는 어려웠다.
라모네다 앞 아옌데의 동상만이 1973년 9월11일 쿠데타를 증언하고 있었다. “칠레 국민 여러분, 이 연설은 제가 드리는 마지막 연설입니다. …우리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 암울하고 쓰라린 순간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칠레여, 영원하라!” 마지막 라디오 연설의 당당했던 목소리는 간 데 없이, 전투기의 폭격에 맞서 투항하지 않은 채 소총을 들고 싸웠던 아옌데의 동상만 우두커니 라모네다를 쳐다봤다.
“결코 되풀이 돼선 안 된다”피노체트의 ‘악몽’을 찾아가는 길은 산티아고 시내를 30분 넘게 벗어났다. 택시기사도 헤맸다. 주변에 가서도 위치를 묻는 질문에 주민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산티아고 외곽 페냘로렌에 위치한 ‘비야 그리말디’(Villa Grimaldi)는 얼핏 조금씩 잊혀지고 있는 듯했다. 피노체트 재임 중인 1974~78년, 칠레 비밀경찰(DINA)에 의해 약 4500명이 납치되거나 끌려와 마누엘 콘트레라스 대령의 지휘 아래 229명이 숨지거나 실종된 현장이다. ‘론드레스 38’ ‘호세 도밍고 카나스’ ‘라 벤다 섹시’ ‘트레스 이 쿠아트로 알라모스’와 함께 군사독재 시절 잔혹하고 야만적인 폭력이 저질러진 장소 가운데 한 곳이다. 비야 그리말디는 피노체트가 재임 중 고문과 살인, 납치 등을 저지른 혐의로 2006년 10월 90살의 나이에 가택연금되는 직접적 근거가 된 곳이다. 좌익 정치인과 노동자, 학생 등 희생된 229명 가운데 18명은 정치적 처형을 당한 게 확인됐고 나머지 211명은 실종처리됐다.
벽돌담 사이의 철제 대문 한쪽이 열려 있었다. 1997년 3월, 인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상징이자 희생자를 기리는 평화공원으로 바뀐 이곳은 시골 초등학교처럼 아담했다. 나지막한 나무들 사이로 멀리 분수가 물을 뿜어댔다. 1975년 무렵, 군사정부가 소유주를 협박해 강제로 사들인 뒤 수도정보여단(BIM)의 산티아고 작전센터 본부 건물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분수는 아직도 그 자리를 맴도는 영혼의 고통을 정화해주기 위해 설치했다. 호세 루이스 가하르도 등 세 명의 건축가가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설계한 이곳은 2004년 국가기념물로 지정됐다.
잔디가 깔린 가운데로 발을 내딛자, 바닥의 타일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눈카마스 엔 칠레!”(?NUNCA MAS EN CHILE!) 결코 다시 칠레에서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역사의 교훈이 새겨져 있다. 왼편 길을 따라 희생된 이들의 대형 사진이 걸렸다. 중년의 남자와 20대 여자, 노인과 아이를 안은 여성까지. 역사를 기록한 몇몇 추상물 옆으로 수영장이 나타났다. 가로 3m, 세로 7~8m쯤 될까? 바닥 한쪽으로 물이 고여 갈색으로 썩어가는 수영장이 끔찍했던 협박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그 옆으로 희생자들의 사진과 유품 등이 남겨진 ‘기억의 방’과 높이 10m 정도 되는 탑이 자리잡고 있다. 물탱크가 위치했던 이곳 아래는 수용자들이 혼자 또는 4명씩 갇히기도 했다. 생존자들은 이곳에 끌려갔던 이들이 대부분 실종돼 행방을 알 수 없다고 전한다.
그 앞쪽에 새로 설치된 무대 옆으로 ‘장미정원’이 자리잡았다. 이곳에서 희생된 36명의 여성을 기리기 위해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새긴 ‘팻말 꽃’이다. 군사정권 시절에도 이곳은 고통을 모르는 듯 그대로 장미꽃을 피웠다. 정원을 지나자 희생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철제판에 새겨진 ‘이름의 벽’이 섰다. 1973~78년 이곳에서 희생된 이들의 이름과 연도가 빼곡히 적혔다. 아텐시오 코르테스 비센테, 가야르도 모레노 로베르토, 팔마 로블레도 다니엘, 벨리스 라미레스 엑토르…. 따스한 햇볕조차 서늘한 그 기운을 이기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느낀 것처럼 송연했다.
전직 대통령도 고문당한 현장
1998년에 세워진 이 벽을 따라 돌자 ‘고문 장소-매달기’ ‘고문방-전기의자’ 등의 남겨진 표시들이 참혹했던 현장을 전했다. 덜렁 혼자 남은 가로 2m, 세로 1m의 방에는 4명이 갇히기도 했다. 아버지가 아옌데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던 미첼 바첼레트 전 칠레 대통령도 어머니와 함께 이곳 비야 그리말디에서 고문을 당했다. 독재 시절 이곳의 가운데 자리잡았던 중앙 건물은 군사정권 말기 고문의 자취를 감추려는 정권에 의해 사라졌지만 그 고통의 증언은 생생하다. “때로 우리는 군인들이 남긴 음식을 먹어야 했다. 생선 조각과 생선 가시가 뒤섞여 삼킬 수 없을 지경이었다. 비명과 신음소리가 입맛을 빼앗아갔다.”
피노체트 군사정권이 물러난 지 20년, 이곳에서 한 가족은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두 아들과 나들이를 나온 카롤리나 미란다(49)는 피노체트 독재 시절이 “끔찍했던 시기”라며 “고통스러운 유산을 남겼다”고 말했다. 큰아들 카예타노 에스피노사(22)는 “칠레는 피노체트 때문에 아직도 정치적으로 둘로 나눠져 있다”고 설명했다. 피노체트가 오늘날 칠레 경제발전의 토대를 낳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를 ‘위인’으로 섬기는 반면, 반대자들은 인권침해를 비난하며 ‘범죄자’로 여긴다. “피노체트가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고 무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에스피노사는 “피노체트가 경제발전을 이끌었다지만 인권을 퇴보시킨 그의 국가운영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헬기로 비야 그리말디 인근 바다에 납치자를 빠뜨려 가족조차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데 어떻게 잊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빈부격차로 남은 피노체트 유산물었다. 지난 1월, 피노체트의 독재에 맞서 세워진 ‘콘세르타시온’(중도좌파연합)이 20년 집권 끝에 중도우파에 정권을 내준 것은 칠레인들이 피노체트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게 아니냐고. 하지만 에스피노사는 “국민은 콘세르타시온에 변화를 요구했을 뿐 피노체트를 잊은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둘째아들 비센테 에스피노사(19)는 “(현 대통령) 피녜라가 칠레 최고 갑부여서 그가 나랏돈을 훔치는 부정을 저지르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피노체트에 대한 기억을 덮어버렸다”고 말했다.
칠레 가톨릭대 다비드 알트만 교수(정치학)는 “지난 20년 콘세르타시온 정부는 빈곤을 줄이고 중산층이 늘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빈부격차를 줄이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콘세르타시온 정부는 극심한 빈부격차 등 피노체트가 도입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폐해를 바로잡지 못한 채 물러났다. 산티아고에 높이 300m의 남미 최고층 빌딩이 세워지고 있지만, 빈곤층은 ‘15만 페소(약 35만원)로 3인 가족이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피노체트가 남긴 유산은 비야 그리말디에만 남아 있지 않았다.
산티아고(칠레)=글·사진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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