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금융위기의 주범임에도 국가마다 긴축재정 등을 통해 자국민에게 부실은행이 남긴 천문학적 채무를 대신 짊어질 것을 강요하면서 시민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유럽의 빚더미 국가를 일컫는 ‘PIIGS’(포르투갈·이탈리아·아일랜드·그리스·스페인) 중 스페인과 그리스의 대규모 시위에 이어 포르투갈에서도 총파업이다. 가장 심각한 곳은 그리스다. 유럽의 시한폭탄으로 떠오른 그리스에서는 첫 파업이 있은 지 2주 만인 지난 2월 23일 24시간 총파업이 다시 진행됐다. 2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이번 파업으로 공항, 철도, 은행, 행정기관, 법원, 병원, 국영기업 등 나라 전체 기능이 거의 마비 상태였다. 그리스 정부에 추가적 긴축재정 조치를 요구하는 유럽연합(EU)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읽히는 대목이다. 국가마다 긴축 재정에 나서는 이유는 ‘금융위기에 따른 재정지출 → 공공부채 증가 → 채무이행 불능 → 파산’의 악순환을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과연 작금의 경제위기는 파산을 불러올 것인가?
가계나 기업과 달리 국가는 더 이상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도 빚을 갚지 않을 수 있다. 빚을 갚으려고 모든 재산을 처분할 필요도 없다. 반면 가계 파산의 경우 모든 재산을 처분하는 수밖에 없다. 가령 유럽 귀족들은 자신의 성을 팔고 살림살이를 처분해 하인들에게 마지막 월급을 지급하고 외부 요리사나 공증인, 은행에 진 외상과 빚을 갚았다. 극빈층의 사정이 어떠했을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기업의 경우, 기계·건물·특허권·차량 등을 (그럭저럭) 처분해 거래처와 은행, 채권자에게 진 빚을 (간신히) 갚고 이미 임금 삭감으로 고통받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한다.
2009- 장피에르 파브로 /르몽드 3월호
어려움에 처한 기업은 고객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가격 인상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비용 절감에도 한계가 있다. 반면 국가는 채무이행 불능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을 가졌다. 가령 수입 측면에서 보면 특정 납세자 그룹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할 수 있다. 저축액이 가장 많은 최고소득층(1)에게 추가 세금을 물릴 수 있는 것이다(사실상 국가의 채권자인 그들에게 세금을 물린다고 해서 내수가 크게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이런 식의 세금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최고소득층이 누리는 특권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특권이란 자신의 잉여소득에 대해 세금을 내거나 국채에 투자해서 이익을 얻거나 양자택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후자로 기울게 된다. 그러나 유럽의 각국 정부도 최악의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그들에게 추가로 세금을 걷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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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인상을 통한 수입 확보가 힘들어지면 국가는 공공지출을 대폭 삭감하는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공공서비스 축소로 이어진다. 정부는 공무원의 임금과 퇴직금을 삭감하고 공무원 수를 감축하게 된다. 당연히 공공사업도 줄어든다. 프랑스 정부는 퇴직 공무원 2명에 대해 1명만 충원함으로써 1년에 5억 유로를 절감하고 있다. 그러나 요식업에 대한 부가가치세 인하로 생긴 1년 동안의 세수손실액 30억 유로와 기업에 제공한 세제 혜택으로 사실상 국가의 의료보험 부담금이 250억 유로 증가한 경우와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액수다.
세제 혜택과 더불어 세계 금융위기에 따른 국가 세수의 부족으로 각 국가가 채무이행 불능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런 가정은 그리스 같은 나라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프랑스·영국·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국가의 재정 상태에 대한 합리적 판단이 아니라 채권자나 투기꾼들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다.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다고 믿는 순간 투기꾼들은 매입 혹은 매도를 통해 전체 금융시장의 상승세나 하락세를 유도하게 된다(투기꾼들은 이처럼 큰 판돈을 걸 수 있는 기회를 반긴다). 가령 미래를 예상하고 판돈을 거는 행위가 결국 그 미래를 실현하게 되는 자기실현의 메커니즘이 채권금리 상승(즉, 채권가격 폭락)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한 국가의 재정 적자와 국채 금리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채무 변제 능력이 한계에 이르는 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가능할까? 당연히 경제 교과서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민간에 대한 채무이행으로 국가의 생산능력이 파괴되는 지점은 한 국가의 정치적·사회적 톨레랑스의 한계 지점과 일치한다. 페르낭 레이노의 정리에 따르면 이 한계 지점이 드러나는 순간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상당한 시간이란 얼마만큼의 시간을 말할까?
일단 이 한계 지점에 이른 후에 채무이행 불능 상태가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 구조자금 투입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통화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밖에 없다. 이를 확인하듯이,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장은 그리스가 IMF 구제자금으로 연명하는 것이 ‘모욕적’인 일이 될 거라고 말했다. 미국의 포스트케인시언 경제학자 토머스 팰리는 유럽중앙은행이 회원국의 공공부채 일부를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스템에서 유럽중앙은행은 새로 통화를 발행해 유로존 내 각국 정부에 경제 규모나 상황에 따라 연간 할당액 안에서 대출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2) 이 시스템은 일종의 ‘자동적인 경제 안정화 기제’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유럽중앙은행은 2008년과 2009년 은행에 구조자금을 제공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국가들에 낮은 이율로 자금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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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토머스 팰리의 제안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유럽중앙은행은 출범 시점부터 ‘방만한’ 예산 운용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회원국에 대한 직접적 구조자금 투입을 금지하고 있다. 물론 이런 금지조항으로 원래의 목적이 얼마나 달성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볼 수도 있다. 골드만삭스(3) 같은 기업이 전제군주의 업무를 대행하는 대재상 노릇을 하도록 내버려두자. 대신 유럽 국가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영업을 하는 은행으로 하여금 위기에 처한 회원국에 금융 지원을 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 것이다. 국채 상환 기간이 다가올 때 은행이 새로 발행된 국채를 다시 구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은행은 인색한 고리대금업자 노릇을 하는 대신 상한선이 책정된 금리로 국가에 자금을 조달해주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이같은 의무 대출은 말을 물가로 끌고 가 물을 먹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물이 좀 짜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로존 내의 금융·통화 기관들이 공공기관들(중앙정부, 지방정부, 그 밖의 공공기관 등)에 대출해준 금액은 현재 1조 유로에 달한다. 국·공채 형식으로 소유하고 있는 금액도 1조5천억 유로에 이른다. 이는 그리스의 공공부채 총액의 8~10배에 해당하는 규모다.(4) 이들 금융기관은 예전에는 리스크가 적다고 여겨졌던 국·공채를 마구 사들였다. 그러나 경제 전반이나 국가 재정을 위협함으로써 스스로 국·공채의 리스크를 키운 장본인이 되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국가 파산 막기, 은행을 전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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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법은 실현하기가 쉬울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다. 가령 유럽중앙은행이 직접 대출자의 역할을 맡지 않고도 비슷한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된다. 은행들로 하여금 그리스나 그 밖의 국가들의 국채를 매입하게 하면 이 은행들은 자연스레 유럽중앙은행에 자금을 요청할 수밖에 없고, 그 반대급부로 자신들의 채권을 양도할 것이다. 이 채권 중에는 유로존 내 국가들이 발행한 국·공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므로 유럽중앙은행은 회원국에 자연스럽게 자금 지원을 할 수 있게 된다.(5)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두 번째로 기대되는 이점은 국가와 은행 간에 상호 의존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막대한 구조자금 투입으로 위기를 모면한 은행이 이번엔 국가를 돕는 데 나서야 할 차례다. 이솝 우화가 주는 교훈을 따른다면 말이다. 다시 말해 금융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인 은행이 그 비용의 일부를 감당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공공부채 심화(경제활동 둔화와 세수 감소)의 원인이 상당 부분 금융위기에 있다고 한다면 은행의 국채 이율 인상을 제한하는 것은 금융시장을 정상화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다.
그러나 이런 조치(정치적으로는 중도우파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가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결코 경제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여러 이유 때문이다. 이런 조치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 때문에 현재 통용되는 통화정책과 양립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금리 생활자들도 스스로의 무덤을 파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투자를 꺼릴 것이다. 남유럽과 북유럽의 금리 차이도 문제로 제기된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수단을 강구해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채무이행을 단념하는 것이다. 더 이상 자금 조달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한 국가는 채무의 일부를 포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국가가 사라지는 일은 없다. 채무 면제 범위는 채권자나 과세 대상자와 협상해서 정하면 된다. 상환 기일이 임박한 국채의 상환 금액을 삭감하거나 이자 지급을 일정 분기 동안 중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제 비율이 얼마가 되든 간에 불량 채무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다. 따라서 빚 전체를 탕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여러 번 반복할 수 없는 조치이므로 한 번에 큰 효과를 거두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파산 직전에 이르렀던 국가는 일시에 채무를 변제함으로써 재기할 힘을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연간 이자 지급액에 해당하는 만큼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확보된 자금이 적자를 메울 만큼의 수준이 되면 국가 재정은 정상화될 수 있다.(6) 물론 채권자들에게는 힘든 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채권자들이 지난 20년간 국가에 세금을 내는 대신 국가의 채권자 노릇을 하면서 미납한 세금을 한 번에 갚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노동경제학 전문가로서 현재 릴르 제1대학 교수 및 릴르 정치대학 강사로 활동 중이다. 그는 주류 경제학의 기초를 비판하는 차원에서 연구를 하고 있으며 ‘금융과세연합’(ATTAC)의 회원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2001·창작과비평사) 등이 있다.
번역•정기헌 guyheony@ilemonde.com
(1) 2003년 프랑스의 상위 20% 고소득층은 수입의 3분의 1을 저축했다. 그 이하 소득층의 저축률은 10%를 밑돌았다(프랑스 경제연구통계국(INSEE), Paris, 2009, www.insee.fr).
(2) ‘Euroland is Being Crucified Upon 1st Own Cross of Gold’,
(3) 골드만삭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작업을 수행했다. 첫째, 그리스 정부가 유럽연합(EU) 기준에 맞춰 부채 액수를 조정해서 제시하는 일을 도왔다. 둘째, 그리스 정부가 부채를 갚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조언했다(가령 상황이 절망적임을 보여주는 것). 마지막으로 골드만삭스는 그리스 신용부도스와프(CDS)의 가격이 오르는 쪽에 투자했다. 동전 던지기와 마찬가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4)
(5) 2009년 유럽중앙은행이 소유한 공채는 3330억 유로에 달했다.
(6) 2010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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