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해다. 오는 6월11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대 도시 요하네스버그의 월드컵 주경기장, 호리병 모양의 ‘사커시티’ 스타디움에서 개막전이 열린다. 홈팀 남아공과 중미의 강호 멕시코가 맞붙은 조별리그 A조 1차전이다. 그날, 지구촌의 눈과 귀가 남아공으로 향하게 될 게다. 월드컵 기간 내내 세계인의 관심은 남아공에 모아질 게다.
“남아공 국민은 조국이 성취한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이제 평생 단 한 번 맛볼 수 있는 경험을 축하할 준비를 해야 할 때다.”
칼레마 모틀란테 남아공 부통령은 지난 3월1일 월드컵 개막 ‘D-100일’을 맞아 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축제가 아니다. ‘국가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기회이자,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가져다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이번 월드컵 준비를 위해 남아공 정부와 국제축구연맹(FIFA)이 쏟아부은 자금만 약 6조8천억원에 이른단다.
그래서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월드컵 같은 ‘메가 이벤트’를 유치한 나라의 정부는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된다. ‘도시 미화’에 특히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국가의 품격’이 달린 문제다. ‘보기 흉한 것들’은 치워야 한다. 그게 사람이어도 별반 다를 바 없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가 경험했던 이른바 ‘상계동 올림픽’은, 기실 세계 도처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월드컵 개막이 초읽기에 들어간 남아공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적절한 주거에서 생활할 권리가 있다. 국가는 합리적이고, 주어진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법률 및 기타 조처를 통해 점진적으로 이 권리를 실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모든 상황에 대한 검토를 거친 뒤에 나온 법원의 명령이 아니고서는 주거에서 퇴거시키거나 주거를 철거할 수 없다. 임의 퇴거를 허용하는 어떤 입법도 허용되지 아니한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의 암흑을 뚫고 1996년 마련된 현행 남아공 헌법의 제2장은 국민의 권리를 나열한 ‘권리장전’이다. 그 제26조에는 ‘주거권’을 가장 기본적인 인권의 하나로 못박아뒀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부유한 백인들은 주로 도심에서 살았다. 가난한 흑인들은 도시 외곽에서 양철지붕을 얹은 ‘무허가 주택’을 짓고 살았다. 피부색에 따라 사는 곳과 주거의 형태가 달랐던 시절이다. 헌법에 ‘주거권’이 명시된 것은 분명 뜻깊은 일이었을 터다.
흑인 정권이 들어선 뒤, 일자리를 찾아 흑인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백인들은 도심에서 벗어나 교외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백인들이 빠져나간 도시는 조금씩 쇠락해갔다. 건물 유지·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요금을 내지 않아 전기와 수도가 끊기는 건물도 하나둘 늘어갔다. 이른바 ‘나쁜 건물’이다. 월드컵 유치 이후 남아공 정부가 도심에 있는 ‘나쁜 건물’ 재정비에 팔을 걷어붙인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아파르트헤이트나 마찬가지
문제는 이들 방치된 건물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점이다. 도심에서 일자리는 구했지만, 적절한 주거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흑인 노동자들이 버려진 건물에 보금자리를 튼 게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다국적 싱크탱크 주거권·강제퇴거센터(COHRE)가 펴낸 자료를 보면, 월드컵을 앞두고 ‘나쁜 건물’ 정비사업이 본격화하면서 상당수 도심 거주 흑인 노동자들이 아무런 대안 없이 강제 퇴거로 내몰리고 있단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조짐은 엿보였다. 유엔이 운영하는 인터넷매체 〈IRIN뉴스〉는 지난 2007년 4월13일 요하네스버그발 기사에서 과일노점을 운영하는 넬슨 케타니(55)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그나마 이윤을 남기며 장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내에 거주하는 것뿐이다. 도심에서 벗어나 생활하게 되면, 교통비로 수입의 30% 이상을 써야 할 판이다. …우리를 도시 외곽으로 강제로 내모는 것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인종분리나 마찬가지다.”
올 들어선 노점 단속도 대폭 강화됐다. 인터넷 매체 은 지난 3월2일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케이프타운 시당국이 가로 정비·개선 사업을 통해 세계적인 도시로 거듭나겠다며, 도심에서 노점 영업을 전면 금지시켰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 2월17일 댄 플레이토 케이프타운 시장은 성명을 내어 “노점상의 영업 규모가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커지면서, 교통 흐름을 방해하고 시민의 통행까지 가로막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실제 시당국은 지난 3월8일 노점 영업이 가장 성한 미첼스플레인 지역에서 경찰 등 100여 명을 동원해 대대적인 노점상 단속을 벌였다. 귀에 익은 주장, 낯이 익은 풍경이다.
월드컵 경기장 건설 과정에서도 강제 퇴거가 이어졌다. 모잠비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동부 음푸말랑가주 주도 넬스푸르트 외곽에 자리한 소도시 음봄벨라가 그 전형이다. 사파리 관광으로 유명한 크루거 국립공원을 지척에 둔 그곳은 스와지족의 일원인 마사페니 부족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다. 영국 가 지난해 8월8일 전한 내용을 보면, 마사페니 부족의 땅에는 4만6천 석 규모의 최첨단 축구장이 들어선다. 경기장 일대 면적만 118ha에 이른단다.
이를 위해 애초 음푸말랑가 주정부가 마사페니 부족 지도자들에게 제시한 보상금액은 단 1랜드, 우리 돈으로 약 150원이었다. 3년여 지루한 법정 공방까지 벌인 끝에 지난해 4월 870만랜드(약 13억3천만원)까지 보상금이 늘어나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특히 집권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출신으로 음봄벨라 시의회 의장으로 활동하던 지미 모랄라(44)가 동료 의원들이 개발업자와 결탁해 거액의 뇌물을 챙겼다는 의혹을 폭로했다가 자택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두는 일까지 벌어졌다.
시당국이 제국주의자처럼 보인다“ANC가 장악한 음봄벨라 시당국이 마사페니 부족 주민들을 대하는 방식은 제국주의자들의 행태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제국주의자들은 순진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반짝이는 단추와 거울을 주고 그들의 땅을 빼앗았다.”
보상금 관련 송사에 간여했던 응덴데야 마분들라 프레토이라고등법원 판사는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상금액을 두고 지루하게 법정 공방이 이어지는 새 개발업자들은 마세페니 부족 거주지역에 있던 흑인학교 2곳을 전격 철거했다. 학생들은 벽돌로 지은 기존 학교에서 몇km 떨어진 곳에 조립식으로 급조해 만든 학교로 옮겨가야 했다.
환기가 제대로 안 되는 새 학교로 옮긴 뒤부터 하루 평균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무더위에 탈진해 쓰러졌다. 교사들도 오후가 되면 아예 수업을 진행하지 못할 정도였단다. 참다 못한 학생들은 교실과 도서관에 불을 지르며 항의시위를 벌이기까지 했다. 는 문제의 학교에 다니는 타이거 마부소(16)의 말을 따 “월드컵 경기장은 불행만 가져다줬다”며 “짧은 기간 치러질 월드컵을 위해 우리의 미래마저 희생해야 하느냐”고 전했다. 음봄벨라 경기장에선 북한 대 코트디부아르 경기를 포함해 6월16일부터 25일까지 열흘 동안 조별리그 단 네 경기가 치러질 예정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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