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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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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의 한족은 욕을 달고 산다

‘우루무치 민족 충돌’ 1년, 중국 언론인이 전하는 위구르인 차별의 실상…
불평등 구조 놔두고 경제개발 ‘당근’만
등록 2010-07-01 16:20 수정 2020-05-03 04:26
지난해 7월5일 중국 서부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중심도시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족과 한족의 충돌로 약 200명이 숨졌다. 중국의 신장 지배 이후 최악의 민족 간 충돌 사건이다. 1년 뒤, 중국 정부는 경제개발을 통해 이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한 ‘당근’ 정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민족 문제도 돈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중국의 한 언론인이 최근 신장 현지를 취재하면서 만난 위구르인들의 목소리와 차별의 현실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중국 내에서 민감한 주제임을 감안해 필자의 요청에 따라 필명으로 글을 싣는다. 편집자
6월13일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카슈가르에서 한 건설 노동자가 마오쩌둥 동상 앞에 비계를 설치하고 있다. 경제개발이 민족 갈등을 치유할 수 있을까. REUTERS

6월13일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카슈가르에서 한 건설 노동자가 마오쩌둥 동상 앞에 비계를 설치하고 있다. 경제개발이 민족 갈등을 치유할 수 있을까. REUTERS

지난해 7월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난 뒤, 한족 인구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 여론은 너나할 것 없이 위구르족의 야만성을 비판하고 나섰다. 7·5 우루무치 유혈 사태 1주년이 다가오면서, 최근 중국 공산당은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지도자를 교체하고 신장공작좌담회를 잇따라 열어 신장 문제를 중시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신장은 중국 정부의 소원대로 민족 단결과 발전을 실현할 수 있을까? 큰 의문과 관심을 품고 얼마 전 이 신비로운 서부의 땅을 다시 밟았다.

웅장한 톈산이 신장을 남북으로 나눈다. 신장 북부는 물과 토지가 풍부하고, 숲과 초원이 광활하다. 신장 남부는 사막으로 이어지고 중앙아시아의 분위기다. 많은 신장 친구들은 중국 국토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풍부한 자연과 다양한 문화를 품고 있는 이 땅의 발전 잠재력이 크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왕러취안이 이 지역을 망쳤다고 말한다. 왕러취안은 얼마 전 물러난 신장의 최고지도자(신장 공산당 당서기)다.

전 당서기 왕러취안 “신장 인민의 도둑”

톈산 아래 있는 첫 번째 도시인 우루무치는 이미 중국 내륙에 있는 한족 도시와 거의 다를 바 없이 변해버렸다. 시내 주요도로는 낡아서 움푹 패고 중앙격리대도 심하게 손상됐다. 놀라운 것은 이 도로가 지난해 9월에 새로 보수됐다는 사실이다. 우루무치 시민들은 시 정부가 도로 보수공사를 왕러취안의 고향인 산둥성 기업에 넘겼으며, 심지어 우루무치시에 있는 벽돌 하나하나까지 ‘왕러취안표’라고 비난한다. 인근 창지시에서는 광활한 황무지 위에 개발구들이 들어서고 있는데, 공사장마다 ‘산둥성의 모모 건축회사’가 시공을 맡는다는 표지판이 서 있다. 신장 각지의 간부들 가운데도 산둥 사람이 대다수다. 지난해 7·5 유혈 사태 뒤 해임된 우루무치시 시서기를 포함해 정부와 회사 고위 간부 가운데 산둥 출신의 비율이 높다. 한족이든 다른 민족이든 모두 왕러취안을 “산둥 인민의 좋은 아들, 신장 인민의 도둑”이라고 원망한다.

신장으로 몰려든 이민 물결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됐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한족 인구의 비율은 4% 정도였지만, 이제는 50%를 넘었다. 많은 성들이 우루무치에 이민이주사무소를 세웠고, 전국 각지에서 지진 피해를 입거나 댐과 저수지 건설 등으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이민들도 끊임없이 신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런데 신장 통치를 맡은 지도자마다 자기 고향의 이익을 배려해왔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통치로 유명했던 초대 신장 당서기 왕전(1949년 인민해방군을 이끌고 신장에 진주한 인물)이 신장을 다스릴 때 그의 고향인 후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군부대 간부들에게 후난 여성과 결혼하도록 지시했는데, “후난 여성 7천 명이 톈산으로 내려가다”라는 말이 나왔다. 왕러취안이 신장을 다스리기 시작한 1995년부터 이 지역 일부 도시의 이민자 중 산둥 출신 비율이 70%에 이르기도 했다. 남부 신장 카슈가르에 속한 수러현의 간부 절반이 ‘낙하산’ 인사로 임명된 산둥 사람들이며, 현지 출신의 간부들과 많은 충돌을 빚었다. 왕러취안은 수많은 의문 속에서도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4기를 연임한 지방 최고지도자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우루무치는 베이징보다 2시간이 늦는데도 베이징 시간에 맞춰 살아간다. 저녁 9시는 사실 저녁 7시다. 아직 어둡지 않아 몇몇 친구들과 택시를 타고 위구르인 밀집 거주지역인 얼다오차오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가기로 했다. 하지만 택시 기사는 현지 정부의 규정상 9시 이후에는 위구르족 거주지역에 갈 수 없고 이 지역을 통과할 때 정차도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기사는 짜증을 내며 “그런 야만인 지역에 가면 뭐하냐”고 되묻는다. 택시를 여러 대 잡았지만 모두 거절당한 뒤 우리는 할 수 없이 걸어서 얼다오차오까지 갔다. 식당마다 손님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식사를 하면서, 친구들은 이 지역 한족들이 자발적으로 위구르족 식당을 거부하고 위구르족 지역에서 물건을 사지 않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식당업은 위구르족의 주요한 일거리다. 그 밖에는 여행과 관련된 소매업에 종사하는 위구르족이 많다. 위구르족 거주지 얼다오차오의 대표적 상가인 국제대바자에 있는 위구르 전통의 특산물·수공예품 가게들도 심한 불경기를 겪고 있다. 이야기를 나눈 이곳 위구르족 상인들은 대부분 다른 일을 하고 싶어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무슬림들의 예배일에 현지 최대의 모스크(이슬람 사원)에 갔다. 모스크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어떤 사람이 다가와 “어디서 왔고 뭘 할 거냐”고 물었다. 앞뒤로 세 사람이 계속 내 일정을 방해했다. 모스크마다 이런 감시원들이 있고, 정부 직원이나 대학교수, 학생들이 모스크를 출입하면 곧바로 해임되거나 퇴학을 당한다고 한다.

우루무치 공항에서 위구르족 간부와 함께 신장 남부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신분증 검사를 하는 이가 위구르인 탑승객에게는 얼굴을 위아래로 똑바로 쳐다보며 불친절하게 검사를 해서 옆에 있던 나에게도 무례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난해 우루무치 유혈 사태 이후 터키 대통령의 특사가 이 공항에서 강압적인 몸수색을 당해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나는 현지의 친구에게 “그 위구르인은 고위 간부인데 왜 이런 대우를 받고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위구르인은 오랫동안 차별을 받다 보니 이미 습관이 됐다”고 말했다.

분열 위협 과장하며 위구르인을 ‘적’으로

왕러취안이 신장을 다스리기 시작한 1995년 이후 확정된 통치 방식은 분열 세력을 공격하는 것이다. 분열 행위와 위구르족, 이슬람교가 연관된 것으로 강조하면서, 매년 양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와 전국인민대표회의)가 열리기 전 재판과 총살형을 집중적으로 진행하고 양회 기간에 언론의 취재가 집중되는 기회를 이용해 신장의 분열 위험을 반복해서 선전했다. 중국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과정에서 신장을 비롯한 변경지역에서는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각종 모순을 처리하는 데 공을 들이느라 변경지역의 일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다. 왕러취안은 계속 고압적인 수단을 활용하면서 자신이 신장의 분열을 막고자 결연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과시했고, 자신의 통치가 훌륭한 선택이라고 내보였다. 여론의 비난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왕러취안은 신장의 최고통치자 자리를 계속 유지했다. 중국의 전통적 통치 수단인 ‘적을 옆에 끼고 자신을 보호한다’는 식이다.

그 대가는 위구르인이 치렀다. 20년 동안 위구르인들은 위험세력이라는 이미지로 낙인찍혔고, 철저히 ‘2등 국민’으로 간주됐다. 위구르족 친구는 한숨을 쉬며 “왕러취안의 정책과 선전 때문에 위구르족 전체가 국가의 공적이 돼버렸다. 결백을 증명하기도 어렵고 애국할 자격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한족과 위구르인의 충돌은 오래된 불평등 구조가 배경이다. 지난해 7월8일 우루무치 시내에서 위구르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NIR ELIAS

한족과 위구르인의 충돌은 오래된 불평등 구조가 배경이다. 지난해 7월8일 우루무치 시내에서 위구르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NIR ELIAS

한족 기업만의 부동산 장사

신장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위구르족 문화의 중심도시인 카슈가르(중국명 카스)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거리를 순찰하며 돌아다니는 군용 트럭들이다. 트럭엔 실탄을 장전한 총을 멘 군인들이 가득 앉아 있고, 차량 밖에는 ‘인민해방군은 카슈가르 각 민족 인민들의 영원한 친지’라고 적힌 큰 붉은 천이 둘러져 있다.

카슈가르에 있는 ‘향비묘’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위구르족 후궁이었다는 향비가 묻혀 있다. 중앙아시아풍 묘지는 잘 보존돼 있다. 묘지의 전경이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향비처럼 분장한 위구르족 아가씨가 다가오더니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무척 아름다웠지만, 관광지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어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하고 가버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현지의 한족 관리가 위구르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놈들, 달라붙어서 악착같이 여러 말을 해야 장사가 성사되지 이렇게 게을러서 어떻게 돈을 버나?”

현지에서 제일 큰 기업은 20년 전 한족 이민자가 설립한 것이다. 소매업으로 시작한 이 회사가 진짜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중국 개혁·개방의 기회를 이용해 국유농장 5개를 사들인 것이다. 카슈가르 같은 지역에서 목초지가 풍부한 농장은 가장 우수한 자산이다. 현재도 이 기업의 최대 유동자산은 사장의 ‘지혜로운’ 투자에서 나온다. 사장은 적절한 시기에 카슈가르의 부동산에 투자해 2년 동안 수천만위안의 수익을 얻었다. 이런 독특한 성장 방식은 최근 중국 정부가 주도한 경제성장 방식과 긴밀히 연관돼 있으며, 더 중요한 것은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은 참여할 수 없는 한족 문화권 내의 게임의 법칙이라는 점이다.

카슈가르에 속한 자스현에서 한족 인구는 1%도 안 된다. 하지만 이곳의 고급 식당과 호텔에선 손님은 모두 한족이고 위구르족은 서비스만 한다. 2년 전 쓰촨에서 이곳으로 이주했다는 한족 기사는 “신장을 다스리려면 조금은 야만스러운 지도자가 있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분명 내가 만났던 한족 관리들은 공식적인 장소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욕을 해댔고, 그래야만 자신들의 권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선전의 ‘자살 공장’을 신장으로?

하지만 대다수 한족들도 위구르족은 역사가 유구하고 음식, 건축, 복장, 생활 관습 등의 면에서 독특한 문화와 풍부한 사회구조를 가진 민족이라고 인정한다. 위구르족의 모스크는 이란풍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모스크 안에는 이발·목욕 등의 서비스 시설도 있어 터키와도 비슷하다. 유명한 카슈가르 올드시티는 과거 실크로드의 모습을 현재까지도 보여주는 옛 도시다.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한 영화 도 여기서 촬영됐다. 카슈가르는 중국의 서부지만 중앙아시아 문화의 중심이기도 하다. 한족들은 이 점을 인정하고,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위구르족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현재와 같은 구도를 그대로 둔 채 거액을 투자해 경제만 발전시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대립은 필연적으로 확대되고 더 많은 문제가 벌어질 것이다.

지난 5월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신장공작좌담회를 열었다. 이후 카슈가르 지역 지도자는 언론에 미래의 목표를 발표했다. ‘동에는 선전, 서에는 카슈가르’라는 구호로 카슈가르에 경제특구를 설치해 광둥성의 수출산업기지 선전처럼 무역과 산업의 중심지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바로 그날 광둥성 선전시 수출액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대만 전자기업 폭스콘의 거대한 공장에서 올 들어 10번째 투신자살 사건이 일어났다(이후 며칠 안에 13번째 자살까지 일어났다.) 선전의 이런 ‘고혈을 짜내는 공장’ 모델이 카슈가르로 옮겨지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우루무치·카슈가르(중국)=천샹페이 중국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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