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애국의 이름으로 거침없는 인권유린

아랍어 단어장 소지했다고, 소형 배낭 나왔다고 체포하는 9·11 사생아 미 ‘애국법’ 폐해 심각
등록 2009-09-30 15:55 수정 2020-05-03 04:25

“9·11 동시테러를 누가 저지른지 알아?”
“오사마 빈라덴이오.”
“빈라덴이 사용하는 언어가 뭔지도 알아?”
“….”
미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에 자리한 포모나대학 4학년인 닉 조지는 지난 봄학기를 중동의 요르단에서 보냈다. 아랍어 공부를 집중적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별 탈 없이 학기를 마친 그는 이집트와 수단을 여행한 뒤 지난 8월 말 새 학기 시작에 맞춰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캘리포니아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8월29일 잠시 들른 필라델피아 공항에서 그는 뜻밖의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가 9월11일치에서 전한 사건의 전말을 들여다보자.

‘불안의 일상, 일상의 불안.’ 나지불라 자지 사건이 불거지면서 미 국토안보부와 연방수사국이 다중이용 시설에 대한 테러경보를 내린 9월22일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자리한 그랜드센트럴역 앞에서 자동소총과 방탄조끼로 중무장한 경관이 삼엄한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사진 REUTERS/ SHANNON STAPLETON

‘불안의 일상, 일상의 불안.’ 나지불라 자지 사건이 불거지면서 미 국토안보부와 연방수사국이 다중이용 시설에 대한 테러경보를 내린 9월22일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자리한 그랜드센트럴역 앞에서 자동소총과 방탄조끼로 중무장한 경관이 삼엄한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사진 REUTERS/ SHANNON STAPLETON

그날, 배낭을 멘 조지가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려는 순간 금속탐지기가 울어댔다. 가방 안에 든 스테레오 스피커가 문제였다. 공항 보안요원들은 그를 따로 불러세운 뒤 가방을 뒤졌다. 하지만 보안요원들의 눈길을 끈 것은 스피커가 아니었다. 조지가 아랍어 단어를 외우기 위해 만든 200장 정도의 낱말카드가 그들을 흥분시켰다.

‘테러’· ‘폭파’ 단어 문제 삼아

아랍어 공부에 열심이던 조지는 에 나오는 어휘를 아랍어와 영어로 써넣은 암기용 카드를 만들었다. 카드에 쓰인 단어 가운데는 ‘테러’와 ‘폭파’ 등도 포함돼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것으로 그날 조지의 ‘운세’가 결정됐다. 학생증을 보여줘도 소용없었다. 왜 요르단·이집트·수단을 다녀왔는지 찬찬히 설명해도 먹히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교통안전국(TSA) 요원이 그에게 다가와 9·11 동시테러의 배후와 그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은 그로부터 약 45분이 지난 뒤였다. 조지는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모든 것을 설명했고, 내가 불법 물품을 소지하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잠시 뒤 경관이 들이닥쳐 아무런 설명 없이 내게 수갑을 채웠다.”

공항경찰서로 옮겨진 그는 수갑이 채워진 상태로 유치장에 갇혔다. 2시간여 만에 간수가 수갑을 풀어줬고, 다시 비슷한 시간이 흘러갔다. 이윽고 연방수사국(FBI) 요원 2명이 찾아와 본격적인 심문을 시작했다. 왜 아랍어를 배우려는지, 중동엔 왜 갔는지, 종교가 이슬람인지, 이슬람 단체에 가입한 적은 없는지….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혹시 학교에서 공산주의 관련 단체에서 활동한 적은 없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지루한 심문은 끝났다. 다행히도 FBI 요원들은 그가 ‘위험 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풀려났을 때, 예약한 비행기는 이미 이륙한 지 오래였다. 필라델피아 교통안전국은 이와 관련해 “조지가 검색대 앞에서 이상행동을 보이며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조사를 한 것”이라며 “아랍어 낱말카드 때문에 조사를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단다. 물론 여러 시간 구금·조사한 것에 대한 사과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9·11 동시테러 8주년, 미국은 여전히 ‘정상’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불안과 공포는 종종 이성을 마비시킨다. 9·11 동시테러란 세기적 충격에 빠진 미국이 딱 그랬다. 테러를 막을 수만 있다면 건국 초기부터 신성시해온 개인의 자유를 조금은 희생할 수도 있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잘못한 거 없으면 불안해할 이유도 없지 않으냐”는 억지도 수사기관에 힘을 실어줬다. ‘테러방지 수단 확보를 통한 미국 단결·강화법’이라는 기이한 이름의 법안에 대통령이 서명한 것은 테러 발생 단 45일 만인 2001년 10월26일의 일이다. 통상의 입법 절차와 달리 의회에서 변변한 토론조차 거치지 않은 채 통과된 342쪽 분량의 이 법이 바로 미국판 테러방지법, 곧 ‘애국법’(PATRIOT Act)이다.

애국법 도입과 함께 관련 법규도 대폭 바뀌었다. 기존 테러 관련 수사에 동원됐던 해외정부감시법·전기통신사생활법·돈세탁통제법·은행거래비밀법·이민국적법 등도 수사기관의 권한이 대폭 강화하는 쪽으로 개정됐다. 영장 없는 도·감청이 포괄적으로 허용됐다. 도서관 대출카드에서 은행 거래 내역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사생활 정보도 FBI의 요청서(NSL)만으로 영장 없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테러 용의자뿐 아니라 그 주변 인물에 대한 감시와 도·감청도 이뤄졌다.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를 찾아야 했던 이 모든 일들이 “수사에 필요하다”는 당국의 판단만 있으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전미민권연맹(ACLU)은 지난 3월 펴낸 ‘애국심을 되찾기 위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애국법 도입으로) 정부는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알 수 있지만, 당신은 정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테러 혐의로 수사를 받아오다 지난 9월19일 연방수사국 요원들에게 전격 체포된 아프간 출신 이민자 나지불라 자지가 차량에 태워진 뒤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 연합/ AP PHOTO

테러 혐의로 수사를 받아오다 지난 9월19일 연방수사국 요원들에게 전격 체포된 아프간 출신 이민자 나지불라 자지가 차량에 태워진 뒤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 연합/ AP PHOTO

법무부 불기소율 33%에서 87%로 껑충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까? 9·11 동시테러 이후 미 본토에서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은 것도 결국 애국법의 힘이었을까? 딱히 그렇게 볼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되레 FBI가 송치한 테러 관련 사건에 대한 미 법무부의 불기소율이 애국법 도입 이후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는 점은 ‘과잉 수사’의 혐의만 키우고 있다. 미 시러큐스대학 연구팀이 9·11 동시테러 5주년을 맞아 지난 2006년 9월 펴낸 자료를 보면, 2001년 33% 수준이던 테러 관련 사건 불기소율은 애국법 도입 이후 지속적으로 높아졌다. 이미 2003년 70%대를 넘겼고, 2005년과 2006년엔 불기소율이 각각 84%와 87%까지 치솟았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남용되기 마련인 게다.

수사 당국은 일찌감치 ‘창의성’을 발휘했다. 일단 테러 혐의자를 체포해 이민법이나 (거짓 진술에 따른) 공무집행 방해죄 등의 경미한 범죄를 이유로 신병을 확보한 뒤 본격적인 조사를 벌이는 일종의 ‘선제공격’ 방식을 적극 활용했다. 지난 9월19일 전격 체포된 이후 갈수록 파장이 커지고 있는 나지불라 자지(24) 사건은 그 전형이다. 등 현지 언론이 전한 사건의 추이를 살펴보자.

주범으로 꼽히는 자지는 1985년 아프가니스탄 동부 파크티아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7살 때 가족과 함께 파키스탄으로 이주한 그의 가족은 1999년 다시 미국으로 터전을 옮겨 뉴욕 퀸스 지역의 플러싱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올 초 가족과 함께 콜로라도로 이사를 했고, 덴버에서 공항 셔틀버스 운전기사로 일했다. FBI가 그에게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는지는 아직까지 확실치 않다. 다만 지난 몇 년 새 그가 파키스탄을 자주 오간 것이 발단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난 9월9일 자지는 돌연 렌터카를 타고 뉴욕으로 향했다. 그는 체포된 뒤 변호사를 통해 “가족이 운영하던 커피 좌판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 뉴욕행에 나섰고, 항공기를 이용하지 않은 건 “미국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파키스탄에 자주 방문한 이유도 공개했다. 2004년엔 대부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서였고, 최근 자주 드나든 것은 현지에서 친지의 중매로 결혼을 한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였단다. 하지만 수사 당국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각국 정상이 모이는 유엔총회 개막을 앞두고 유력한 테러 용의자가 뉴욕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FBI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수사 당국은 자지가 뉴욕에 도착하기 전 두 차례나 검문을 했다. 하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옛 동네에선 정보요원들이 그의 사진을 들고 다니며 탐문 수사도 벌였다. 그가 뉴욕에 도착한 뒤에는 미행을 붙이기도 했다. 이를 눈치챈 그는 두 차례나 경찰서로 항의 전화를 했고, 집으로 돌아와 FBI 덴버 지부에 자진출두해 사흘에 걸쳐 28시간여 동안 조사에 응했다.

한편 수사 당국은 주차 위반을 이유로 견인한 자지의 차량에서 원하던 ‘단서’를 확보했다. 차량에 있던 그의 노트북 컴퓨터에서 폭탄제조법과 폭파법 등 9쪽 분량의 자료가 담긴 이미지 파일을 찾아낸 게다. 자지가 조사를 받는 동안 FBI 요원들은 그의 아파트와 가족·친구의 집 등을 비밀리에 수색했다. 이 과정에서 맨해튼 한복판에 자리한 그랜드센트럴역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테이프와 사용하지 않은 소형 배낭 10여 개가 추가로 발견됐다. 수사 당국이 2004년과 2005년 각각 스페인 마드리드와 영국 런던을 뒤흔든 ‘통근열차 테러’에 활용된 ‘배낭폭탄’을 염두에 둔 것도 이 때문이다.

FBI는 9월19일 자지를 전격 체포했다. 사흘째 조사에 협력하던 그가 더 이상 출두하지 않겠다고 밝힌 직후였다. 그의 아버지 모하메드 왈리 자지(53)와 뉴욕 퀸스 지역 모스크 이맘(성직자)인 아마드 와이스 아프칼리(37)도 함께 체포했다. 흥미로운 것은 체포의 근거다. 자지 부자에겐 거짓진술 혐의가, 이맘에겐 자지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 혐의(수사기밀 누설)만 씌워졌다. ‘선제공격’인 게다. 수사는 급격히 확대되고 있고, 언론에선 연일 “범행 모의에 가담한 인물이 10여 명 더 있다”는 등의 추측성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자지 체포 시점에 대중교통 시설에 테러경보를 내렸던 미 정보 당국은 9월22일 각종 스포츠 경기장과 호텔·공연장 등 다중 이용시설로 경보를 확대 발령했다.

한시법 연장 놓고 논쟁 거세질 듯

애국법 206조는 테러 혐의자가 전화번호를 바꾸거나 전화회사를 바꾸더라도 추가 영장 신청 없이 도·감청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15조는 테러 수사에 필요하다고 당국이 인정한 혐의자의 도서관 대출카드 등 개인정보와 컴퓨터 하드디스크, 차량 등을 제한 없이 훑어볼 수 있도록 했다. 또 6001조는 테러단체나 외국 정부와 관련이 없는 개인이라도 테러 혐의가 있는 경우 영장에 적시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포괄적으로 압수수색할 수 있도록 정해놨다. 위헌 논란을 빚는 이 3개 조항은 올해 말로 효력이 다하는 ‘일몰 조항’이다. 이 조항들의 효력 연장 문제를 포함해 애국법 전반에 대한 의회 차원의 논쟁이 막 시작될 참이다. 안보와 인권 사이의 어그러진 균형을 이번엔 바로잡을 수 있을까? ‘절묘한 시점’에 터져나온 나지불라 자지 사건의 추이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