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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판길에 넘어져서 유산하면 불법?

미국 유타주, ‘신중하지 못한 행동’으로 유산한 여성까지 처벌하는 불법낙태 금지법 상하원 통과해
등록 2010-03-10 15:57 수정 2020-05-03 04:26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밖에서도 생존이 가능한 시기에 이르기 전까지 임신한 여성은 어떤 이유로든 임신 상태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스스로 내릴 권리가 있다.” 지난 1973년 미 대법원은 낙태와 프라이버시권에 관한 이른바 ‘로 대 웨이드’ 사건에서 이렇게 판결했다. 이로써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각 주법과 연방 법률이 모두 폐지됐고, 미국은 낙태를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나라가 됐다.

지난 1월22일 미 워싱턴 중심가에 자리한 연방대법원 청사 앞에서 낙태 반대론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제37차 연례집회를 하고 있다. REUTERS/ MOLLY RILEY

지난 1월22일 미 워싱턴 중심가에 자리한 연방대법원 청사 앞에서 낙태 반대론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제37차 연례집회를 하고 있다. REUTERS/ MOLLY RILEY

임신부 모두가 잠재적 범죄자?

그렇다고 낙태를 둘러싼 논쟁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올해로 연방대법원의 ‘기념비적 판결’이 나온 지 37년째가 됐지만, 낙태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불을 뿜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으로 흔히 낙태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단편을 보여주는 사건이 서부 유타주에서 한창이다.

지난해 5월 유타주 동부 소도시 버널에서 17살 소녀가 경찰에 체포됐다. 청부폭력을 교사한 혐의였다. 뜻밖인 것은 폭력의 대상이다.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소녀는 임신 7개월째였다. 출산도, 낙태도 두려웠다. ‘뭇매를 맞으면 유산이 되지 않을까?’ 소녀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실행에 옮겼던 게다.

폭행의 대가는 150달러였다. 돈을 받은 애런 해리슨(21)이란 청년은 소녀를 한 건물 지하실로 데려가 반복해서 배를 걷어찼다. 하지만 소녀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용케 견뎌낸 태아는 석 달 뒤 건강하게 태어나 어느 부부에게 입양됐다. 해리슨은 곧 체포됐다. 2급 살인미수 혐의가 인정돼 징역 5년형에 처해졌다. 소녀는 어떻게 됐을까? “낙태를 시도한 건 불법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철부지가 저지른 이례적인 사건이다. ‘오죽하면 그랬겠느냐’고 보듬는 게 자연스런 반응이었을 터다. 하지만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이 사건을 유심히 지켜본 이가 있다. 칼 위머 유타주의회 하원의원(공화당)이다. 경찰 출신인 그는 철부지 임산부를 ‘태아 살인미수범’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적용할 법 조항이 없었다. 그가 지난해 말 ‘불법 낙태’를 시도한 여성을 처벌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유타주 하원 법안 제12호’(HB-12)를 대표발의한 이유다.

유타주는 보수세가 강한 곳이다. 주의회 상하 양원을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다. ‘법안 제12호’는 일사천리로 하원(찬성 59 대 반대 12)을 통과했고, 지난 2월18일 상원에서 표결에 부쳐졌다. 은 2월18일 인터넷판에서 “찬성이 24표, 반대가 4표였다”고 표결 결과를 전했다. 당장 미 전역에서 여성계와 인권운동 단체들이 들고 일어났다. “의도하거나, 고의 또는 신중하지 못한 행동으로 태아가 유산되도록 하는 행위”에 대해 최대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임신한 여성은 예외 없이 유산의 위험을 안고 있다. 미 보건당국의 통계를 보면, 임신부의 15~20%가 유산을 경험한단다. 위머 의원은 3월1일 〈ABC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란 위험이 존재함을 알면서도 이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따르자면, 임산부 모두가 ‘잠재적 범죄자’가 된다. 는 3월1일치에서 여성운동가들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임산부가 빙판길을 걷다가 넘어져 유산이 됐다면 어떨까? 해석에 따라 중형에 처해질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 될 수도 있다.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배우자와 사는 여성들은 또 어떤가? 위험이 존재함을 알고도 피하지 않았으니 처벌받아 마땅한가?”

노림수는 ‘낙태 전면 불법화’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을 비롯한 인권단체들은 법안의 ‘노림수’가 따로 있다고 본다. 유산을 불법으로 몰아간 것도 결국 낙태를 전면 불법화하려는 의도란 게다. 위머 의원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ABC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내가 낙태에 반대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며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라도 유타주에서 낙태를 금지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속내를 밝혔다.

“즉각 거부권을 행사하라!” 인권단체들의 아우성에도 게리 허버트 유타주 주지사(공화당)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유타주 법은 “주 의회를 통과한 법안에 대해 주지사가 20일 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법안은 공식 법률로서 효력을 갖추게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유타에선 유산도 불법이 되고 마는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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