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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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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주는 지구의 자전과 같다

지구촌 거주자 100명 중 3명은 이주민… 규제로 국경을 높여도 이주를 막기는 어려워
등록 2010-08-19 15:22 수정 2020-05-03 04:26
아랍계 이민자의 소요 사태가 발생한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지난 8월10일 경찰이 한 청년을 연행하고 있다. REUTERS/ ROBERT PRATTA

아랍계 이민자의 소요 사태가 발생한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지난 8월10일 경찰이 한 청년을 연행하고 있다. REUTERS/ ROBERT PRATTA

2억1400만 명, 4140억달러.

올 상반기 현재 전세계의 이주민 수와 그들이 체류국 바깥으로 내보낸 송금액 규모다. 국제이주기구(IOM)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 7월 현재 세계 인구(68억6천만 명)의 3.1%가 새 삶터를 찾았거나 혹은 찾아헤매는 이주민이다. 인류 33명 중 1명은 이주민인 셈이다. 그들 중 7.6%(1634만 명)는 전쟁·기아·재해 등을 피해 고향을 등진 난민이다. 폭력적으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사람의 수도 2710만 명에 이른다.

프랑스, 폭력적 이주 규제 강화

강요든, 희망이든, 불가피한 선택이든, 인간의 이주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거스르기 힘든 흐름이다. 21세기 글로벌화된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주의 배경과 동기는 다양하다. 노동(일자리), 가족 재결합, 안보(치안), 분쟁, 자연재해, 보건상의 이유 등은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과 미국 등 경제선진국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선 이주 문제가 심각한 사회 현안이 되고 있다. 이주에 대한 유리장벽은 날로 두꺼워지고, ‘선택적 수용’의 대상이 아닌 외국인 체류자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도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유럽 각국이 앞다퉈 이주 장벽을 높이는 표면적 이유는 유럽연합(EU) 출범 이후 회원국 간에 거의 제약이 없는 여행이 가능해지면서 불법 이주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실업률 증가, 전문 노동력 부족, 복지비용 증대, 치안 불안정, 정치적 보수화 흐름, 집단 정체성 혼란과 이질성 증대 등 복잡한 정치·사회·경제적 맥락이 깔려 있다. 또 외국인 체류자들에 대한 차별과 경계의 배경에는 인종·민족·종교·안보 등의 이유가 중첩돼 있다. 유럽 각국은 이주자들에 대한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을 화두로 삼고 있지만, 이주자 규제 강화는 반대로 소수자 집단 차별과 한 짝을 이룰 가능성이 크다. 자유로운 이동, 노마디즘, 유비쿼터스 같은 열쇳말로 상징되는 현대사회의 역설이다.

프랑스에선 최근 한 편의 동영상이 큰 충격을 주었다. 주택자선 시민단체가 지난 7월21일 촬영한 이 영상에는, 경찰이 파리 북서쪽 외곽 라코르뉴브 지역의 ‘불법 주거촌’에 모여 살던 외국인 이주자 150여 명을 강제 퇴거시키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물리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생생히 담겨 있다. 특히 경찰이 쓰러진 한 흑인 여성의 다리를 붙잡고 끌어내자 겁에 질린 얼굴로 엄마 등에 업혀 있던 어린아이가 웃옷이 벗겨진 채 콘크리트 길바닥에서 질질 끌려가는 장면은 엄청난 공분을 샀다. 경찰은 “물리력의 수준이 과도하지 않았고, 철거작전은 적법하게 이뤄졌다”고 주장했지만, 문제의 동영상은 인터넷 조회 건수가 50만 회를 넘어설 만큼 파장이 컸다.

이런 사태는 프랑스의 우파 정부가 추진 중인 이주자 정책에서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지난 7월30일 남동부 도시 그르노블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주자들의 불법 행위에 대한 초강력 대응 방침을 밝혔다. 외국 태생 이주자들의 폭력 범죄에 대한 형량을 대폭 높이고 국적까지 박탈하겠다는 게 뼈대다. 그 이틀 전에는 프랑스에 불법 거주하고 있는 집시들을 추방하고 집시촌을 단계적으로 해체할 것을 지시했다. “우리는 지난 50년간의 불충분한 이주 규제로 고통받고 있으며, 사회통합에도 실패했다”는 이유다. 그르노블은 지난 7월 중순 사회적 차별에 불만을 품은 아랍계 이민자들의 폭동 사태가 일어난 곳이다.

사르코지의 구상은 야당은 물론 진보적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인종주의반대단체 엠아르아페(MRAP)의 물루드 아우니드 대표는 “사르코지의 연설은 (범죄와의 전쟁이 아니라) 프랑스 공화국과의 전쟁 선포”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사르코지 정부는 “선별적 법률” “극우파의 논리”라는 안팎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을 태세다. 오는 9월부터는 사회적 논란 끝에 지난 7월 의회를 통과한, 무슬림 여성의 부르카 착용 금지법이 발효된다.

21세기 들어 ‘이주’는 지구촌의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됐다. 2007년 영국에서 시민권을 요구하며 행진하는 미등록 이주민들. REUTERS

21세기 들어 ‘이주’는 지구촌의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됐다. 2007년 영국에서 시민권을 요구하며 행진하는 미등록 이주민들. REUTERS

문턱 높이는 영국, 논란 휩싸인 독일

영국도 외국인 이주에 대한 문턱을 부쩍 높이고 있다. 집권 보수당 정부는 연간 이민자 수용 규모를 1990년대 평균인 수만 명 수준으로 줄이고 이민 허용 대상 국가도 유럽연합 회원국으로 제한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또 오는 11월부터는 유럽연합 이외 지역 출신의 외국인 배우자들에게 영국 내 거주 요건으로 영어 구사 능력 인증을 요구하는 제도가 발효된다. 그동안 숙련노동자와 영주권 신청자에게만 요구해오던 영어 능력 시험의 대상을 확대한 것이다.

영국이 이주 규제를 강화하고 나선 것은 유럽연합 출범 이후 최근 몇 년 새 동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매년 수십만 명의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일자리 부족 등 여러 사회문제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체코·헝가리·불가리아 등 유럽연합 가입국은 새로운 이민정책에 제한을 받지 않으면서, 규제의 불똥이 엉뚱하게도 최대의 영국 이민 수출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튀고 있다. 지난 7월 말 경제협력 외교차 인도를 방문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이민정책 수립에 인도의 기업인들과 관리들의 자문을 환영한다”며 ‘인도 달래기’에 나섰다.

독일 정부도 이민법 개정을 저울질하면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숙련노동력 수혈’과 ‘불량 이주자 사혈’을 동시에 만족하는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독일 콜로그네 경제연구소는 “2014년이면 독일 노동시장에서 엔지니어와 과학자, 기술자 등 고급 노동인력이 20만 명이나 부족한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라이너 브뤼더레 경제장관은 지난 7월 말 독일 경제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을 외국인 전문인력에게 매력적인 곳으로 만드는 게 나의 최우선 관심사”라며 이민정책 개정 필요성을 내비쳤다.

독일 시사주간지 이 소개한 지난 8월3일치 독일의 언론 보도는 진보와 보수 진영이 이민법 개정에 접근하는 상반된 시각을 잘 보여준다.

“독일은 1960년대 이래 터키와 남유럽의 값싼 미숙련 노동력이 이민 붐을 이뤘지만, 그들은 자신이 더 이상 필요 없어졌을 때도 독일에 머물렀다. 독일의 사회복지 시스템이 그들을 떠맡았지만, 그 비용은 (독일 국민의) 높은 세금으로 충당됐다.”(중도우파 성향의 )

“독일이 실업자들을 전문가로 변신시키는 잠재력이 크지 않은 상태에서, 지적으로 고안된 이민 프로그램으로 많은 실업자를 구제할 수 있다. 기업은 전문인력이 있어야 성장할 수 있고, 그래야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부문을 창설할 수 있다.”(중도 좌파 성향의 )

 

이주는 인간과 문화의 흐름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석학인 자크 아탈리는 2005년 저서에서 인류 미래 문명의 모델로 ‘호모 노마드’(유목하는 인간)를 제시했다. 이때 ‘노마드’는 ‘발붙일 곳 없는 부랑자’가 아니라 ‘자유롭게 옮겨다니는 창조적 인간’을 뜻한다. 동질 집단으로만 형성된 정주 사회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얘기다. 물론 모든 이주민이 노마드는 아니다. 개별 국가가 수용하기 난감한 이주민도 적지 않다. 그러나 지구적 약자 계층이 곤궁한 삶을 벗어나려 자원과 기회가 많은 곳을 찾아 몰리는 것을 무한정 법과 물리력으로 막는 건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주 문제는 이미 국민국가 혹은 영토국가 단위에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이주를 ‘자본과 노동의 이동’이 아니라 ‘인간과 문화의 흐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류 사회는 본디 그렇게 교류하고 융합하면서 발전해왔다. 이주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 국제사회의 공조가 요구되는 이유다.

조일준 기자 한겨레 국제부문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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