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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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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아프리카의 3차 대전

대륙의 3분의 1 이상이 분쟁 중, 전세계 분쟁 사망자 88% 차지해…
군소 군벌은 명분도 목표도 없이 ‘영구 전쟁’ 중
등록 2010-03-24 17:43 수정 2020-05-03 04:26

아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대륙이 아프리카다. 인구 역시 아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지구촌 전체 육지 면적의 약 20.4%에 해당하는 3020만여km²의 땅덩어리에 인류의 14.7%에 이르는 약 10억 명의 인구가 산다. 인류의 기원이 서린 땅, 아프리카는 또한 끝없이 유혈 사태가 이어지는 ‘분쟁의 땅’이기도 하다. 다국적 싱크탱크 ‘국제위기감시그룹’(ICG)이 지구촌 70여 개 분쟁 지역의 현황을 점검해 매달 펴내는 ‘위기감시보고서’를 보면, 그 아픈 사정이 자세히 드러나 있다.

‘이슬람 반군이 아니다. 지역을 기반으로 온갖 범죄를 서슴지 않는 군벌이 문제의 핵심이다.’ 지난 3월11일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시내의 한 검문소에서 정부군 병사들이 반군의 기습공격에 대비해 방어자세를 취하고 있다. REUTERS/ FEISAL OMAR

‘이슬람 반군이 아니다. 지역을 기반으로 온갖 범죄를 서슴지 않는 군벌이 문제의 핵심이다.’ 지난 3월11일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시내의 한 검문소에서 정부군 병사들이 반군의 기습공격에 대비해 방어자세를 취하고 있다. REUTERS/ FEISAL OMAR

잊혀진 전쟁? 언제 기억한 적이 있었나

ICG가 지난 3월1일 내놓은 최신 자료를 보자. 중앙아프리카 지역에선 부룬디·중앙아프리카공화국·차드·콩고민주공화국·르완다·우간다 등 6개국이 크고 작은 분쟁에 휘말려 있다. ‘아프리카의 뿔’로 불리는 북동부 지역에선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케냐·소말리아·수단과 독립을 인정받지 못하는 소말릴란드 등 6곳이 분쟁 지역으로 꼽혔다. 남아프리카에선 마다가스카르·짐바브웨 등 2개국이, 서아프리카에선 코트디부아르·기니·말리·니제르·나이지리아 등 5개국이 각각 분쟁에 휘말려 있다.

이 밖에 북아프리카에서도 알제리·이집트·모리타니와 모로코에서 분리·독립을 선언한 서사하라 등 4곳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분쟁 지역’으로 분류됐다. 아프리카 전체 국가의 3분의 1을 훌쩍 뛰어넘는 지역이 크고 작은 분쟁으로 얼룩져 있다는 얘기다. ICG는 지난 2월 한 달 동안 전세계에서 상황이 더욱 악화한 나라를 4곳 꼽았는데, 코트디부아르·케냐·니제르·나이지리아 등 이 국가들 모두가 아프리카 대륙에 자리잡고 있다.

‘잊혀진 전쟁.’ 흔히들 아프리카 대륙을 휩쓸고 있는 무장갈등을 일컫어 이렇게 표현한다. 그런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지에서 5년여 인도지원 활동을 한 버질 호킨스 일본 오사카대 교수는 지난 2008년 10월 펴낸 이란 책에서 “잊혀졌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고 썼다. 그는 “잊혀지려면 우선 기억이 됐어야 하는데, 아프리카의 무장갈등은 애초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다”며 “기억하는 것도 없는데 ‘잊혀졌다’고 표현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 채, ‘비밀’스럽게, 아프리카는 오랜 세월 피를 흘려왔다.

아프리카 국가별 분쟁 현황

아프리카 국가별 분쟁 현황

통계는 때로 현상의 단면을 잘라 날것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는 데 유용하다. 호킨스 교수는 냉전이 막을 내린 1990년부터 2007년 말까지 지구촌 각지에서 벌어진 무장갈등으로 인한 사망자를 지역별로 나눠 비율로 표시한 자료를 책에 실었다. 자료를 보면,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이 전체 희생자의 1%씩을 차지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수많은 사상자가 났음에도, 중동 지역은 전체의 단 4%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중동을 뺀 아시아가 6%로 그 뒤를 이었다. 나머지 88%의 희생자는 오로지 아프리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이 기간에 콩고민주공화국(DRC·옛 자이르)에서만 무려 540만 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단다.

유혈 분쟁이 앗아가는 게 어디 목숨뿐일까? 요행히 살아남은 이들의 삶도 죽어간 이들보다 별반 나을 게 없었다. 지난해 11월 말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이 펴낸 난민 현황 통계자료를 보면, 지난 2005년 이후 지구촌 각지에서 ‘국내난민’(IDPs)이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총칼과 유혈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자기 땅 곳곳을 난민 신세로 떠돌고 있는 절대다수가 아프리카인들이다. 인터넷 매체 는 “만약 이 정도 상황이 유럽에서 벌어졌다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불렸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제국주의가 남기고 간 유산

가난이 분쟁을 낳았고, 분쟁이 다시 가난을 확대재생산한다. 세계적인 인도지원단체 ‘옥스팸’은 지난 2007년 10월 무력 분쟁으로 인해 아프리카 각국이 한 해 감당해야 할 경제적 손실이 무려 180억달러에 이른다는 추정치를 내놓은 바 있다. 1990년 이후부터만 따져도 3천억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천문학적 액수다. 이는 같은 기간 국제사회가 아프리카 각국에 쏟아부은 인도지원금 총액과 엇비슷한 규모란 게 옥스팸의 지적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국제사회의 아프리카 지원은 허위적 자선이었던 게다.

어디서 비극의 뿌리를 찾아야 할까? 제국주의가 남기고 간 유산을 거론하는 이들이 많다. 서구 열강이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국경에 따라 같은 종족이 다른 나라 국민이 됐다. 분리독립 움직임과 영토분쟁이 이어지는 건 당연했다. 소수에게 기득권을 몰아주며 오랜 세월 다수를 억압하게 했다. 제국주의가 물러간 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과 핍박의 세월을 되갚으려는 이들 사이에 극한 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 분쟁의 씨앗이다.

지난 3월8일 나이지리아 중부도시 조스 외곽의 도고나하와 마을에서 몰려든 주민들이 종족갈등으로 무차별 살해된 이들의 주검을 살펴보고 있다. REUTERS/ AKINTUNDE AKINLEYE

지난 3월8일 나이지리아 중부도시 조스 외곽의 도고나하와 마을에서 몰려든 주민들이 종족갈등으로 무차별 살해된 이들의 주검을 살펴보고 있다. REUTERS/ AKINTUNDE AKINLEYE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유혈의 열매를 맺는 과정도 엇비슷하다. 아프리카 각국이 앞다퉈 독립국가를 건설할 무렵, 냉전의 망령이 지구촌을 휘감았다. 부패한 독재자를 보듬은 것은 헛된 이념을 내세우며 무한 대결에 몰입하던 옛 식민모국이었다. 냉전이 막을 내린 뒤, 독재자들도 하나둘 사라져갔다.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지만, 못내 이를 잡아채지 못했다. 무질서와 혼란의 시대가 너무 길었던 게다. 유혈은 멈추지 않았다.

국제적십자사(IRC)는 지난 2008년 3월 펴낸 ‘의견서’에서 한 국가 안에서 벌어지는 ‘무장갈등’의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꼽은 바 있다. 첫째, 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무장갈등이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웠던 아프리카 각국의 해방투쟁이 이 부류에 해당한다. 둘째, 국가 통제권을 두고 벌어지는 무장갈등이다. IRC는 이를 “한 국가 안에서 이념이나 정치적 지향이 다른 세력이 체제를 장악하기 위해 일정한 강도로 상당 기간 지속해 벌이는 무력 충돌”이라 풀었다. 냉전 시절, 부패한 독재자와 맞섰던 반군·게릴라 투쟁을 이렇게 분류할 수 있겠다.

각지의 군벌들, 21세기판 해적들

마지막으로 ‘실패한 국가형’ 무장갈등이 있다. 국가를 ‘형성’하거나 체제를 ‘장악·통제’하는 일과 관계없이, 지엽적인 문제로 갈등이 지속되는 형태를 말한다. 1990년대 초반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 이렇다 할 중앙권력 없이 지역과 종족에 따라 갈린 군벌의 발호로 유혈 사태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소말리아가 여기에 해당한다. 좀더 자세히 따져보자.

미국과 유럽연합 등은 소말리아의 현 혼란상을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는 과도정부와 알카에다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극단주의자 무장조직 알샤바브 사이의 갈등으로 풀이한다. 최근 워싱턴 외교가에서 이른바 ‘건설적 퇴각’을 거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 외교관계협회(CFR)는 지난 3월17일 ‘소말리아, 새로운 접근법’이란 제목의 정세 분석 보고서에서 “주변 국가를 위협하지 않고, 이른바 이슬람 지하드(성전)를 거부하며, 서방의 인도적 지원을 용인한다면, 어떤 소말리아 이슬람 진영과도 공존할 수 있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슬람 세력과 일정한 타협을 이룰 수 있다면, 소말리아를 ‘안정화’할 수 있다는 계산인 게다. 과연 그럴까? 외교·안보 전문 격월간지 는 최신호에서 전혀 다른 분석을 내놨다.

“1991년 이래 지난 20년 세월 동안 소말리아를 쥐락펴락해온 건 지역에 기반을 둔 군벌이었다. 유력한 정치 세력이 등장해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할 조짐을 보일 때마다, 이들 군벌은 힘을 합쳐 그 반대 세력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국제사회가 오랜 세월 소말리아에 관심을 두지 않는 새, 지금과 같은 무정부 상태를 지속시키는 게 이로운 기득권층이 만들어진 게다. …각지에서 발호하는 군벌이야말로 소말리아 현 사태의 핵심이다.”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의 고마에서 손이 묶인 한 남성이 중무장한 정부군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종족갈등과 군벌의 유혈극으로 콩고민주공화국에서 1990년 이후 적어도 5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REUTERS/ FINBARR O'REILLY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의 고마에서 손이 묶인 한 남성이 중무장한 정부군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종족갈등과 군벌의 유혈극으로 콩고민주공화국에서 1990년 이후 적어도 5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REUTERS/ FINBARR O'REILLY

긴 설명, 필요 없어 보인다. 21세기에 해적이 들끓고 있는 터다. 종교도 이념도, 안중에 없다. 쾌속정에 로켓포로 무장한 그들이 노리는 건 오로지 ‘돈’뿐이다. 노략질은 ‘직업’이다. 서방이 ‘건설적 퇴각’을 단행한대도, 그들이 관심을 가질 리 없다. 암담한 상황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소말리아 사례’가 아프리카 대륙을 휩쓸고 있는 무장갈등의 ‘일반형’으로 자리매김해가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아니, 군벌의 무차별 폭력이 난무하는 콩고와 니제르 등지의 최근 상황을 보면 이미 현실로 닥쳐왔다는 느낌이다. 는 이렇게 지적했다.

“아프리카에서 유혈이 낭자한 야만적인 전쟁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지금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무장갈등은, 적어도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투에 나선 세력이 특정한 이념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뚜렷한 목표도 없다. 전투를 통해 주요 거점을 장악하거나, 수도로 입성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되레 외지고 한적한 곳에서 숨어지내는 걸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편이 온갖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르는 데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해방투쟁’은 옛말이 된 지 오래

이른바 ‘고전적 형태의 아프리카 해방투쟁’은 옛말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기존 국가질서도 함께 무너졌다. 일대 혼돈이 닥쳐왔다. 열강의 틈바구니에 낀 조국의 운명을 바꾸려 했던 반군은 ‘멸종’됐다.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무장갈등이 불을 뿜고 있다. “더욱 거칠고 폭력적이며, 혼란스럽고, 끝을 맺기도 어려운 형태”로 말이다. 천연자원을 헐값에 팔아넘겨 무기를 사들이고 부를 축적하려는 군벌이 날뛰기 시작했다.

총이 곧 힘이 되는 시대, 옛 동구권 국가에 쌓여 있던 AK47 자동소총과 값싼 탄환 등 ‘소형화기’는 아프리카로 흘러들어 ‘대량살상무기’(WMD)로 둔갑했다. 고상한 이념도, 숭고한 목표도 없다. 애초부터 나라를 세우거나 정권을 잡을 생각이 없으니, 민심을 의식할 이유도 없다. 격정적인 연설로 자원병을 끌어모을 필요도 없다.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마을에서 소년을 붙잡아다 무장시켰다. 닥치는 대로 빼앗고, 죽이고, 불태우면서 제 잇속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이들을 ‘반군’이나 ‘게릴라’로 부르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

내세운 명분도, 이루려는 목표도 없다. 그런 싸움에 끝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다. 는 “설령 정글에 있는 이들 ‘반군’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더라도, 별반 협상을 할 만한 여지가 없을 것”이란 암울한 전망까지 내놨다. “현금이든 무기든 원하는 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고작 장관 자리 몇 개나 자신들이 다스릴 수 있는 몇 뙈기 땅덩어리에 만족할 군벌이 아니기 때문”이란 게다. 모두의 외면 속에 오늘도 아프리카가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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